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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n 21. 2022

그곳에,
영화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가장 낯설고 위험한 '오늘'의 도착, '소설가의 영화





‘always the same, always different.(Jonathan Romney, Screen daily, 2022.02.16)’ 

홍상수의 28번째 영화 ‘소설가의 영화’에 대한 리뷰를 훑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홍상수 영화는 언젠가부터 자기 반복에 다름없다는 오명(독)이 따라붙기 시작했는데, 이 문장엔 그를 고쳐주는, 말하자면 바로잡는 이상한 관용의 교정이 작용한다. 나아가 너무나 당연한 말. 매번 ‘오늘’의 시제로 흘러가는 현실을 철학하는 다소 상투적 문장이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와 홍상수의 이번 영화에 이상하게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런 의미와 글자와 형식과 리듬의. 같고 다름을 드러내는 평범한 단어들의 대조와 조화. 그리고 다시 한번, 홍상수의 이번 영화를 닮아있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고 이야기되는 홍상수 영화에서 다시 한번 이혜영과 함께한 ‘소설가의 영화’는 고작 하루와 짧은 나절을 그라고, 굳이 이야기하면 그건 곧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하루란 이야기다. 별거 아닌 오늘의 일과가 오직 그곳의 시간으로 그곳에 그려진다. 이런 걸 우린 ‘최소의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과거의 플래쉬백일 수밖에 없는 영화란 시제도, 시간과 유영하는 현실의 시간도 아닌, 같고 다름으로 존재하는 어떤 초월의 시공간을, 이 영화는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준희의 하루만을 담고있는 건, 그렇게 어쩔 수 없다. 영화의 초반 대화 장면, 창가에 마리아 샘플의 코미디 소설 ‘Today will be different’ 타이틀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처럼, 영화도 현실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순간’의 영화. ‘날이 좋을 때 우린 실컷 다녀야 하고’, 이번 영화의 타이틀은 ‘소설가의 영화’이다. 


구도를 지우고 태어난 최소한의 영화



영화는 하나의 진입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좀 익숙한 진입이다. 소설가 준희(이혜영)는 외곽 마을의 작은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을 둘러본다.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안에선 알 수 없는 고함이 들려오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준희는 이내 밖으로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세원(서영화)이 운영하는, 한 때 준희와 절친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후배의 책방이란 걸 알게되는데, 준희는 아마도 세원에게 혼이 났던 현우(박소미)를 보고 ‘누구 닮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홍상수 영화의 별거 없이 대수롭지 않은 풍경. 

하지만 그곳엔, 흑백 영화로 희석된 다소 알 수 없는 시공간엔(혹은 그걸 바라보는 관객에겐) 배우 이혜영과 서영화가 스쳐갔던 영화의 기억이 흐르고, 그렇게 어쩌면 그곳은 지난 영화의 어딘가인지 모른다. 준희와 세원은 이미 한 차례 상옥과 지나가는 행인으로 마주친 적이 있고(‘당신 얼굴 앞에서’), 후에 알게되는 길수(김민희)의 조카 경우(하성국)는 술에 깊게 취한 비오는 저녁, 조감독으로 술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같은 영화). 그에 더해 경우 아닌 하성국은 ‘인트로덕션’에서 친구 영호(신석호)의 여자 친구로 현우 아닌 박미소와 아는 사이인데, 물론 영화란 픽션을 모두 무시한 채 읊어본 어디에도 없을 문장이지만, 서영화의 몸과 언어로, 배우 이혜영의 표정과 억양으로 ‘오랜만’이라고, ‘닮았다’고 이야기할 때, 그곳에 상기되는 지난 영화의 흔적을 난 이제 더이상 모른 척하지 못할 것 같다. 픽션을 최대한 배제하고 흘러가는 흑백 영화 속, 그렇게 태어나는, 나아가 확보되는 ‘생활감’을 난 이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았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가장 위험한 발상에 불과할지라도, 배우의 시간이 기억하는 오늘의 재연이 그곳에 존재한다. 그렇게 새로운 진입이 아닌 다시 한번의 진입. 이걸 우린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연히도 그들은 모두 오늘 그곳에 모였고, 그건 현실도 영화도 아닌 그저 우연. 영화란 프레임을 넘어 현실을 유영하던 홍상수의 영화가 도착한 건, 가장 영화도 가장 현실도 아닌, 아마도 가장 마법과 같은 영화였다. 홍상수의 28번째 영화가, 그렇게 그곳에 있다.


영화 밖에서의 시작, 다시 한번의 진입


‘시공간을 극한의 한계로 밀어붙임으로써 시간은 공간이 되고 공간은 세계가 된다. (베를린 영화제 시상평)’ 

솔직히 영화를 말할 때의 그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이야기하면, 난 이 영화의 초반 이혜영이 문득 나타나 서점에 들어갔다 금세 나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일련의 흐름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흑백 화면에 계절도 지역성도 시간도 지워진 장면에 불현듯 등장한 이름 모를 여자 혹은 남자는 준희란 이름도, 소설가란 직업도 부여 받기 전, 그곳에 도착한 낯선 이방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두 번째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기이함은 다소 휘발됐지만, 이혜영 배우와 두 번째 작업하는 홍상수의 이번 영화에서 그 낯선 이질감이란 영화의 시작을 넘어, 어떤 차원의 문을 열어젖히는 이상한 시간의 감각과도 같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가 떠올랐다면 너무 과장일까. 어쩌면 이곳의 사람이 아닐 것 같은. 이곳의 시간이 아닐 듯한. 그렇게 낯설고 생소한 어느 ‘시간’의 도착.



준희와 세원, 그리고 현우는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서점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데 세원은 글쓰기를 그만 둔 상태이고, 준희 역시 요즘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 이후 만나게 되는 길수(김민희) 또한 연기를 쉬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모두가 말하기를 포기한 시간. 그곳엔 만나지 못했던 오랜 공백 이후 ‘오늘’만이 있고, 수화를 공부중이라는 현우의 말에 준희는 불현듯 하나의 문장을 꺼내 놓는다. ‘지금은 날이 맑지만, 날은 금세 진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니자.’ 그리고 준희의 요청에 의해 반복되는 ‘금세’라는 손의 언어. 극도로 제한된 영화 속에 지난 과거의 말들은 오해되거나 잊혀질 따름이고, 소리 없는 말들은 글쓰기를 멈춘 그곳에 하나의 다짐이 되었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희미해져 오늘만이 흘러가는 세계. 금세 저물고 마는 불길함의 순간. 당신 얼굴 앞에 숨어있던 그 ‘자리’는 시간으로 환산하면 겨우 ‘오늘’인걸까. 내가 느낀 낯선 생소함이란, 어쩌면 홍상수가 찾아낸 ‘오늘’인 걸까.



홍상수 영화에서 줄거리를 읊는다는 건 다분히 무의미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철 지난 동어의 반복일 수 있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오랜만에 세원을 방문한 준희의 하루치 여정을, 최대한 남김 없는 걸음으로 좇는다. 책방 안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이 체험한 소리를 지워낸 수화의 말들이 ‘오늘이란 공간’ 안에 행위로 그려진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니자’라고, 소리 없이 말했던 그 문장이 그대로 행동으로 실천되는 꼴이다. 현우의 손의 번역과 그를 따라하는 준희의 새로 습득하는 언어와 다소 어색하게 그를 흉내 내고 또 내지 않는 세원의 부끄러운 동의와. 모든 말들을 밀어내고 그곳에 도착한 이 수화 시퀀스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일종의 합의를 끌어내는데, 쓰기를 멈춘 준희의,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정적’이 그곳에 살며시 찾아왔다. 무언의 합의가 마법같이 지나간 후, 준희의 이상하게 우연이 거듭되는 하루는 시작되고, 그녀는 왜 인지 참 바빠 보인다. 

유명하다는 전망대 빌딩에 도착해 헤어지려는 찰나, 세원과 현우는 두 차례나 준희를 불러 세우지만 ‘지금 날은 맑지만, 날은 금세 저문다.’ 단호하게 ‘이제 됐지’라 말하던 준희의 두 손은 ‘금세’’라 말하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해가 저물 것처럼.


홍상수라는 우연, 지근거리에서 영화는



영화를 처음 보고, 아마도 글을 쓰게 된다면 그건 분명 가장 가벼운 홍상수의 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다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홍상수가 오랜 시간 죽음과 삶, 현실과 꿈, 나아가 형식의 안팎을 넘나들며 도착한 ‘소설가의 영화’는 그야말로 가벼워, 얄팍한 종이 한 장 만을 남겨두고 지워버린 장대한 소설집의, 형태를 간직한 후일담이거나 시작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정확히 ‘풀잎들’부터, 불특정한 랜덤의 일상 한 뼘을 가져와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한 홍상수의 영화는 나츠메 소세키의 ‘산책들’처럼, 혹은 물기를 거둬낸 다자이 오사무의 에세이와 같이, 어느덧 지근거리에 안착해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듯한 편안함을 환기한다. 현실 속 풀잎같은 아름다움을 믿(으려 노력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서 그렇게나 불길했던 봉완(권해요)의 다짐은 ‘인트로덕션’에서 정확히 세 번 반복되며 ‘다음’을 안도하게 한다. 

특히나 홍상수, 그 자신을 대변하는 듯한 관찰자로서의 김민희가 다소 물러난 뒤에는, 보다 현실 가까이 다가와 영화 넘어 보편으로서의 일상이 퍼져나오는 듯도 느껴진다. 특히나 ‘도망친 여자.’ 강 너머 산이나 서울의 남산 타워, 칸느 해변의 수많은 나무를 응시하던 카메라는 위치를 바꿔 그를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소설가의 영화’에서도 세원과 준희가 ‘진짜 크다’며, ‘로보트 무엇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그 무엇, 아마도 빌딩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 후(문자 그대로)’의 홍상수 영화는, 막연한 바라봄에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다가감(줌업)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 때 영화를 함께 할 뻔했던(그렇게 ‘당신 얼굴 앞에서’를 연상케 하는) 효진(권해요) 부부와 대화를 하던, 약간의 언쟁까지 일었던 카페 창가에서 준희는 조금 전의 전망대 렌즈가 아닌 효진의 렌즈를 통해 밖을 관찰한다. 비싼 거라는 효진의 말과 달리 거칠게 보이는 창 밖 화면은 점점 거리를 좁히더니, 이내 그들은 그곳을 산책하러 떠난다. 창 밖 풍경 속에 들어가버린다. 프레임의 유무로 영화를 규정한다면, 영화 넘어로의 진입. 혹은 이탈. 그 과격한 줌업은 이전 홍상수의 카메라를 도발하는 듯도 느껴지고, 어느덧 화면 속 초점은 가죽 점퍼 차림의 남자 혹은 여자에 맞춰져 있다. 그 사람이 길수, 김민희라는 건 이후 알게 되지만, 비싸다는 렌즈를 거치고도 그 알아차림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이혜영을 이혜영으로 알아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의 안과 밖, 영화와 현실, 그곳엔 엄연히 ‘시차’가 존재한다. 마치 영화의 운명을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화면 너머 길수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그녀 역시 왜 인지 바빠 보였다.



세원, 현우와 헤어진 준희는 전망대에 오른다. 망원경 렌즈로 창밖을 보고 있던 중 양주(조윤희)가 자신을 효진의 아내라 소개하며 다가오고, 이내 구석에 숨었다던 효진이 화장실에 갔었다는 알 수 없는 거짓말과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이들은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는데, 이 모든 게 약속 하나 없이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니까 우연히. 준희가 산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셋은 금세 창 너머 공원에 도착했고, 조금 전 길수를 향해 돌진하던 카메라는 어느새 공원에 도착한 준희 일행 곁에 있다. 마치 의식의 흐름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준희의 하루는 서슴없이 회상과 비약을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을 결정하는 건, 지극히 우발적인, 그리고 즉흥적인, 그러니까 ‘우연.’ 이 외에 또 무엇일 수 있을까. 

우연히 효진이 알아본 길수가 더해져 이어지는 준희와 효진, 그리고 양주 사이의 말들은 이전 두 번의 대화, 세원의 책방과 전망대 카페에서의 말들과 묘하게 얽히고 부딪히고, 보다 격한 언쟁으로까지 번진 세 번째 대화에서 준희와 길수, 오직 둘 만이 새롭다.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고 깊이 좋아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다. 그에 반해 연기를 쉬고 있는 길수에게 효진이 던진 ‘아깝다’는 말은 어김없이 과거와 오지 않은 내일에 기운 말이고, 돌이켜보면 양주와 효진이 준희에게 건냈던 ‘카리스마 있으세요’란 말 역시 현재성을 부여받지 못한 다소 화석화된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준희와 길수 만이 처음 만난 사이, '새롭다.' 권해효와 김민희와 이혜영이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쩌면 홍상수의 시간성? 여기엔 왜 인지 오늘에 집중하려 하는 보이지 않는 애씀이 있다. 



효진과 양주가 떠나고 길수의 조카 경수가 더해진 자리에서 준희는 처음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맘을 고백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어느덧 중반,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소설가의 영화’란 타이틀이 의미, 어쩌면 힌트를 다소 허무하게 부여받는다. 공원에 풍기는 음식 냄새에 허기를 느끼고, 라면 먹는 사람을 보고 라면이 먹고 싶어지고 분식집에 앉아 정확히 라면과 비빔밥을 나눠 먹는 시간, 아니 그런 우연.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늘 지나치고 있던 것들을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 바라보고 있다. 영화는 리얼 타임의 현실을 정작 포착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곳에 ‘오늘’은 존재할까. 진짜 같은 것들만 남은 별거 아닌 오후가, 해가 지기 전 그 짤막한 오늘이 조금 전 그곳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고, 난 시간이 흘러 그저 회고한다.



영화를 찍고 있는 현실의 영화를 관람하다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준희의 하루가 마무리되는 건 영화가 시작했던 바로 세원의 책방이다. 이 또한 우연이라면 상당한 확률의 우연인데, 준희의 오랜 후배 세원은 길수와 동네 언니-동생 사이고, 책방에선 왜 인지 오늘 준희와 한 때의 술친구, 절친했던 만수(기주봉)의 작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사람이란 우연을 우연으로 드러내는 시간의 기억인 걸까. 홍상수 영화에서 사람은 왜 인지 점점 더 자연과 같고, 시간은 점점 더 공간이 되어간다.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한다는 길수의 (홍상수 영화에서의) 변화를 암시하는 오늘 막바지에서야 꺼내 놓은 막걸리와, 전자 담배로 바꿔 피우는 준희와 세원의 술자리를 벗어난 이후 술에 젖은 대화들. 이전의 홍상수 영화를 움직여 왔던 게 술자리, 곧 소주와 담배였다면, 준희가 다시 찾은 그곳에서 오늘은 술잔들을 걷어내고 라면과 비빔밥으로 제대로 식사를 하는, 날이 금세 저물기 전 맑은 시간을 살아가는 다소 어색하지만 건강함이다. 

라면과 비빔밥을 먹고 있던 늦은 점심 아니면 이른 저녁. 창가에서 멀뚱히 서 안을 바라보던, 다분히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창을 닦던 검정 코스튬의 남자를 연상케 하는 여자 아이의 정체는 결국 설명되지 않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더이상 오지 않은 시간 속에, 가려진 삶의 비밀 뒤로 숨으려, 피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동시에 준희)의 렌즈는 이미 맑게 개었는지 모른다. ‘역사는 반복된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희극’이라는, 헤겔의 오랜 명제처럼, 현실의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서의 삶이 아닌, 일상 깊숙이 감지할 수 있는, 감각하고 느끼는 자리로 그의 영화가 돌아온 건, 이런 착시의 깨어남, 반복이란 오랜 질서가 만들어낸 삶의 상징은 아닐까. 그저 오늘을 오늘로서 살아내는 일. 그의 영화가 이렇게나 투명해진 건, 현실보다 현실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분명 지독히도 영화적인 마법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한다. 어떤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는 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다.” 길수와의 산책길, 영화를 공부중인 경우와의 대화, 그 날의 마무리가 되는 술자리에서 시간을 달리해 준희가 뱉어낸 말들을 수습해 정리해보면, 아마 이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말들이란 즉흥적으로, 또는 술 기운에 격한 감정이 덧칠돼 떠오른 것들 인지라 하나의 문장으로 조립해본다는 건, 애당초 본질에서 벗어나는, 우발적 요소들이 삭제된, 막걸리 보다 커피 같은, 회고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재연 불가능의, 불완전한 기록의, 나아가 지독히 닿기 어렵고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겨우 찰나에나 가까울 순간이, 이 영화엔 숨쉬고 있다.

준희에게 영화란 ‘그 안에 발생되는 어떤 것에 스스로 반응’하고 깊이 느낄 수 있는 배우들 사이에 ‘진짜 발생할 것 같은 감정’에 다름 아니고, 그를 위해선 특정한 장소,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한 때 친했던, 혹은 서로를 좋아하는 준희와 세원과 길수는 함께일 필요가 있고, 어제가 아닌 오늘이 도착한 세원의 책방에 그들 모두가 모이는 우연이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의 발생하는 어떤 진짜 같은 감정을 포착함에 소설가의 영화가 자리한다. 어쩌면 홍상수는 영화를 만들어가는(혹은 발견해가는) 영화를 찍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 관찰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메타 이야기’나 ‘메타 영화’가 아닌, 이제와 다시 영화를 묻는 ‘자기 검증’의 영화. 그건 때로 실패이기도 성공일수도 있지만, 만수의 술김에 떠올랐던 이야기가 금세 잊혀진 것과 같이, 분명 ‘오늘’에 보다 가까운 실패이거나 성공일 것이다. 날이 좋았던 하루가 어느새 저물어가는 시간, 길수는 아직 잠에 들어있고, 우리에겐 한 편의 짧은 ‘영화’가 도착할 예정이다.


TODAY WILL BE DIFFERENT



‘지금 날이 맑지만 날은 금세 저문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버린 어떤 다음 날. 이 영화에서 아마 가장 의뭉스러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준희의 영화를 시사하는 날이고, 먼저 한 차례 평론가들이 보고간 뒤 준희가 남편 없이 극장 객석에 앉는다. 길수는 그렇게 혼자이고 영화는 전과 달리 극장 안과 밖을 오가며 동시에 진행중인 오늘과 어제를 상연한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롱테이크가 많고 컷을 최대한 나누지 않았는데(근래 홍상수 작품 중 비교적 길게 찍힌 92분이지만 전체 컷 수는 불과 25개이다), 그 중 비교적 많은 커팅이 여기에 할애된다. 

옥상이 좋다는 말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옮긴 준희와 현우와, 혼자가 되어 며칠 전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길수. 영화와 영화 속 영화와, 오늘과 오늘의 어제거나 오늘이 아닌 어제의 어제. 그제야 영화적 시공간의 스펙트럼을 펼쳐보인 소설가의 영화 아닌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모두를 떨어뜨려 놓고, 우연을 흐트러뜨리고, 시간을 현실과 영화로 각각 재배치하며 우리가 알던 홍상수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제야 오늘이 끝이난다. 아니 파괴된다. 하지만 always the same always different. 그건 그저 오늘이 아닐 뿐인 이야기이고, 영화 속 남편은 보이지 않고, 영화가 끝난 후 길수가 나선 복도엔 전에 없던 몽연한 햇살이 가득하다. 우연은, 반복되지 않는다. 



“소형 카메라로 어떤 장면을 즉흥적으로 찍고 그날 편집할 때가 있다. 그런 소품들이 꽤 있다. 그 중 (이번 영화에 나오는) 단편 영화는 시나리오도 없고, 주제도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만들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영화와 스토리와 주제가 담긴 영화를 나란히 비교해보았다. (중략)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홍상수 감독은 베를린 수상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번 영화의 가장 큰 힌트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말을 아끼는, 하지 않는 그와 그의 영화를 돌아보면 매우 이례적인데,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 준희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 속 영화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에 맞물린 현실, 곧 이야기가 따라붙은 셈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즉흥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그를 위한 현실을 불러낸 셈이다. 혹은 그가 말한 소품의 영화를 위해, 그에 도달하기 위해 소설가의 하루가 직조된 거라 돌려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소품의 영화엔 제대로 엔딩 크레딧도 따라붙는다. 그러니까 엔딩 크레딧이 두 개다. 영화와 현실, 렌즈의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묘한 환상. 



하지만 그렇게 제시된 영화는 그야말로 영화 같지 않은 영화, 날 좋은 어느 날 길수가 낙엽을 줍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약간의 대화를 하는 게 전부인, ‘아직은 배우는 중’이라는 경우의 실력을 그대로 드러낸 아마추어 필름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영화가 끝나고 복도로 나온 길수가 마주한 ‘아무도 없는’, 준희의 다짐과 핸드폰 알람이 모두 지켜지지 않은 상황이 보다 영화처럼 보인다. 극장 관계자는 다가와 준희가 옥상에 있을 거라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고 말해주지만, 길수가 도착한 그곳은 과연 준희가 떠난 그 자리일까. 오늘은 이미 떠나가고 없다. 옥상에 올라 혼자 구석에 멀찌감치 담배를 피우던 준희는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퇴장했고, 스크린 속 길수는 남편도 없이 혼자서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렸다.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 현실의 영화와 영화의 현실이 동시에 오늘이 되었다 어제로 저물어가는 듯한 순간. 우리가 지금 본 건 과연 무엇일까. 혹은 오늘은 언제일까. 

조금의 시간적 트릭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어딘가 오늘의 앞과 뒤에서 거니는 듯한 체험을 주고, 그건 아주 단순한 명제 Today will be different, 이 영화의 주문과도 같았던 지극히 현실적 문장으로 구현되었다. 어쩌면 영화가 아닌 것, 혹은 영화가 되려하는 것. 아마도 자신의 영화적 작법을 실험하고 싶었던 홍상수의, 그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히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스러운 배경의 이야기’가, 난 그저 경우가 돌연 흑백을 컬러로 돌렸을 때와 같이, 오늘을 오늘로 환기해주는, 영화를 영화의 자리로 새삼 되돌려 놓는, 아주 사랑스러운 92분 속 41분과 같았다. ‘오늘의 영화’를 오늘 우린,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그곳에 영화는 이미 떠나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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