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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28. 2022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문단속

'집콕' 시절, 홍상수의 다시 돌아와 쌓아가는 불확실성의 반복에 대하여




아마도 가장 의아할 제목의 홍상수 감독 새 영화 ‘탑’은 영어로 쓰면 ‘Walk up’이다. 

청담동 4층 건물 ‘salt’에서 시작해 다시 그곳에서 끝이 나는 영화는 그래서 건물에 주목하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층층을 걸어올라 지상 너머 옥상으로 향하는 그 ‘오름’에 있다. 간촐한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오랜만에 만난 병수(권해요)와 그의 딸 정수(박미소), 그리고 김 사장(이혜영)이 짧게 인사를 나누고, 이 장면은 바로 전작 ‘소설가의 영화’에서 만났던 어느 책방의 도입,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다소 식상하다 싶지만, 홍상수의 반복이 똑같았던 적은 단 한 번 없고, 그제야 비로서 난 ‘들어섬’의 의미를 조금 깨우친다. 영화가 시작한다는 것, 스크린 프레임 안으로 진입한다는 행위, 그런 이동과 전환의 시작. 어쩌면 홍상수는 건물이란 유기체의 프레임을 통해 영화의 안과 밖, 현실과 그 너머, 그러니까 그가 줄곧 탐지해온 세상의 근원이거나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는 여정에 서있는 게 아닐까.  

장소가 바뀌어 김 사장과 병수, 정수는 1층 식당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아마도 그건 몇 해 전 ‘소설가의 영화’ 속 준희와 세원이 오랜만에 만났던 바로 그 자리의 어느 무렵일 것이다. 돌고 돌아오는 시간 속, 예고되지 않는 세월이란 무엇 하나 있을까. 다시 한 번 등장하는 ‘오랜만’이란 시제, 지금부터 시작하는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늘 다시 시작하는 시간을 산다.



영화는 나누어보면 모두 4개의 챕터로 흘러간다. 결론부터 말하면 층마다 하나의 챕터가 할애되는 꽤나 균형감의 얼개다. 오랜만에 만났다 헤어지고(1층) 이후 다시 만난 뒤 살게되고(2층) 이후 또 하나의 이별이 지나간 후(3층) 다시금 지상에 돌아와(4층) 이야기는 겨우 마침표를 꺼낸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구분하는 단절의 쇼트를 어디에도 두지 않아, 1층과 2층이(혹은 3층과 4층이) 연결되며 각각 1층과 2층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그저 층을 달리해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애초 ‘시간같은 공간’에 들어선 듯한 카메라는 전과 달리 줌도 패닝도 쓰지 않으며, 오직 그곳에 보이는 것들을 보이게 한다. 건물 안에 들어간 순간, 그러니까 병수, 정수, 그리고 김 사장과 함께 그곳에 진입한 순간, 그곳에서 벗어나는 건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선 건물 밖으로 나오는 1장의 두 번의 퇴장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 중에서도 술이 떨어져 정수가 편의점으로 향하는 두 번째 퇴장은 건물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매우 남다른데, 그렇게 영화가 전진하는 사이, 그곳엔 시간이 흐른걸까, 장소가 변한 것일까. 홍상수 감독 본인이 직접 작곡한 멜로디가 구슬프게 흐르는 가운데, 그 집은 얕은 언덕 위에 있었고, 정수는 왜인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김 선생의 작업실 지하와 1층 식당을 오갔던 1장에서의 짤막한 시간, 지상 가장 끝에서의 그 이야기를, 난 하늘 넘어 ‘탑’으로 향하는 길의, ‘인트로덕션’이라 불러보고 싶어졌다. 말하자면 진입을 위한 진입의 이야기. 정수의 퇴장 이후, 영화는 비로소 병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시작을 위한 시작,

안에서 밖으로 들어갈 때



영화는 평범하고 비범하다. 홍상수의 영화가 그렇지 않았던 적이 언제 한 번 없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의미에서 평범하지만 비범하다. 줌도 패닝도 쓰지 않는 그의 영화에서 화면을 직조하는 건 오직 건물의 구조와 카메라의 앵글 뿐인데, 홍상수는 그에 ‘시차’라는 공간 밖의 요소를 더해 비공간적이자 탈시간적 장면을 만들어버린다. 가령, ‘소설가의 영화' 초반 준희와 세원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장면의 변주와도 같이 느껴지는 병수 부녀와 김 사장의 이른 런치가 끝나고, 빌딩을 둘러보러 계단을 ‘오르는’ 대목에서, 나팔형 구조로 설계된 계단은 화면을 분할하며 연결하는 ‘동시 편집’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 사장을 뒤따르는 병수와 정수, 그리고 카메라가 자연스레 시차를 형성하며 한 프레임 안에 조금 전과 후, 그리고 '지금'이란 서로 다른 시제가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빌딩을 안내하는 김 선생의 별 거 아닌 보이스오버이거나, 아직 피사체를 따라잡지 못한 카메의 ‘잉여 시간’, 그렇게 발생한 ‘외화면의 나레이션’ 때문일 뿐이기도 하지만, 건물 구조상 진입하기 어려운 곳에서 카메라는 굳이 들어서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프레임 안과 밖의 공존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컷을 나누고 이어붙이며 영화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보다, 영화는 그곳에 머물며, 오히려 관객의 자리에서 ‘지금의 잔해’를 긁어모으고 있다. 예를 들어, 원테이블로 운영한다는 선희(송선미)의 식당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가장 먼저 2층에 도착한 카메라는 창 너머 식당 내부를 바라보며 ‘손님은 있는데 선희가 없네’라 말하는 김 선생과, 병수 그리고 정수를 바라보기만 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행동(컷을 쪼개거나 부감의 숏을 이용하거나)은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게 1층부터 4층까지 오르는 시퀀스에서 영화는 모두 4번(계단에서만)의 컷만을 허용하며 각 층의 시간을 빠짐없이 거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 1과 1/2층, 3층의 직전이거나 4층의 마지막, 혹은 옥상 너머로 이탈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 마저도. 



김 사장은 도중 ‘우린 다 터놓고 살아. 아무때나 막 들어가’라며 자랑하듯 이야기하는데, 이는 건물주의 집을 어필하기 위한, 사이 좋은 입주자들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문장이 별로 아니다. 오히려 단절되어 있지만 연결된, 단절된 것들의 연속성을 지칭하는 말에 가깝다. 나아가 그런 건물의 기이한 구조를 닮은, 컷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 영화에 대해 코멘터리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현재성의 실종이거나 돌아옴의 회복이거나. 지금 이 건물은 보이지 않게 치열하다.

그리고 이렇게 안과 밖을 교란하는 기이한 시제의 발견은, 세계의 안과 밖을 무화하고 오직 위로 향하는 walk up, 단 하나의 길 만을 남겨둔다. 정수에게 아빠 병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 이전 ‘겁이 많고 여자를 만나는’ 그런 ‘집 안’의 아빠이지만, 그가 부정하는 ‘집 밖’의 영화 감독 아빠란 영화란 프레임을 사이로 어김없이 ‘안’에 존재한다. 2층은 1층의 위이지만 3층의 아래인 것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그곳에 있고 또 없다. 그런데 이건 무한한 단절의 반복일까 지난한 연속의 분열일까. 영화를 영화이게 하는 프레임조차 쉬이 긍정하지 못하는 이 영화의 불안한 상승이 난, 점점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4개의 공간과 

다섯 개의 시간



김 사장 소유의 빌딩에서 시작 그곳을 떠날 줄 모르는 영화는, ‘해는 금새 저문다. 해가 지기 전 실컷 다니자’던 ‘소설가의 영화’ 속 다짐이 무색하게 가히 ‘원 로케이션’의 영화라 할 수 있다. '당신 얼굴 앞에서', '소설가의 영화'에 이어 다시 한 번 '돌아옴'의 자리에서 영화는 시작같지 않은 시작을 한다. 그리고 그 '돌아옴'은 이번 영화에서 특히 더 발생하는데, 떠남을 전제하는 돌아옴의 시제란 과연 얼마나 시작일까. 

영화 초반 병수의 김 선생과의 재회 속 돌아옴과 대화 중 전화를 받고 퇴장했다 2장이 되어서야 돌아온 오프닝의 돌아움, 그리고 술 사러 나갔던 정수의 왜인지 돌아올 것 같지 않던, 마지막까지 지연되었던 돌아옴과, 떠나지 않고도 수행된 마지막 4장 지영(조윤희)의 돌아옴. 영화는 외부가 아닌 내부, 건물의 밖이 아닌 안에 더 머물고,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외출 전이 아닌, 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건, 정수가 이야기했던 병수의 감독으로서의 밖이 아닌, 안에서의 아빠를 드러내는 상황과 일치하기도 한다.  

일견 집을 보러 온 세입자 시점의 단편같은 서막의 하루(1장)가 지나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병수의 ‘집 안’에서의 세월을 읽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1장에서 몇 차례나 건배를 주고받던 소위 ‘잘나가는 감독’의 인생의 표정은 사뭇 달라져있다. 김 선생 표현대로 ‘커다란 상’을 타기도 했던 1장의 병수는 준비중인 영화가 크랭크인 3주 전 투자가 취소되며 돌연 실직 상태이고, 그렇게 ‘밖이 실종’되었고, 실제로 그는 무언가의 투병중이라 이제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심지어 그를 대하는 김 선생과의 관계도 서먹하다. 아마도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을 텐데 그를 가늠하게 하는 건 오직 병수에게 일어난 일과 사건을 통해서 뿐이고, 즉 밖이 아닌 안. 그런데 그 세월이란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다만,  여기엔 좀 수상한 구석이 있다. 3층을 둘러보며 ‘이렇게 아담한 집이 좋아요’라 말했던 것 그대로 3장에서 병수는 바로 그 집에 거주중이다. 정수의 ‘여자를 만나요’란 말이 더 먼저 도착했는지 2장에서 만난 식당 주인 선희가 그와 함께 살고있다. 왜인지 1장에서 예기(언)된 말들과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다. 말하자면 약속 아닌 약속이 좀 이상하게 지켜진다. 그리고 이의 시작은 아마 ‘손님은 있는데 선희는 없던’ 2층 식당을 소개하며 김 선생이 내뱉었던 ‘우리 여기서 밥 한 번 꼭 먹어요’, 그리고 뒤이어진 ‘약속이에요’란 말이 남긴 이상한 예언조의 뉘앙스일텐데(1장 이후 2장에서 둘은 실제 밥을 먹고 술도 마셨으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프레임의 공간’을 적용해보면 먼저 도착한 시간과 뒤늦게 돌아온 이야기가 서로의 빈틈을 노출시킨다. '내부의 밖’이 아닌 ‘내부 안의 밖’을 드나드는 분절된 삶의 4층 건물. 그 건물은 어디에 있나.

영화엔 문을 열고 닫는 전자음이 이상하리 만치 공간을 침범하고 김 선생이라 불릴 뿐 별 다른 이름을 갖지않는 배우 이혜영은 건물의 주인인 만큼 ‘그 세계’의 처럼도 느껴진다. 오직 김 선생 만이 건물의 안을 정확히 네 번 오르고 내린다. 그렇게 안이 곧 밖이 되어 되돌아온, 어쩌면 ‘집의 형태’를 한 시간은 저주에 걸려버린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삶이 저주일까. ‘밤에도 아무때나 막 들어간다’ 호언장담하던 시간이 민망하게 잘 열리지 않았던 4층은 화장실이 막혀 독한 악취가 나고, 돈이 없어 월세를 내지 않는다고 김 선생의 핀잔을 받았던 3층 세입자의  빈곤은 그대로  병수와 선희의 것이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선후가 바뀐 일. 가난해 졌을 때야 비로소 3층의 세입자가 될 수 있다. 홍상수는 설마 시간(프레임)과 공간(이야기)의 퍼즐 놀이를 하고 있는걸까. 어떤 정해진 인생의 운명같은 걸 짜맞추는.

다만 그곳엔 2층 이후 3층, 3층 너머 4층의 시간이 흐르고,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혹은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고. 이 집은 정확히 이 문장을 구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프닝 타이틀 화면 가득 ‘ㅌㅏㅂ’이라 쓰던 ‘탑’은 그러고보니, 일견, ‘집’처럼도 보인다. 


혼자를 남기는,

이상한 외출



네 개의 층, 내 장의 챕터라 이야기했지만, 영화에서 이를 구분짓는 최소한의 장치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홍상수 감독 본인이 직접 만든 음악이 한 번의 등장과 퇴장 사이 삽입돼 흘러가기는 해도, 그건 오직 그 만이 영화에 사용된 유일한 음악이어서 이기도 하다. 오히려 여기에 장면의 전환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식당으로 쓰이는 1층과 2층은 내부와 외부가 혼재하는 장소, 주거 공간인 3층과 4층은 보다 더 내부, 돌아옴 이후 삶의 자리로 그려진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특히나 3장, 곧 3층에서 영화는 혼자인 병수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한다. ‘사람 가려가며 만나자’고 한 병수와 선희 사이의 ‘약속’이, 세월의 변덕인지, 선희의 변심인지 지켜지지 않으며, 선희가 외출을 하고 하나의 ‘실종’이 발생할 때, 상심한 병수 곁에 공간 또한 반응한다. 

선희의 왜인지 영원한 퇴장일 것 같은 외출 이후, 비어버린 자리에서 병수는 홀로 사과를 씹어먹으며 문자를 보내다. 영화는 이를 그의 보이스오버로 실시간 상연하는데, 문자가 도착하는 건 정작 떠난 선희가 아닌, 남겨진 선희의 두고간 핸드폰에서이다. 떠나지 않고 떠남을 알리는 짤막한 벨소리, 병수의 등 뒤로 울리는 주인 잃은 외마디 전자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마도 선희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병수는 깨져버린 약속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고, 선희와의 함께였던 3층 생활은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저문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2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사실 사람을 가려 만나는 건, 쥴(신선호)의 발화로 밝혀진 1장의 김 선생인데, 어느새 3장의 병수와 선희에게 전이되어 있던 ‘선택적 단절’의 삶. 그리고 다시 단절된 선희와 병수. 아니면 내부에 발생한 또 하나의 외부 세계. 카메라는 주저없이 옆방으로 이동하고, 병수는 아무런 말 없이 침대 위로 미끄러지듯 웅크린다. 



그런데 그 무렵, 영화엔 좀 수상한 바람이 분다. 4장의 병수 대사를 먼저 빌려오면 ‘교향곡 같은 바람’이 불고있다. 카메라가 사과를 먹으며 선희에게 문자를 보내는 그의 뒷모습을 비출 때, 불길한 소리로 되어 불어오던 바람은 이미 그곳엔 병수를 남기고 아무도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병수는 침대에 누워 생각을 했는지, 꿈을 꾸었는지 뒤늦게 돌아온 선희와의 대화를 상상하지만, 화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의 음성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 사과를 먹던 때의 나레이션이 병수란 육체성과 결합된 소리의 발화였다면, 이 두 번째의 나레이션은 육체성이 소거된, 그렇기에 실재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운드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뒤이어 병수는 침대에 웅크린 채 이렇게 말한다. ‘근데 난 혼자가 젤 편해’ 육성으로 내뱉은 이 말이 오히려 더 생경하게 들린다. 그곳엔 이미 안과 밖, 3층과 4층 너머 혹은 옥상. 그 사이의 전복이 이뤄진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곳이 아니었을까. 바깥 바람을 몰고온 선희의 떠나간 발자국 처럼. 너로 인해 보다 나에게 침전하는, 끝없는 이불 속의 웅크림과 같이. 

1층에서 어느덧 4층, 그건 보다 지상을 멀리하는 길이고, 4층 건물, 지상에서 ‘탑’에 가장 가까운 그곳에서 혼자가 되어버린 시간은, 만약에 그곳이 끝이라면, 어쩐지 영화에 홀로 남겨진 죽음 앞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알던 홍상수의 페르소나 권해효가, 그야말로 회귀하는 순간이다. 


상승의 영화

소용돌이 치는 시간



계단을 오르면 시야의 높이도 올라가는 것처럼, 영화는 층을 오를 수록 그곳(높이)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드러낸다. 또 한 번의 ‘떠남’이 발생한 뒤 혼자가 된 병수 곁에서 영화는 이제 물러갈까 싶었는데, 카메라는 이미 프레임을 벗어나 4층 위에 와있다. 3층의 심플한 흰색 침대가 아닌, 4층의 빈티지한 느낌으로 인테리어 된 방 구석에 둘러누운 병수로, 4장은 시작한다. 세 번의 전환, 모두 네 번의 진입을 지나며 유일하게 이미지에 의해 전환이 이뤄진 대목이고, 3장에 이어 혼자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좀 거칠게 말해보면 3장과 4장은 거의 혼자가 된, 안과 밖이 소멸된 병수의 고통의 수난기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더해진다. ‘병수 씨, 나 왔어요.’ 화면 밖에서 돌연 나타난 이 음성은 일단 누구의 것인지 불확실한데, 그보다 난 이 문장의 병수를 경수라 들은 것도 한다. 영화에서 병수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란 떠난 선희거나 지금 곧 등장할 지영 뿐이고, 그러고보니 그는 때로 병수로, 그리고 경수로 불렸던 것도 같다. 물론 이는 단순한 나의 오청 때문일 수 있지만, ‘강변 호텔’에서 한 자만 달리 쓰는 경수-병수 형제의 이름은 아빠 영환(기주봉)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던 서로 다른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도 그와 같은 뉘앙스는 없지않다. ‘강변 호텔’에서 권해효는 병수가 아닌 경수였다. 

결과적으로 병수를 깨운 건 핸드폰도 두고 간 선희도, 별거중인 제주도에서 생활하는 와이프도 아닌, 바로 근처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지영이다. 의심이거나 착각이거나 오해거나 추측이거나. 희미한 유사성 만을 매개한 도착하지 못한 이야기가, 묘한 자국 만을 남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프레임을 연결하는 인과의 연속성이 아닌, 어느새 지금이 되어있는 ‘현재성의 프레임’이다. 공간은 시간의 단절을 낳고, 시간은 공간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홍상수는 결코, 층과 층 사이의 이동을 허하지 않는다. '완성될 수 없는 의미'만이 그곳에 떠오른다. 



돈을 모아 제주도에 내려갈 계획을 세우던 3층의 선희와 병수. 보다 먼저 그곳에 살던 세입자가 이사를 떠난 제주도. 병수와 별거중인 아내가 살고있는 제주도와 병수와 지영이 고기를 구워먹으며 약속하는 내일의 터전 제주도. 어쩌면 이곳에 주어진 출구란 제주도가 유일할까. 하지만 그건 너무 먼 어제거나 내일, 프레임 너머에나 벌어지는 일들이고, 영화는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 1층의 가게 앞에서 비상한 퇴장을 한다. 영화에서 건물이 가장 기이하게 비춰진 건, 혹은 그렇게 보인 건 옥상에서 고기를 먹는 병수와 지영을 방훼하듯 닫힌 문을 두드리는 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대목이다. 4층으로 진입하는 문을 오른쪽에 두고 새하얀, 아마도 창이 있을 정면을 바라보는 시간은 묘하게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손잡이의 위치나 컷 밖으로 잘려나간 하단 부분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래도 공중에 떠있는 게 아닐까 싶어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곳은 1장에서 몇 번이나 문 열기에 실패했던, 네 번의 시도만에 간신히 열 수 있었던 바로 그 문의 재연이다. 그렇게 보다 ‘분절되어 있다. 

김 선생의 부름에 병수가 쫓아오기까지 한참을 바라보는 그 4층 그 어딘가에서의 외침은 그야말로 가장 불안한 긴장을 낳는다. 동시에 ‘소설가의 영화’의 엔딩,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김민희)가 마주친, 기다릴 거라는 약속이 모두 부정된 뒤 아무도 없던 복도 끝의 눈에 부셔 장소를 이탈한 것만 같던, 그 프레임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영화를 나와 현실의 영화 속으로 들어섰겄나 나왔던 바로 그 순간의 프레임이, 어쩌면 이곳에 재연된다. 그렇다면 그 ‘허공’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김 선생은, 대체 누구인가. 병수가 사는 집, 4층 옥상으로 향하는 문은 타인(여기선 김 선생)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난 어쩌면 이건 길수가 지나왔던 그 자리의 ‘너머’를 향하는 또 하나의 문은 아닐까 생각하고 말았다. 나갈 수 있는 문은 아마도 별로, 존재하지 않는. 



김 선생과의 불쾌한 대화가 끝이 난 뒤 병수는 돌아와 어느 날 옥상에서 마주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지영의 요청으로 이미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또 한다. 예수님이 나타나 “제주도에 내려가 열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라”고, 자신에게 고했다는 이야기. 그건 곧 2층 선희와의 대화에서 ‘종교는 사람이 불안해 만들어놓은 것’이라며 부정했던 에수님을 경험으로 반박하는 증언이고, 동시에 2층 아닌 4층이 그렇게 해놓은 일이기도 하다. 병수는 말한다. “자고 있었는데 수선한 기분이 들었어. 행사같은 거 하나 싶었는데 음악이, 뭔가 교향곡 같은 웅장한 음악이 들리더니 예수님이..있는거야.” 선희와 함께 먹고 마시던 와인과 샐러드가 아닌 고기에 소주를 마시며,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 이를 반박할 2층의 병수는 없고, 지영은 ‘너무 귀여워.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라며 그를 껴안는다. 손수 담가온 삼산에 새로 나온 7천원짜리 담배까지 공양하고, 이제 둘은 제주도로 내려가 12편의 영화를 만들면 될 일이다. 바깥만이 존재하는, 미약하게 내부와 연결되어 있는 옥상의 테라스에서, 다시 한 번 내일이 약속된다. 



하지만 줄곧 위로 오르기만 했던 영화에서 더이상 상승의 기회는 없고(그러니까 지켜질 약속의 자리가 없고), 오직 남은 건 프레임을 벗어나거나(그렇게 영화를 포기하거나) 하강하는 일 뿐이다. 영화는 이내 둘을 1층 지상으로 내려놓는다. 그들이 어떻게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왔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그곳엔 이미 또 한 번의 진입을 위한 시간이 도착해있다. 아니, 어쩌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1층은 시작이거나 마지막. 밖으로 나섰으니 이제 들어갈 차례. 병수가 피던 담배를 끄려던 차, 술을 사러 나갔던 1장의 정수가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직 1층이 그곳에 있다. 정말로 묘한 분절과 연속의 스파이럴. 영화는 지금 어디를 갔다 돌아온 걸까. 


아마, '그' 회전문 

이번엔 '영화의 발견'



인테리어 일을 하고 싶다던 정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잘 나가던 영화 감독 병수는 이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영화가 1층에서 시작 4층까지 오르는 사이, 그곳엔 세월의 흥망성쇠, 그 ‘쇠’의 계절이 흘렀다. 흐린 날 드라이브가 더 좋다며 밖으로 나선 병수와 지영은, 갑작스레 볼일이 생긴 지영이 퇴장하며 다시 병수를 혼자로 만들고, 처음으로 건물 밖에서 혼자가 된 병수는 1장 그의 딸 정수가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하나 꺼내어 핀다. 이후 익숙한 자동차가 화면을 가로질러 나타나 가게 앞에 서는데, 그건 몸이 아픈 손님의 편의를 위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주차해 놓았던 병수의 가장 아끼는 애차의 귀환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금 영화가 시작한 그 날의 조금 늦은 시간인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병수는 자신의 차에 타 시동을 켰다 끈 뒤 다시 내리고, 뒤이어 술을 사러 나갔던 정수가 돌아온다. 1장의 사라진 시간과 인물이 회귀하듯 그렇게 둘이 다시 모인다. 그런데 이건 정말 '다시'일까. 




하나의 떠남, 그리고 돌아옴이 지나가는 이 대목은 정말 좀 이상하다. 아마도 병수가 차에 탔다 내리는 그 지점이 4장에서 다시 1장으로 회귀하는 ‘회전문’러첨 느껴지지만, 전과 달리 프레임의 이동 없이 서로 다른 시공간이 마주하고 있다.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술을 들고 돌아온 정수는 아빠에게 ‘담배 좀 그만 펴’라 말하는데, 그건 3장 이후 몸이 아파진 그를 의식한 말일까. 근데, 오늘이 내일을 의식할 수 있나. 아니면 한 대를 피우고 정수의 등장 후 또 한대를 꺼내물던 그 시점이 순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정수는 ‘또 피는 거 아니냐’ 추궁하는데, 그건 곧 연속성을 담보한 말이니까. 

하지만 병수는 두 대 째일지 모를 그 담배를 꼭 펴야만 하고, 그곳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병수의 4층 너머 옥상을 체험했던 시간이 암시되어 있다. 이미 그곳에 교향곡같은 바람이 그칠 줄 모르고 분다. 누구의 시점인지 영화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옥상까지 바라보고, 그건 확실이 밖에서 밖을 응시한 프레임이다. 오직 오름으로서만 확인할 수 있는, 더이상 오를 곳이 없어 머무르게 되는 자리 탑. 영화는 일견 작은 미래를 집어삼킨 4층 건물의 미스테리처럼도 보이지만(그래서 '생활의 발견'의 회전문을 떠올리게 하지만), 보다 더 수상한 건 흥망성쇠, ‘그 후’ 다시 또 시작하고야 마는 지독히도 인생같은 현실의 프레임일 것이다. 단절도 단절의 연속성도 모두 다 거부하고 마는, 이상한 프레임의 '리와인드.' 지금은 어디이고 여기는 언제인가. 이 본질론적 철학의 고뇌는 사실, 회전문 사이를 오가는 세상의, 끊임없이 지연되는 물음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그 문은 아마도 여태 문단속을 하지 않는다. 


*텍스트 중 모든 대사는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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