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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02. 2022

삶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사랑은 계속된다'

그 흔한 사랑에 관한 가장 철학적 거짓말




‘연애란 텅빈 소동이다. 즉 그 중심엔 아무것도 없다.
한칫 가벼운 연애라도, 의미심장한 운명적 연애라 하더라도,
그건 모두 텅 빈 소동들. 그러니까 답은 단 하나. ‘맘대로 해버려.’

              ’우린 모두 어른이 되지 못했다(僕らはみんな大人になれなかった, 燃え殻)' 중에서



사랑을 아무런 수식 없이 말할 수 있을까. ‘누구와 사랑하는 사이다’랄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랄지, ‘사랑이 끝났다’와 같은 문장 속의 덧대어진, 관계중인 사랑이 아닌, 사랑 그 하나 만으로 존재하는 사랑이란 과연 이곳에 도착한 적이 있을까. 사춘기 시절 갈팡질팡 풋내나는 가슴앓이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고, 애초 사랑이란 그 자체로, 단독으로 이곳에 존재한 적이 아마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사랑’이라고만 말할 때, 그건 얼마나 멀리의 아득함일까. 상대가 전제된 관계의 감정이라 어렵사리 정의해보려 해도, 그건 곧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의, 돌려 말하면 도망가는 사랑인지라, 여전히 수식 없이 말할 방도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속절없음이다. 

일단은 사랑의 주체가 필요하고, 그 상대 객체가 전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둘 사이의 오가는 감정의 소통이 뒷받침되어야, 어쩌면 사랑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장 속의 사랑은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때때로 가짜와 같고, 그렇게 거짓말로 흘러 결국은 내 안에 끝이 나고 마는, 속절없는 한숨에 다름아닐지 모른다. 내게서 시작해 나에게 저무는 1인칭 반쪽짜리의 사랑.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도쿄에 건너가 완성한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영어로 ‘Like' someone in love이라 쓴다.



제목부터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봉 당시 대부분의 리뷰가 사랑에 중심발을 딛고 이야기를 풀었지만, 단지 뒤늦게 보아서일까, 난 이 영화에서 조금도 사랑다운, 내가 기억하는, 혹은 아마도 생각하는 현실의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 주인공 아키코(타카나시 린)는 정비소에서 일하는 남자 노리아키(카세 료)와 연애중이지만 동시에 알선 데이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대학생이고, 아마 그 상대, 객체에 해당할 노인 와타나베 타카시(오쿠노 타다시)와 아키코는 할아버지와 손녀 뻘, 그저 무료한 노후를 위해 어린 여자와 만남을 가질 뿐이다. 이런 돈이 매개하는 관계에 우린 사랑이라 말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랑 앞에 소환된 인물들의 배경에 관한 설명들. 역으로 어떤 수식도 가능한 사랑이란 그 어떤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태어나고 또 끝이나는 게 현실(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역경의 사랑같은 걸 이야기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고, 도리어 영화는 오지 않았거나, 끝이 났거나, 혹은 잘못된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거나,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런 느낌이 든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적 고향같은 벌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아닌, 차들이 빼곡히 들어찬 도심의 로터리를 몇 바퀴나 반복하며, 사랑으로 돈을 버는 여자 아키코의 사랑 아닌 삶을 그저 다시 살아가고 있다. 키아로스타미 본인에게는 풍경에서 인물에게로의 멈춤,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겐  프레임 안에서 밖으로의 시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 키아로스타미는 사랑이라 단언하지 않았고, 반복하지만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가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가 찍은 작품이다.



아마도 저녁 무렵의 어느 바. 다소 화가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몇몇 테이블 사이로 손에 술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끊임없이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 여자의 등 뒤로 들어오고 나가는 커플과 남자와 여자와. 키아로스타미 특유의 롱테이크를 도쿄 한복판에 가져온 듯한 이 장면은 그만큼의 이질감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독특한 긴장 속에 흘러가는데, 먼저 대체 이곳은 어디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그에 더해 소리로 먼저 도착한 전화하는 화자는 누구이며 그는 왜 그곳에 함께 그리고 홀로 존재하는가라는 위화감(시종일관 전화를 붙잡고 있는 그는 안절부절, 좀처럼 편안해보이지가 않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영화는 이에 대해 이야기해줄 마음이 별로 없고, 들려오는 서로 다른 화자의 서로 다른 말들이 그저 도쿄의 늦은 밤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상을 해야한다. 그런 여백. 도심의 술 마시는 바의 장면을, 이토록 정적으로 그려낸 영화를 난 여태 본 적이 없다. 

프레임 안에서의 변화 만이 존재하는 시간. 미세한 빛의 밝기나 이야기에 따라 달라지는 긴장, 그리고 이따금 화자의 시선이 아닌 화자 그 자체를 바라보는 앵글. 검열이 심각한 이란에 뿌리를 두고 있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견뎌낸 방식이기도 한 이 ‘프레임의 영화’는 도쿄에 건너와 어쩌면 지금 하나의 개인을 구원하려 한다. 시간이 흐르며 아키코는 데이팅 알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지금은 노리아키에게 둘러댄 카페 teo가 아닌 바 rizzo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그렇게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우린 알게되)지만, 소위말해 가짜가 판치는 도심 유흥가 밤에 그 거짓말은 얼마나 진짜가 아닐 수 있을까. 아키코는 시험 공부를 하느라 잠이 부족했지만, 어쩌면 보다 다른 이유로 자주 졸리다고 말하고, 이는 아마 키아로스타미가 도쿄에 건너와 가장 먼저 느낀 첫 인상이었는지 모른다. 가짜와 거짓말의 일상을 벗어내고 진짜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러 향하는 가고싶지 않은 길에서, 아키코는 그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다.



잘라 말해 데이팅 알선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위 풍속업에 종사하는 여자 대학생의 이중 생활을 그린 이 영화는 애초 시작부터 이(수)상하기 그지없다. 먼저 우리가 갖고있는 풍속업의 이미지를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물론 그저 고급 풍속업이라고 변병할 수도 있지만, 키아로스타미 영화가 그런 설정을 했을 이유는 별로 충분치 않아 보인다. 정장을 갖춰입은 소위 중개하는 남자는 가기 싫다는 아키코에 강요나 독촉, 그러니까 강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권유거나 제안을 조언 식의 어투로 늘어놓는다. ‘가게 될 거야. 장래를 위해서 그 분을 위해서.’ 이런 상황에 이렇게나 철학적인 멘트가 또 있을까. 고작 하룻밤을 중개하는 사람의 언어로 보이지 않을 이 말들이 남자 친구와의 어쩌면 사랑, 돈을 받고 거래되는 행위 만을 도려낸 ‘유사 사랑’ 주위를 이상하게 지배하고 있다.

결국 아키코는 남자의 말대로 ‘가게되는데’, 그렇게 만난 상대(손님) 또한 이상하기는 그지없다. 전화벨이 유독 자주 울리는 2층 저택에서 나이 지긋한 손님 와타나베는 아키코를 맞이한 뒤 식탁에 초를 밝히고 잔에 와인을 따르고 레코드를 켜고 화장실에 간 아키코를 그저 기다린다. 잠이 온다며 돌연 침대에 누워버린 아키코를 심지어 강하게 보채지도 않는다. 물론 이 역시 좀 고상한 페티쉬거나 이상 성욕이라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가고싶지 않다고 소리까지 질렀던 아키코는 그곳에서 왜인지 가장 편안하다. 프레임 안과 밖을 시도때도 없이 들고나던 사람도 없는 와타나베의 저택에서, 그곳에 도착한 영화는 어쩌면 지금 그저 잠이 올 뿐이다. 다만 잠을 자고싶은 아키코와 이야기를 하고싶은 와타나베의 서로 다른 밤이, 아직은 함께이지 못할 뿐이다.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려 와타나베가 그에 응대를 하는 사이, 아키코는 그 주변을  마치 여행을 하듯 둘러본다. 카메라는 그를 뒤쫓는다. 바에서 아키코 만을 바라봤던 고정된 카메라를 떠올리면 분명 하나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변화다. 키아로스타미의 롱테이크, 이 부드럽고 유려한 동작의 패닝은 한동안 지속되는데 이런 줄거리를 품은 영화에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큼 조용하고 아늑하다. 성을 파는 여자를 훑는 카메라의 전형적인 시선은 이곳에 당연히 없고, 그에 반응하는 남자의 리액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영화는 책으로 빼곡히 뒤덮인 거실이자 서재를 거늬는 아키코를 뒤따르고, 시끄러운 도심을 빠져나온 여자의 밤을 함께하고 있을 뿐이다. ‘이 여자 저 닮지 않았나요.’ 아키코는 거실에 장식된 그림 속 여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대사 또한 생뚱맞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던 택시 안, 아키코의 미처 받지 못한 전화 사서함에선 그의 만나지 못한 할머니가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고있었다. 



‘있찌. 공중전화 박스 안에 붙은 사진에 아키코짱이랑 꼭 닮은 여자 사진이 있었어. 꼭 닮았는데 분위기가 달랐어. 윙크하고 있더라. 거기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해봤는데, 이런 무서운 남자가 받더라고. 그래서 다시 이 번호로 전화했어.’ 


어쩌면 다 드러난 일.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 하지만 여기엔 사실보다 믿음이 보다 작용하고, 닮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말이다. 대학생이지만 성매매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낮과 밤이 다른 사람을 살고, 그래서 때로는 거짓이 보다 더 사실이어야 하는 시간들. 그렇게 가끔은 거짓을 살고있는 인생. 할머니는 할머니라 얼마나 다행일까. 사서함 메시지는 그저 도시 사정을 잘 모르는 할머니의 착각일 뿐일지 모르지만, 소위 말해 거짓이 판치는 도시에 변명의 여지가 확보된다는 건, 다시 말해 거짓말이라는 건, 어쩌면 있어서 다행인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장래를 위해서.’ 로터리 광장에 할머니를 두 번이나 지나쳐 온 밤, 아키코가 도착한 곳엔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가 있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선 별로 익숙치 않은 공간, 심야의 바를 지나 이 영화는 어쩌면 두 번째 시작을 하고 있다. 손님을 만나러 향하는 택시 안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아키코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확인하지 못한 음성 메시지를 재생하고, 돌연 모든 말들이 소거된 듯한 택시 안엔, 아키코를 만나러 부러 도쿄까지 올라온 할머니의 음성만이 흐른다. 키아로스타미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차 안에서의 대화가 아닌, 시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의 말들이 일방적으로 들려오는 이 장면은, 도쿄의 밤을 나타내는 전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혼자가 된 도시의 밤, 그런 얼굴이기도 하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아키코가 바에 매여있는 사이 할머니의 기다림은 지연되고, 만남은 보류되고, 끝내 도착한 곳엔 할머니가 아닌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있었지만, 잠에 든 아키코 볼엔 흘러내린 눈물 자욱이 남았다. 아마도 마지막 약속 장소, 로타리의 할머니를 확인하기 위해 택시는 두 번의 우회를 하고, 결국은 보지 못한 할머니는 옆자리에 미안함으로 남았다. 그런 망설임과 애처로움, 미안함을 달래주는 이해 아닌 오해. 어쩌면 이런 걸 우린 사랑이라 부를까. 키아로스타미의 드라이빙은 늘, 사람을 가장 사람이게 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래서 이 영화는 훼손된 사랑에서 출발한다. 훼손된 사랑을 사랑하고, 어긋난, 하지 못한, 삐뚤어져 버린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애초 여자를 불러놓고 이야기가 하고싶다는 와타나베의 수상함이 이미 예견하고 있듯, 영화는 현실의 사랑에 시비를 가리지 않고, 케세라세라, 보다 세월이 이야기하는 사랑을 바라본다. 아키코를 태운 차 안에서 대화는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그렇게 키아로스타미의 운전은 여느 때 보다 고요하지만, 남자 친구와 학업, 그리고 밤을 사는 또 하나의 자신 사이 방황하는 아키코를 그저 잠들게 한다. 여기서 노인 와타나베는 분명 키아로스타미 본인이 투영된 아바타와 같은 인물이라 말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때때로 책을 내고 번역 일을 하고, 키아로스타미의 이력 역시 그와 비슷하다. 키아로스타미는 택시 안에서 죽음과 삶을 논했던 ‘체리 향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쿄에서 사랑을 사랑하려 한다. 사랑으로 불거진 나의 삶을 고찰한다. 핸드폰이 없는 와타나베 집에 부재중 전화 벨은 끊임없이 울리지만, 수화기를 잡아드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건, 그만큼의 나를 지키는 행위가 아닐까. 사랑이란 아마, 받지 못한 전화 벨 소리에 보다 더 남아있다.



차에서의 대화가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면 아마 와타나베의 오래된 볼보 세단에 아키코가 아닌 노리아키가 타버리는 장면일 것이다. 이 또한 롱테이크로 찍힌 장면에서 아키코를 사이에 두고 발생한 두 남자의 동석은 그야말로 불안하기 짝이없다. 와타나베는 아키코가 노리아키에게 한 말(변명)들을 알지 못하고, 노리아키는 둘 사의의 관계가 의심은 되지만 확신이 없다. 그러니까 정보가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편중된 맥락에서 둘은 언제 터질지 모를 사랑, 아닌 관계의 화약을 코앞에 두고있는 상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둘의 불안한 관계를 느긋이 바라보기만 하고, 착각이거나 오해의 대화는 운좋게 부침없이 흐른다. 마치 이해 아닌 오해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처럼, 마주치지 않아도 될 파국이 조심스레 둘을 피해간다. 시동이 꺼진 자동차와 사실을 우회하는 거짓말. 그리고 거짓을 면피하는 또 하나의 거짓말. 어쩌면 그렇게 삶은 지속되는 걸까. 

여전히 불안하기만 한 아키코는 노리아키가 물러난 자리에 앉아 시시콜콜 캐묻기 시작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어부라고 말했어’란 아키코의 자조적 한탄에, 와타나베의 ‘할아버지는 두 명이지’라는 대수롭지 않은 답변은 왜 이리 크나큰 구원처럼 들릴까.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 때로는 거짓이 삶을 지속한다. 인구 2천만 도시 도쿄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합이 이런 울림을 만들어낼 줄, 사랑이 아니었다면 예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다소 나태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도쿄에 도착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느낀 첫 인상, 도쿄란 도시에 대한 키아로스타미식 해석, 그런 코멘트와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성매매 알선이 이뤄지는 고급 바를 나와 동양 최대 환락가라 불리는 신쥬쿠 카부키쵸를 달리는 말 없는 택시 안에서 어떤 사랑의 진짜와 가짜를 말할 수 있을까. 그곳에 진짜를 따진다는 건 얼마나 많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일까. 공중 전화 박스의 스티커 사진은 분명 아키코이지만 그와 닮은 사람이란 세상 무지기수로 존재한다. 그에 더해 아키코와 닮은 여자는 와타나베 집 안의 액자 속 그림에도 둘이나 있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당장 내일을 예상할 수 없는 것만큼 세상은 어쩌면 보다 단순하고 진실은 보다 아이러니해 길가의 찢겨진 사랑을 구원하는 건 그저 단 하나의 거짓말이곤 한다. 

유일하게 와타나베가 응했던 전화 통화. 인쇄 중 삭제된 원고 한 줄이 발견돼 문장을 읽어주던 그 통화는 돌연 중단되버렸는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그 뒤 다못한 문장을 이어본다면 아마도 차에서의 노리아키와의 대화. ‘질문하지 말 것. 질문을 삼키고 돌아온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이를 받아들이느냐 마냐는 너의 선택이지만.’일 것이다. 이 마치지 못한 문장은 영화의 충격적 결말을 암시했던 걸까. 노리아키는 사랑을 했지만, 그건 경험이 부족한 어쩌면 폭력이었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사랑이 아닌, 그저 좀 더 많은 경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삶에의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질문을 삼키고 시간에 맡기는 것. 그러니까 'なるようになる。되는 일은 되게 되어있다.' 케세라세라. 이 말이 사랑을 사랑하는 말이란 걸, 경륜이 적은 그들은 아마 잘 모르지만, 그렇게 그곳에 삶은 계속된다.


https://youtu.be/QFoapxPvZ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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