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는 왜, 환영받지 못하는 감독이 되었나. 영화란 '말'에 대하여
또 하나 이상한 한국 영화가 도착했다. 아니, 그건 한국말을 하는 일본 영화인지 모른다. 혹은 그도 아닌 국적을 잃어버린, 어느 경계의 영화가 만들어져 버린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열 다섯 번째 작품 ‘브로커’가 공개되고, 일본 감독이 연출한 한국 영화라는 이 기묘한 형태의 작품을 마주하며, 난 이 생경함,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테러에 가까운 반응이 문득 영화가 야기하는 이해되지 못함에 대한 서사, 영화에 비친 현실의 장벽을 가리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야기하지만 이야기되지 않고, 소통은 실패하거나 오해되고, 또는 (말의) 차이가 차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벌어지는 이런저런 불필요함의 감정들. 어쩌면 영화 그 자체의.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영화가 지난해 개봉했던 이시이 유야의 또 하나의 '별작'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과 한쌍의 영화라 생각했는데, 이런 ‘실패’들이 왜인지 좀 싫지가 않다. 가령, 굳이 이야기해보면 일본 감독이 한국말을 쓰는 배우들과 만나 만들어낸 영화에서 우린 얼마만큼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매끈함의 ‘감정’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까. 혹은 영화는 얼마나 불완전함의 소통을 픽션으로 포장해야만 하나. 그도 아니면 자연스러움이란 애초 무얼 기반으로 정의되는가. 그러니까 이런 질문들이, 난 그보다 먼저 앞서는 식이다.
물론 그와 거의 동일한 예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도쿄에 건너가 연출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란 훌륭한 작품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외부인이 바라보는 도쿄란 전형적 이미지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도리어 키아로스타미는 그 전형적 틀을 통해서야 말할 수 있는 사랑이란 고전적 주제, 동양 최대 환락가라 불리는 신쥬쿠 카부키쵸와 가장 먼 곳에서의 사랑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너무나 다르기에 도리어 가능한 ‘화합’이란 이점도 작용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 ‘브로커’, 일본에서는 ‘베이비 브로커’는 이와 같은 소통상 이슈에 더해, 근래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고레에다의 영화들이라는 문제. 2018년 국내에서 ‘어느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개져 개봉한 원제 ‘좀도둑 가족’에 대한 반응들과도 일치하는 보다 (영화) 외적인 이유가 작동한다. 감히 말해보면 현실의 기울어진 젠더 감수성의 난점을 이 영화는 품고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혈연으로 이뤄지지 않은 가족 공동체에 대한 영화로부터의 물음. 아이러니하게 둘 다 ‘모성’에 대한 이의제기. 그러니까 당신은 고레에다의 반고레에다적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까라는, 영화를 경유한 자기 물음이 이곳에 도착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너의 옷(말)을 입고. 고레에다는 점점 더, 당신을 배반할지 모른다.
고레에다의 영화란 늘 온화한 일상에서 삶의 깊이를 드러내는 작풍이라 이야기된다. ‘걸어도 걸어도’가, ‘태풍이 지나가고’가,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분열된 가족에서 삶, 인생, 나아가 가족이란 타인을 가족 그 너머 '사람의 품'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오스 야스지로적이다. 하지만 '브로커'에서, 유기된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가족 아닌 가족을, 아이가 버려지고 매매되는 현장에서 시작된 관계를 우린 과연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평범(普通)이란 말로 지탱하는 가족에 왜인지 드리운 그림자의 어둠을, 고레에다가 던진 그 그늘진 이야기를 우린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레에다는 아마 그런 질문을 했다. 하지만 가족 아닌 가족은 질문이 되기도 전 언어의 장벽에 막혀 오해 이상의 잡음을 뱉어내고, 영화는 공감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현실 두터운 벽 너머 외로이 휘청이고 만다.
고레에다는 이번 영화에 대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어느 가족’와 함께 ‘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 ’3부작이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아빠에 대한 의심, 아빠가 되어가는 길목에 방황하던 남자에 그렇게나 공감하던 고레에다의 청중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역으로 모성이란 신화 아래 신음하는 엄마의 방황은 왜 조금도 용서받지 못하는 걸까. 이 영화는, 어쩌면 좀 억울하다.
‘좀도둑 가족’이 왜하필 ‘어느 가족’으로 둔갑했을 때, 난 설마 이유가 좀도둑에 대한 '대중적 도덕심'에 의한 것이 아니길 바랬다. 차라리 단지 당시 유행처럼 번져갔던 소소한 에세이 제목처럼 유유자적의 뉘앙스를 의도한 제목일 거라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17만이란 개봉 성적은 칸느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작품으로는 가히 외면에 가까웠고, 이번 영화 역시 그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개봉 초반 칸느 효과로 일찌감치 백만을 돌파한 ‘브로커’는 현재 몇 주째 125만에 정체중이다.
고레에다는 이번 영화에 대해 ‘결국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송강호의 인터뷰 중 문뜩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가 현실을 담아낼 때 가장 첫 번째 ‘할 일’은 그를 현실 아닌 현실, 픽션으로 데려오는 일이고, 두 번째 보다 중요한 건 그 픽션을 다시 현실로 데려다 놓기 위한 노력이다. 그렇게 ‘브로커’는, 갓 태어난 생명을 중심으로 우리의 ‘태어남’에 대해 사고한다. 하지만, 아마도 가부장제가, 어쩌면 모성 신화가 보다 중요한 이곳에 브로커는 그냥 브로커일 뿐이고, 아이를 버린 여자는 그저 엄마 자격도 없는 비정한 여자일 뿐이다. 버려진 아이가 아닌, 버린 엄마도 아닌 그저 ‘태어난 누군가’로서, 그들은 영화에도, 아니 현실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영화로서 불균질하다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혹평을 받는 이 영화는 왜 그런 이유로 영화가 되지 못할까. 현실을 이유로 영화를 평하면서, 영화를 왜 영화로서 보지 못할까. 영화가 영화이지 못하고, 말이 말로 전달되지 못하는 시절, 영화는 그냥 좀, 다시 한 번 억울할 뿐이다.
비가 내린다. 굵고 줄기찬 힘센 장대비이다. 거리는 불이 꺼진 밤이고 길을 걷는 여자는 우산이 없다. 여자를 쫓던 카메라는 돌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빨갛게 빛나는 십자가와 ‘부산 가족 사랑 교회’란 팻말이 비친다. 영화의 초반, 어둠이 짙은 이 새벽녘의 장면은 분명 우리가 익히 봐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것이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어둠, 빗물이 되어 흘렁이는 빛, 축축하게 젖은 거리와 사연이 숨어있을 것 같은 빗소리. 흡사 스릴러 영화의 질감을 떠올리게도 하는 비 오는 이와 같은 장면을, 난 그의 영화에서 본 기억이 없다. 물론 고레에다 영화에 비가 내렸던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보다 아늑한, 초연한, 태풍이 지나간 후거나 차분하게 가라앉는 비가 그친 아침, 한 뼘 너머 현실을 사색하는 이미 지나간 비였다.
하지만 아이를 버리려 교회로 향하는 여자의 발걸음에 따라붙는 이 거대한 비의 장면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하나의 생명이 곧 추락을 앞둔, 그렇게 절망의 인트로와 같은 인상을 품고 몰아친다.
고레에다는 이 장면을 찍은 촬영 감독 홍경표에 대해 ‘비 내리는 장면을 비롯 물을 정말 잘 포착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했는데, 그는 우리가 알고있듯 봉준호의 ‘기생충’을 촬영한, 절망에서 걸어나오던 새벽녘의 엔딩, 그 ‘홍수의 드라마’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말하자면 고레에다 영화에 기생충의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엔 밤을 붉히는 빨간 빛의 십자가가 보이고, 여자가 향하는 곳은 ‘가족 사랑 교회.’ 이 전형적 한국 누아르적 밤거리를 지나 고레에다의 영화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걸까. ‘브로커’는 그가 찍은 아마도 첫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영화는 설정부터 다분히 ‘반 고레에다的’이다. 아이를 버리려는 여자, 아이를 매개로 돈을 벌려는 남자, 그를 뒤쫓는 여자 경찰과 어쩌다 이들의 트럭에 올라 탄 언젠가 버려진 남자 아이. 생명권의 존중이냐, 유아 유기의 방조이냐, 여전히 논쟁이 뜨거운 화제를 영화가 풀어가는 건, 설마 낯선 이들과의 여정을 통해서이다. 남자 둘은 판매자와의 거래가 계속 어긋나, 여자 경찰은 이 둘을 쫓느라, 그에 더해 아이의 엄마는 맘이 바뀌어, 그러니까 위탁에 실패해, 좋은 부모를 찾아주자는 위태로운 결심에 이들의 이상하고 지난한 ‘동행’이 시작된다. 별 다른 예상을 했던 건 아니지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꽤나 예상 밖의 전개가 초반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버려진 아이의 그 후, 태어는 났지만 앞으로가 불확실한 아이의 미래에 돈이, (이후 밝혀지지만) 살인 사건이, 선의로 가장된 이기가 깊게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K-무비적이다.
하지만 보다 거슬러, 버렸던 아이를 다시 찾으러 교회로 향했던 소영(이지은)이 아이를 빼돌린 브로커 일당에 이끌려 그들의 아지트와 같은 세탁소에서 매매에 대해 상의를 하는 장면부터 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바로 전 대목 교회가 보호하는 아이들을 소영에게 보여주는 장면에서 고레에다는 자신의 속내를 살짝 내비친 적이 있다. ‘꼭 데리러 올게’라 쓰고 ‘꼭 데리러 오는 건 40명 중 한 명’이라고, 보호 시설 유니폼을 입은 동수(강동원)가 이야기하자 ‘왜 아빠는 다들 찾지 않지’라고’ 소영이 쏘아붙일 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상현(송강호) 집에 도착해 누워있는 아이에게 상현이 ‘이제 우리랑 행복하게 살자’라고 말할 때. 영화는 ‘유기의 방조냐, 생명권 존중이냐’와 같은 원론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의, 얘기되지 않은 각자의 사정으로 한 발짝 성큼 들어선다. 예상이 아닌 생각(思考)을 거스르는 전개에 위하감이 일지만, 내가 알던 고레에다 영화이다.
마음을 바꿔 매매에 동참하는 엄마의 이유 혹은 사정. 아이를 눈앞에 돈 이야기를 하며 ‘선의’를 말하는 브로커의 진심. 그를 뒤쫓는 형사 수진(배두나)의 ‘반듯이 현장범으로 잡아야 한다’는 이상한 집착과, 유독 소영을 포함 아이 버린 여자에게 날카로운 동수의 사연. 갓 태어난 아이 한 명을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각자의 마음, 생각, 감정은 어느 하나 다른 무엇으로도 재단 판단되지 않고, 부딪히고 충돌하며 무려 긴 여정을 함께한다. 일본에선 카피를 '생명을 둘러싸고 각자의 정의가 요동친다'고 뽑았던데, 어쩌면 그런 시점. 난 고레에다의 이 다소 위험한 ‘방관의 자세’가 위태로운면서도 영화가 찾은 최선 아닌 차선의 동행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모두가 옳고 모두가 틀리다는 건, 가장 게으른 다큐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판단하지 않음’은 소영과 그의 아들 우성(박지용)에서 시작되었을 비단 박스 하나 크기의 작은 이야기를, 그곳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해내고 만다. 비단 소영이, 동수가 우성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있어서가 아니라, ‘태어남’ 이후를 살아가는 그곳 모든 인물들이 품고있는 태초의 기억을 건드린다. 진부하지만, 쑥스럽지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 세상 모든 '태어난 이'들에게 다가서는 말. 그렇게 나를 가장 긍정하는 말. 하나의 생명이 포기되는 그곳에 필요한 건, 분명 버려진 희망을 다시 주워 담는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 지금 이 영화에 쏟아지는 일명 ‘소통에 실패한 말’들은 대략 두 개의 맥락으로 나뉜다. 하나는 아이를 버린 엄마, 그 아이를 매매하려는 일당을 가족이란 틀 안에서 바라보는 영화의 ‘선의’를 수용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 사회가 규정해온 도덕심과 충돌해 터져나오는 감정들. 즉, 지독히 현실적 이유에서의 반대. 그리고 또 하나는 많은 리뷰가 이야기하듯 어색함. 어김없이 드러난 소통의 불완전함이거나 대화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감정과 말 사이의 충돌, 말하자면 자연스럽지 못해 불편한, 그러니까 전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매개로서 영화적 실패이다. 첫 번째 이유야 (영화) 보다 현실에서의 사정이니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그렇게 난 또 낙담을 하고 말았지만), 감정이, 대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반응. 여기서의 그 ‘자연스러움’은 얼마나 영화적이고 또 현실적일까.
다시 말해 일본어를 쓰는 사람과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 한국어를 쓰는 배우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감독 사이 ‘자연스러움’은 어떻게 생겨나고 또 생겨나지 못할까. 아니 당초 영화에서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어쩌면 난, 이건 가장 ‘영화의 순간’,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투영해내지 못하는 영화란 매체의 ‘실험적 사건’, 그런 찬스이거나 만남이 아닐까 생각하고 말았다. 이번 영화에서 고레에다는 자신과 조감독, 그리고 감독 조수와 통역을 도와주는 스태프 1인을 제외하면 온통 한국말을 쓰는 스태프와 촬영 내내 함께, 그리고 혼자였다. 온통 한국어가 가득한 현장에서 그는 홀로 한국어가 아닌 말들로 영화를 지휘하며 전에 없는 의사 전달의 ‘장치’, 하나를 더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편지를 써 배우에게 전달했다고 하는데, 그 역시 한국말이 아닌 일본어와 약간의 그림이 더해진 편지이다. 그러니까 애초 이건, 최선의 소통을 전제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고레에다는 영화의 시작에 대해 ‘송강호가 아기 귀저기를 가는 모습이 보고싶어 영화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배우 배두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동수 역의 강동원, 상현 역의 송강호가 마음 속에서 확정됐다. 고레에다 왈, ‘배두나 씨에게 스크립트를 보여주니 바로 이건 송강호, 이건 강동원이라 해서 옆에 이름을 적어놨어요.’ 굳이 강조해 보면 이 영화의 시작은, 이야기의 요지와 형식이 갖춰진 말에 의한 발신과 수신의 결과가 아니었던 셈이다.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일에, 과연 정답이 존재할까. 완벽한 소통의 성공이란 영화이든 현실이든 가능할까. 혹은 그건 어떤 과정을 경유해 만들어지는 걸까. 영화는 늘 불완전함 위에 픽션을 감추며 아슬아슬 지탱하고, 가끔은 현실과 교차하며 픽션 아닌 ‘유사 현실’의 이야기를 이곳에 던지고 갈 뿐이다.
그렇게 이곳에 도착한 ‘유사 가족’의 이야기, ‘브로커’ 혹은 ‘베이비 브로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어긋남, 혹은 부자연스러운 간극 사이 드러나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떄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 속에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고, 어떤 영화는 불완전한 우리 현실의 실패하는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다.
‘언어를 알지 못해도 계속 보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있어요.” 고레에다는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곳엔 진부하지만 말이 아닌 마음, 그런 소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 말로 하면 당연,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불행 아니면 다행. 하지만 그래서 영화는 보다,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연출가로서 알지 못하는 언어의 연기를 본다는 건, ‘연출이 가능해?’ 아마 모두 생각할 거에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있어요. 그건, 자막이 없는 외국어 영화를 볼 때 역으로 연기의 좋고 나쁨은 보다 스트레이트하게 알 수 있거든요. 자막을 쫓지 않는 만큼, 전부 자신의 집중력을 다른 것에 쓸 수 있으니까. 편집의 리듬같이, 의외로 알게돼요. 언어의 의미를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생략) 그리고 연기를 볼 때의 기준이란, 반드시 언어의 의미 만이 아니고, 그 외의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이번 기회에 충분히 단련이 되었다고도 느껴요. 이전같았으면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들이 제대로 보이게 되었다는 감각은, 확실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성장할 수 있다고 느낀 점이기도 해요.”
물론 어색함이란, 영화의 만듧새를 의심하게 하는 요소다. 감정의 자연스럽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극에 이입하기 힘든 치명적 미스로 작용한다. 실제로 난 ‘브로커’를 보며 적지 않은 순간 민망함을 동반한 어색함을 마주하고 말았는데, 가령 첫 번째 아이 매매에 실패한 동수와 상현이 동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그 방문에 환호하는 아이들의 함성과 천진난만의 하루를 보여주는 다소 구태의연의 장면이 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이의 방기와 매매라는 첨예한 이슈를 품고 있으면서 돌연 버림받은 아이들의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일상에 진입해버린 이 이상한 정차는, 한켠 흔하고 흔한 한국 드라마의 전형이면서도, 잘못 도착한, 혹은 우리가 보지 못한, 기대하지 않았던 ‘(잘못) 태어남’ 이후, 머나먼 시공간 속에 미끄러진 불시착의 환영처럼 보인다. ‘베이비 박스’는 한국에 셋, 일본엔 단 하나가 있다고 하지만, 그 안을 혹은 밖을 결코 내다 보았던 적이 없는 이곳에 영화는, 동수와 상현, 그리고 소영의 보육원 방문은 돌연 박스를 열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오늘을 날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적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영화의 현실이, 그곳에 어색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아이들은 ‘버려진’이란 딱지를 달고 살지만 전혀 그래 보이지 않고, 해진(임승수)은 입양을 보내달라며 나름의 작은 작전을 벌이고, 매매에 실패한 상현과 동수는 그저 다른 구매자를 찾느라 바쁘기만 하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상관없이 모두에겐 그저 각자의 사정, 나름의 오늘이 흐르고 있을 뿐인 이야기.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고작 2, 30분. 아이를 버리려던 엄마의 절망도, 버려진 아이를 빼돌리던 브로커 일당의 아슬아슬함도 어느새 사라진 뒤, ‘버려짐 그 후’를 살아가는 이야기 만이 가득한 이 대목은,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베이비 박스’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가치관은 그렇게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른다. 물론 가족에 대한 고레에다의 시선(서사)을 떠올리면 별 문제가 없을 전개일 수도 있지만, 지극히 한국적 문법으로 흘러오다 도착한 그곳에서 그 마음, 감정, 생각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 대사의 울림 또한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고레에다의 영화를 ‘드러남’의 서사라고 한다면, 여기선 계속 또 하나의 ‘벌어짐’이 더해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어색함이란 잉여 감정이, 여지없이 생겨버린다.
대표적으로 비가 내리다 그친 이른 아침. 다소 말다툼이 있었던 소영과 동수가 창 밖을 내다보며 나누는 대화에서, 자연스레 오프닝 아이를 버리던 밤의 폭우를 떠올리게 하는 그 대목에서, 소영은 오래 전 친구의 우산을 훔쳐서 버린 일화를 이야기한다. 동수는 ‘그럼 우산이 필요하겠네’라고 말한다. 왜인지 뜬금이 없다. 비오는 날, 우산 없이 걸었던 오프닝의 밤, 그리고 친구처럼 예쁜 우산이 없었던 어린 시절. 어색할 이유가 전혀 없을 설정의 대화인데 이상하게도 뜬금없다. 아마도 오프닝 이후 벌어진 적지 않은 사건으로 소영의 과거를 붙들고 있던 감정선은 희미해졌고, 동수의 과거가 드러나는 공간에서 그 이야기는 고작 영화 초반 폭우 장면에만 기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어지는 리버스 숏, 창밖의 운동장을 뛰노는 아이들의 빨간 우산, 찌그러진 우산... '비도 내리는 인생, 최소한의 보호망'을 은유하는 듯한 그 전경의 숏이 없었다면, 난 이 영화를 단지 그 우산 하나 만으로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말, 만약 이것이 일본어였다면. 동수의 ‘우산이 필요하겠네’가 일본어로 발화되었다면. 한국말에 비해 보다 유연하고 열린 구조를 가진 일본어에서 우산은 ‘카사(傘)’라 쓰고, 그 장면에서 이 단어는 자연스레 '손을 건네다, 힘을 빌려준다'란 의미의 ‘카스(貸す)’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건 고레에다의 많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말의 숨어있던 기적같은, 혹은 영화적 순간이다. 고레에다는 아마 이런 말의 유희를 의도했겠지만, 한국어로 옮겨진 ‘우산’에서 살며시 타인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뉘앙스의 온기를 떠올린다 는 건, 너무나 머나 먼 여정일 뿐이다. 아마도 동수의 과거. 어쩌면 소영의 미래. 그리고 메타포란 영화가 가지는 가장 우연한 우연. 그곳에 우산이 가지는 의미란 차이의 문턱을 넘지 못해 실패하지만, 이럴 때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때로 영화의 진심이란, 말함이 아닌 바라봄이라는 2인칭의 언어, '보여짐'으로 간신히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러한 ‘말에 의한 구원’은 그의 전작, 깐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에도 있다. 아마도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하즈에(키키 키린)와 알고보면 남남인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주고받는 말중에서 상처를 연으로 돌려놓는, 오직 말로서 구현되는 묘하고 마법같던 순간.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연이 된다.’ 영화의 카피로까지 쓰인 ‘이들이 훔친 건 인연(絆)이었다’라는 대목. 영화는 학대를 받던 소녀를 우연히 주워 데려온 가족 아닌 가족들의 이야기이고, 고레에다는 가족 넘어 연으로 이어지는 사람 너머의 관계를 들여다본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어로 상처는 키즈(傷), 그리고 연은 키즈나(絆). 그저 말장난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 한자의 차이로 상처가 인연이 되어가는 순간이 고작 글자 안에 담겨있다. 도무지 이해받을 수 없는, 용서되지 못할 관계의 하즈에와 노부요, 그리고 이들의 연으로 이어진 가족을 말에 잠자고 있는 의미의 확장으로 구원해내는 순간이다. 난 이를 일상에 잠자는 말의 구원이라 말해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는 일본 영화에서, 특히 고레에다 작품에서 자주 보인다. 특히나 대부분의 경우 그 말의 활용이란 이야기의 핵심을 응축하는 요소 그 이상이기도 하다. 한자와 히라가나를 병용하는 언어 문화권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렇기에 더욱더 이야기가 하지 못하는 감정의 서사를 지탱한다. 하지만 ‘브로커’에서 이러한 말들은 대부분 실패한다. 서울로 향하는 KTX에서, 나란히 앉은 동수와 소영은 아이 우성의 이름에서 시작, 자신들의 이름에 담긴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한자를 병용하는 일본 사람의 이름이야 그 의미를 유추하기 까지 시간이 (거의) 소요되지 않지만, 한자의 사용이 화석화된 한국말의 이름은 그 의미를 꺼내기까지의 시간이, 과정이 극히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가령, 우성이란 이름에서 동수라는 글자에서 우주(宇)와 바다(海)와 별(星)과 물(水)을 떠올려 의미를 떠올리기까지, 우린 그 대화가 너무나 생소할 뿐이다. 말들이 의도했던 감정에 빠져든다는 건, 더욱 무리한 일이다.
특히나 고레에다 영화에서 이 말들(에 담긴 보이지 않던 의미)이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정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걸 감안하면, 이 영화에서 그 기차의 엔진은 추동력을 잃고 하나쯤 비어있는 상태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걸 보고 있는 우린, 그저 어색하기만 하다. 영화의 후반, 호텔에서 불을 끄고 소영이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똑같이 네 번을 반복하는 장면에서, 우린 왜 감동이 아닌 미안한 오글거림을 느꼈을까. 말이란 감정을 실어나르는 매개. 자주 하지 않게되는 말이란, 곧 침묵 속에서 더욱 전달되는 말들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의 이 울퉁불퉁한 실패의 이야기는 ‘실패한 소통’ 그 자체로 어쩌면 완전하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K-드라마적 외피에 고레에다의 섬세함이 그래도 간신히 살아난 결과처럼 느껴지지만, ‘베이비 박스’라는 사회 가장 변두리에 방치된 아이와 그에 얽힌 우리의 이야기를 과연 어떤 '소통'을 통해 전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가치, 입장, 현실, 그리고 사상이 작용하는 이 난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그리고 자연스러운 ‘드라마’ 안에 녹여낼 수 있을까. 오히려 불완전함, 이해할 수 없음, 그리고 전하지 못함의 실패 만이 그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현실의 창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가장 영화적, 아니 현실적이지 않을까.
영화는 아이를 버린 소영과 그를 매매에 이용하려는 동수와 상현이 주축으로 움직이는 듯 싶지만, 어느 순간 수진과 그의 후배 이형사, 그리고 남친 선호. 그를 넘어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를 지칭하듯 느껴지고, 각자의 편견에서, 주관에서, 가치관과 선입견을 싣고 달리는 오래된 트럭의 묘한 로드 무비의 이야기는, 그곳에 단 하나의 물음 만을 남긴다. ‘테아나기는 했으나.’ 일본에서 영화의 카피로 뽑은 문장처럼 ‘작은 생명을 둘러싸고 각자의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태어남’이라는 질문.
고레에다가 또 한 번 ‘가족’을 이야기하며 도착한, 그 시작도 하지 못한 계절은 외면하고 살아온 우리의 시간을 상기하고, 그곳에 타인이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그와 그들은 ‘내가 용서해줄게’라 말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난 이 순간을, 작은 상자 하나에서 발견한 가히, 실패한 기적이라 말해보고 싶다. 고레에다의 가족은 그렇게 늘 그렇듯, 상처가 연이 되어 돌아오는 윤회의 계절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