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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난돌 Jun 12. 2019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법

《하나레이 베이》, 마츠나가 다이시, 2018, 브런치무비패스#5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줄거리
  피아노 바를 운영하는 사치는 어느 날 비보를 전해 받는다. 바로 서핑을 위해 하와이로 떠난 아들 타카시가 상어의 습격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장례 절차까지 마친 사치는 이후 매년 같은 시기,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베이를 찾는다. 열 번째로 하나레이 베이를 찾은 해, 사치는 우연히 곤란을 겪고 있는 아들 또래의 서퍼 둘을 만나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들이 카우아이 섬에 머무는 동안, 그들 중 한 명인 타카하시로부터 외다리 서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외다리 서퍼가 아들 타카시리라 직감한 사치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1. 전쟁과 자연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이곳의 자연은 때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곤 합니다. 그럼에도 여기 사람들은 자연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부디 아드님의 일로 이 섬을 원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아드님은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전쟁처럼 사람들 사이의 증오에 희생된 게 아니라요.”

 
 아들 타카시의 시신을 수습한 경관 사치에게 건넨 말이자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어쩌면 정답을 또렷이 설명하고 있는 대사다. 띄엄띄엄하나마 영화는 전쟁과 자연을 대비시킨다. 당장 경관이 사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그의 이모부 이야기를 꺼낸다.

  사치가 아들을 잃고 10년 후, 카우아이 섬의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칠 때 시비를 거는 군인 역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다. 그는 사치를 세상의 온갖 슬픔을 혼자 다 진 척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비꼬며, 자신은 전쟁 속에서 전우를 잃었음에도 이렇게 극복하고 살아간다고 큰소리친다. 이에 타카하시는 레스토랑 밖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치에게 모욕을 퍼붓는 미군에게 욕을 날리고 얻어맞아 병원에 간다. 비록 상처투성이일지언정 일말의 저항을 한 것이다.

  반면, 영화의 후반부 사치는 자신은 이 섬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섬이 자신을 거부한다며 아들을 잃은 상실감의 후폭풍에 몸부림친다. 그러면서 거대한 고목을 자신의 두 팔로 쓰러뜨리려고 하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하나레이 베이와 고목으로 상징되는 자연 앞에서 사치는 무력하게 울 뿐이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도쿄기담집』에 실려 있다). 그래서일까,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는 두려움과 경외감이 담긴 일본 특유의 자연관과 역사에 관하여 반성적인 입장을 내비치는 하루키의 역사관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전쟁은 비록 거대한 폭풍처럼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다. 자연 앞에서 상대적이나마 전쟁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고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2.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

  아들의 죽음을 통보받고, 화장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의 짐을 정리할 때조차 사치는 울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해보이기까지 한다. 사치의 회상을 통해 엿보이는 그녀와 아들의 관계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들은 제대로 해 준 것이 없다고 사치를 원망하고, 그런 아들에게 사치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른다. 경관 말에 따라 10년 동안 사치가 하나레이 베이를 찾은 것은, 아들의 죽음 이후라도 그와 가까워지려는, 그를 알아가려는 사치의 노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첫 걸음이다.

  첫 걸음은 그 시작이기에 위대하지만, 서툴기 마련이다. 아들의 장례를 어떻게 할지 상담하면서 사치는 아들의 손도장을 찍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많은 유족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라면서. 그러나 사치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아들의 손도장은 경관과 경관의 아내가 맡아 보관한다. 그들은 사치가 카우아이 섬을 방문하는 매 해, 올해는 손도장을 받아가지 않겠느냐며 부드럽게 권유한다. 이는 아들을 조금 더 이해하고자 카우아이 섬을 찾는 이면에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치의 모습을 직유한다. 하나레이 베이에서도 직접 서핑을 하거나, 서퍼들을 바라보는 대신,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사치의 모습은 이를 뒷받침한다.

  무언가를 머리로 안다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들이 서핑을 좋아했다는 사실, 아들이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의 위치를 안다는 것과 아들이 서핑을 탈 때 느꼈던 감정에 공감하는 것, 그가 몸담갔던 파도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하나레이 베이에서 아들의 흔적을 뒤쫓던 사치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 등장하는 인물이 사치가 도와준 두 소년 서퍼이다. 아들의 또래라는 이유로 어딘지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그들을 통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엮이지 않았을 전혀 다른 타인을 통해 그녀는 아들을 비로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영화는 나무 그늘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사치의 발에서,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밟는 모습, 나아가 마침내 해변에 발을 담그는 그녀의 모습으로 일련의 과정을 그려낸다. 결국 《하나레이 베이》는 상실과 상처의 극복이 아니라, 받아들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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