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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타이거 May 19. 2024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퇴직인사메일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쓰자!

2달 남짓한 기간에 벌써 5째 퇴직인사메일을 받았다.

회사 경영환경이 좋지 않아 이직하는 친구들이 많은 요즘이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아직까지 채용시장에서 상품 가치가 있는 젊음이 부럽기도 하지만 더 이상 내 삶에 이직이라는 단어는 없을 것 같은 중년의 심리적 안정감(?)도 그리 나쁘진 않다.

이곳에서 나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싫은 상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 조직문화도 잠시 아련하고 애틋해지기도 한다. 비록 매우 잠깐이지만.




퇴직 인사 메일은 대체로 비슷한 패턴이다.


"00년도에 입사하여 수년간 근무하며 부족했지만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한분 한분 찾아뵈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이곳에서 배운 걸 바탕으로 새로운 곳에서 열심히 하겠다.

아쉽지만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행복과 건강을 기원한다."


큰 틀에서 위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 좋은 말들이고 맞는 말이지만 그냥 무난하고 획일적이다.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도 회사의 정해진 규범과 문화의 틀 안에서 작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하다.

얌체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던 신입사원의 패기와 신선함은 회사의 거대한 조직문화의 그림자에 의해 서서히 사라진다. 대체로 1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 후로는 단지 조직의 일원으로, 공장의 작은 부속품처럼 회사원이라는 가면을 쓰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업무상 작성하는 이메일은 목적에 맞게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나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아마 회사에 다니는 동안 유일하게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없는 메일이 퇴직인사메일일 것이다. 그러니 퇴직인사메일을 쓸 때만이라도 가면을 벗자.

내가 이곳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어떻게 일했었는지. 그리고 어떤 성장과 어려움이 있었는지. 퇴직하는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 진짜 감사한 일과 하고 싶은 말을 담백하게 적어보자.

길지 않아도 좋다. 메일을 읽고 누군가에게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만이라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책무까지 남김없이 완수한 것이리라.




퇴직메일의 목적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자신의 퇴직을 알리는 것이다.

나와 직, 간접적으로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퇴직을 알려 업무적으로 차질이 없게 하고 감정적으로 작별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퇴직메일의 목적은 충분하겠지만 그럼에도 두 번째 목적을 부여한다면 그 내용이 남은 사람들과 조직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기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퇴직인사메일을 받은 5명 중 한 명만 직접 찾아와서 인사를 나눴다. 나머지도 누군지는 알지만 그럴 만한 친분은 안된다. 메일 수신인은 최소 수백 명이다. 어차피 찾아뵐 마음도 시간도 없으면서 모두가 쓴다고 똑같이 따라쓸 필요가 있을까. 메일을 받는 그 누구도 저 문장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찾아뵙고 인사할만한 사람한테는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어떻게든 찾아가서 직접 인사할 것이다.

나한테 안 찾아왔다면 그 사람에게 찾아뵐만한 사람이 아닌 것뿐이다.


물론 때론 형식이 더 중요할 때가 있고 빈말이라도 예의상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안다.

하지만 이건 퇴직인사를 하는 마지막 메일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흔적을 남기는 중대한 행위이다.

회사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워지자.


그런 차원에서 내가 한번 적어보았다.




오늘로 15년 9개월간의 회사생활을 마무리합니다.

매일 아침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지옥철로 출근할 때마다 오늘을 꿈꿔왔습니다.

드디어 그 꿈을 이루는 날이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네요. 모아놓은 돈은 없고 이직은 어렵고 배워놓은 기술도 없는데 아들딸 학비는 계속 들어가야 해서 걱정이 됩니다.

한편으론 매일 아침 동료들을 만날 설렘과 주어진 업무를 잘해봐야겠다는 기대감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뻥 뚫린 것 같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내 몫 이상은 해내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이제 짧은 회사생활을 마무리하며 남은 분들께 당부하고 싶은 것 3가지만 말씀드리고 사라지겠습니다.


첫째, 서로서로 많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성과를 냈을 때뿐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세요.

돌아보면 오롯이 내 인생의 한 페이지였고 남는 건 뿌듯함과 보람뿐이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위의 한마디 평가에 따라 기분이 얼마나 왔다 갔다 했었는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후배도 선배도 동료도, 상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지만 변한다면 그 시작은 인정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만이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라 믿습니다.


둘째,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회사의 일은 지시와 보고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동기와 계획과 철학은 나의 내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되고 안되고를 떠나 그 과정이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좌절과 상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내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밝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누구와 일하든 멘탈을 유지하려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정도에서 벗어남 없이 실행해야 합니다.


셋째, 기혼자분들은 가정에 충실하십시오. 

일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밤낮없이 일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후회합니다. 

결국은 가족들에게 돌아갑니다. 평소에 가족들을 돌보고 챙기지 않으면 나중에도 못합니다. 일이라는 핑계로 절대로 가족의 끈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어긋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회사에서 가장 바쁩니다. 우리가 여유가 생기면 자녀들이 더 바빠집니다. 물론 일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자녀와의 시간도 한번뿐이라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 퇴직인사도 머 그렇게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너무 길고 지루해서 아무도 안 읽을 것 같기도 하고..

휴.. 다음에 다시 정리해 봐야겠다.

자기소개서처럼 퇴직인사도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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