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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19. 2022

우연한 U-턴, 운명이 숨어있던 자리

가장 고요한 재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U-턴 '그 후'를 살다




나리타 09시 출발 비행기는 타지 못했다. 계획된 심사가 하루 미뤄진다는 메시지는 하필이면 그 때 도착해 예정된 시간은 돌연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까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왕왕 벌어지는 일. 하지만 그렇게 떠버린 시간 앞에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면, 그건 얼마나 나의 선택까. 근처 호텔에 묵거나 먼저 도착해 현지에서 하루를 보내거나...가 아닌,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결정은 얼마나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또 아닐까. 그렇게 ‘나의 하루’가 되고 되지 않는 시간들. 물론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흔하고 흔한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렇게 지워진, 혹은 멈춰버린 하루는 어딘가 흘러, 이곳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불온한 아침이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도착해버렸다.


어쩌면 가장 조용한 재난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원작으로 가져온 하마구치 류스케의 여섯 번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실제로 막을 여는 건, 영화 시작 후 10분이나 지나 등장하는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웃는 얼굴로 아내와 인사를 하고 출발했던 여정은 돌연 돌아가는 길이 되어버리고, 다소 불온한 그 오프닝이 없어도 됐을 또 한 번의 아침을 반복한다.  

하필이면 그 때야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주인공 카후쿠(나가시마 히데토시)는 나리타 09시 출발 비행기가 아닌, 자신의 사브900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자택에 도착해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어쩌면 생략됐을 그 돌아옴의 길이란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던걸까. 하지만 동시에 일정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 근처 호텔에 묵거나 다른 방법을 택했다면, 그러니까 만약 U턴으로인한 일정 상의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애초 일상이란, 이런 구멍을 숨기고 흘러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린 그렇게 고작 반쪽짜리의 시간 만을 살고있는 걸까.

하지만 왜인지 반복되어 버린 아침. 그런데 이건  얼마나 우연, ‘돌발적’ 사건이라 할 수 있을까. 하마구치의 영화는 늘 일상의 어긋남을 파고들고, 세상은 때로 보(이)지 않았던 일들을 그대로 숨긴 채 지금도 흘러다. 영화의 중반, 교통 ‘사고’로 병원에 실려간 카후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녹내장 진단을 받는다. 굳이 설명하자면 한 쪽 눈, 왼쪽 눈의 시력이 점점 퇴화하는 난치성 증상. 의사는 녹내장은 원인이 불명확해 치료약이 없다고 강조하는데, 그건 곧 아직 의학적으로 공증된 ‘병’이 아니이야기이기도 하다. 카후쿠, 그는 어쩌면 살기 위해 반쪽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소설이 원작이란 이유로 초반부터 화제가 되었던 하마구치의 이 영화는 사실 그의 이전 작품과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는 무려 41분까지, 카후쿠와 그의 아내 오토 사이의 일련의 사건은 비교적 스피디하게 전개되고, 시차를 두고 말과 사건이 재배열되며 하나의 환기에 도달했던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가 초반부터 ‘시작을 위한 설명’을 늘어놓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보다 추상적이고 상징적 요소로 둘의 완전하고 불완전한 관계를 응시하고 있지만, 장면과 장면 너머, 프레임의 안과 밖, 그러니까 롱테이크를 통한 특유의 ‘영화적 지연’이 별로 이곳에선 발생하지 않는다. 카후쿠가 출장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기 까지, 하마구치는 마치 그 둘의 일상을 하나의 ‘재난’처럼 찍고있다는 불온한 인상 마저 준다.

그렇게 난 영화 시작 41분 까지, 장장 40분 내내 다소의 불안함을 갖고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상 2년 후, 차에서 잠든 카후쿠가 아내의 녹음 음성에 깨어난 오후, 자신의 빨간 사브 자동차를 운전하며 히로시마로 향할 때, 인트로 크레딧이 그제야 하시모토 에이코의 음악과 흘러 나오고, 난 이건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경유한 하마구치의 U턴이 아닐까 생각했다. 두고 온 ‘그 아침’으로 향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그리고 보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세계를 기다리는. 그러니까 '아사코'의 원제인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혼자가 된, 달리 말하면 여자를 잃은 남자의 오묘한 로드 무비. 그런데 그건, 왜 히로시마를 향하고 있었을까.


영화에 흘러가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시작



영화가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리는, 다시 말해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는 41분, 그리고 예정에 없던 U턴으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버리는 사건까지의 13분. 하마구치의 영화답게 이번에도 러닝 타임이 179분에나 달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엔 그렇게  ‘지연되는 시작’의 순간이 있다. 공항에서의 메시지,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서의 ‘시작’이야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 타이밍이지만, 무려 40분이나 지체된 오프닝 크레딧은, 새삼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니까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기 전, 영화가 '시작을 시작하기' 전, 그곳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의 문제. 영화는 카후쿠와 그의 아내 오토의 이른 아침으로 문을 열고, 둘은 아마도 섹스를 갓 마친 상태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를 전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묘사의 툴을 벗어나, 빛에 반사된 오토의 나체, 실루엣이고 오토의 어깨 너머 창밖을 응시하는 카후쿠의 초점 잃은 두 눈이다. 섹스를 하며 절정에 이른 오토와 반응하지 않는 반응으로서의 카후쿠의 리버스 숏. 하시모토의 몽환적 사운드와 이른 아침의 어렴풋한 햇살이 어울린 이 대목은 어딘가 부유하는 듯도 느껴지는데, 나중에 알게되지만 이건  드라마 작가 오토와 그의 남편 카후쿠, 두 사람 만의 내밀한 작업 방식이다. 오토는 섹스를 하며 몸이 반응한 이야기를 소리로 드러내고, 카후쿠는 그를 기억, 오토에게 읽어주며 글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둘의 섹스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접촉하고 있다. 불온하고 불안하고 불투명한 시간이 맨몸의 그들을 감싼다, 그렇게 어쩌면 ‘사고’를 예견한다.



예정된 일정이 갑작스레 밀릴 거라는 사고, 하필이면 집에 돌아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할 것이라는 사고, 그리고 그건 끝내 하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사고. 무엇보다 별 일 없이 평탄한 삶을 살고있던 카후쿠에게 꼭 필요했던 어떤 절대적 사고. 지나고 나서야 알게되는 '사고'란, 애초 그런 '백미러 시점'의 시간일까. 하마구치 영화엔 늘 큰 재난의 상흔, 파괴된 일상이 남기고 간 기억의 상처가 아른거리고, 그렇게 뒤틀린 시간에서 드러나는 진실의 세계가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그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진실을 가린 채 지속되는 불(안)완의 일상이 흘러간다. 카후쿠는 아내와 원만한 부부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겐 몇 해 전 사고로 잃은 딸 아이가 있고, 그렇게 위태로운 시간을 버텨 주는 건 아내의 외도를 보고도 모른 척 하는, 어느 ‘사실’ 앞의 외면이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고 하는 걸 누가 알아주나요’라 울부짖던 ‘바냐 아저씨’의 외침 속 다름아닌 바로 그 망각의 현실이다.

“두려운 건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 ‘바냐 아저씨’의 화자를 빌려 카후쿠가 탄 차 안에 이 문장이 흘러나온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지만, 우연이란 아마, 가장 이해 불가의 현실에 다름 없다. 몇 번의 외면과 몇 번의 '하지 않음'으로의 선택, 그리고 우연. 카후쿠는 ‘우연히’ 아내 오토를 잃었고,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곳엔 ‘재난’이 있었다.  


여자없는 남자들, 빈 자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드라이브 마이 카’는 형식적으로 무라카미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와, 함께 수록된 ‘여자 없는 남자들’, 그리고 ‘키노(木野)’와 ‘세헤라자드’를 바탕으로 그려진다. 그에 더해 체호프의 희극 ‘바냐 아저씨’를 경유하며 흘러간다. 아내를 잃은 남자가 드라이버와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이야기라, 간촐하게 압축해볼 수도 있지만, 메타 텍스트로 동원된 게 무려 네 편의 단편과 하나의 희극이다. 무엇보다 애초 하마구치 영화에서 줄거리란 별로 중요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가 영화로서 의미를 갖는 건, 이야기가 품고있는 빈 자리, 여자를 죽음으로 잃었거나(‘드라이브 마이 카’), 이혼으로 아내와 결별하거나(‘키노’), 세 번이나 자살로 여자를 잃은 남자이거나(‘여자 없는 남자들’). 인간을 여성과 남성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비어버린 나머지 한 자리, 비어있음으로의 ‘공통항’이다.

무라카미는 위의 단편을 모두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타이틀로 ‘문예춘추’에 4회 연재했다.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은 즉흥적으로 단 한 번의 퇴고도 없이 마무리했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니까 어떤 ‘없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루키는 쓰고싶었는지 모른다. 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 곳에 잘려나간 진실을 응시했다면, 하마구치는 이를 재난 후 ‘드러난 일상’이라고 아마도 변주하고 있다. 떠나간 것이 아닌 남겨진 것들에로의 전환.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건, 곧 남아있는 남자들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에서, 기존의 작품을 인용하고, 더구나 직접 발화하는 영화에서 그 텍스트란, 어쩔 수 없이 본 작품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마구치는 무라카미의 ‘세헤라자드’를 비교적 충실히 그대로 스크린에 가져오는데, 사실 이 만큼의 농밀한 정사 장면이 그의 영화에 등장했던 적은 없다. 오프닝이 등장하기 전, 영화의 물리적 시작인 이 대목은 확실히 하마구치 영화에 대해 이질적이다. 그렇게 보다 하루키 세계에 접촉한다. 다만, 하마구치는 ‘세헤라자드’의 모티브를 이용한다기 보다, 오토를 대신하는 일종의 ‘메타 현실’로서 활용하는 느낌에 가깝고, 딸 아이의 죽음 이후 서로 속내를 주고받지 않았던 카후쿠와 오토의 현실을 이른 아침 뿌연 햇살처럼 ‘보이고 또 보이지 않게 한다.’ 그렇게 오토를 소리로만 존재하게 한다. 그런 메타포로 활용한다.

짝사랑에 빠진 여고생이 상대 남학생 집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증표’를 하나씩 남기고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온 아침, 차 안에서 카후쿠는 “실제 경험은 아니야”라 묻지만 아내 오토는 “그럴리가”라며 웃음으로 단번에 부정한다. 그만큼 둘은 함께 있고 함께있지 않다. 오토의 이름이 오토(音)인 건 물론 소설 그대로이지만, 무엇보다 대사가 많은 하마구치 영화에서 그녀는 왜 유일하게 발화자로만 존재할까. 카후쿠와 남겨진 그들은 왜 말로만 ‘오토’를 드러낼 수 있을까. 영화의 오프닝이 지나가고, 오토가 말이 아닌 실제로 등장한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래 전, ‘해피아워’의 쥰이, ‘아사코’의 아사코가 아마도 그렇게 떠나갔다. 어쩌면, 삶이 그러하다.



하마구치가 비교적 덜 알려진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오며, 그 동기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하루키 소설을 관통하는 어떤 ‘인간 회귀’로의 길. 그의 소설엔 우연한 계기로 인생(혹은 세계)의 구멍을 발견한 주인공이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그 구멍을 메워가는, 일종의 아바타를 경유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하루키 만의 ‘루트’가 존재한다. 현실이 아닌 상징적 맥락에서의 그 교환은, 돌아는 왔으나 전과 다른, 달라진 ‘나’, 인간의 표상을 드러내는 잠재된 모티브의 실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복하게 되지만, 하마구치 영화에 늘 아른거리는 일상이 파괴된 순간의 비일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혹은 숨어있는 초현실.

친구가 갑자기 대청 마루에서 떨어지거나, 오토바이가 전복되는 사고를 입었지만 별 상처가 없거나((아사코). 마찬가지로 교통 사고가 났으나 왜인지 녹내장을 발견하고, 남편이 돌연 교통 사고로 세상을 뜨거나(‘해피 아워’). 하마구치 영화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고는 다른 영화에서도 흔하게 등장하는 다반사지만, 동시에 그가 작업했던 ‘동북 기록 영화(東北記録映画)’ 3부작(2013년), 그 토대가 된 현실의 대사건,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깊숙한 어딘가에 여지없이 관계하고 있다. 하마구치는 오스카 수상 후 기자 회견 자리에서 "동북 지역에서 마주한 그럼에도 살아가려는 강인함이 지금의 기반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보다 현실적이다.


'아사코'와 '해피아워'


하루키의 소설이 내적인 갈등에서 태동하고 있다면, 하마구치의 영화를 흔드는 건 여지없이 현실이다. 잘라 말하면, 하마구치 영화엔 현실을 보다 현실이게 하는 ‘사고’가 있다. 아내를 잃고 도착한 히로시마에서, 원폭의 상흔이 남아있는 그곳에서 카후쿠는 오래 전 엄마를 잃은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사토코)를 우연히 만난다. 운전을 대신 해줄 오토가 아닌 미사키를 왜인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런 걸 우린 그저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저 서로 닮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의 만남이라 할 수 있지만, 우연이 둘이 될 때 그건 어쩌면 운명이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 그런데 그 후, 우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살아가는 남자들


'도쿄 소나타'의 사실상의 엔딩, 드뷔시의 '달빛'이 연주되는 가운데 바람에 커튼이 흩날리며 빛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의 수수께끼를 직면한 하루키 남자와 파괴된 일상 아래 방황하는 하마구치의 여자들. 공포와 폭력으로 찢겨진 하늘 아래 구로사와 기요시와 재난, 그 후를 그럼에도 살아가는 하마구치 류스케. 가히 일본 영화의 새 시대를 선언하고 있다고 수식되는 지금 하마구치의 영화는, 그간의 일본 영화-쿠로사와 기요시나 소노 시온, 미이케 타카시와 키타노 다케시의 영화들-가 시도해온 ‘정신적 차원에서의 초월’을 함께한다. 평온한 듯 흘러가는 일상에 폭력과 공포를 드리우고, 재난이라는 결코 일상이지 못할 현실의 비일상을 폭로하며 괜찮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든 지속한다. 그렇게 이곳을 초월(하려) 한다.

물론 이는 때로 실패하기도 하지만, 구로사와의 ‘도쿄 소나타’에 문득 찾아오는 환상에 가까운 어떤 언리얼의 감각은 영화가 포착해낸 현실 너머 ‘보이지 않던 일상’임에 분명하다. 다만, 하마구치는 가장 내재된 일상의, 어쩌면 가장 현실의 재난을 관통하며, 결국 다시 돌아오는, 일종의 U턴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보다 일상적이고, 그렇게 비교적 하루키에 더 가깝다. ‘바쿠’를 찾아 센다이까지, 파도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결국은 방파제를 넘지 않고(혹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집 나간 고양이를 찾는 아사코처럼, 그의 영화는 곧 ‘다시 돌아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갑작스런 지진에 실의를 하다가도 다시 또 일상의 트랙 위에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하마구치는 여지없이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다소 결말을 앞서 이야기하는 꼴이 되어버리지만, 가령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엔딩 무렵.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에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에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



‘바냐 아저씨’에 등장하는, 아마도 가장 핵심일 이 대사는, 말을 결코 쉽게 긍정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그야말로 하마구치 세계를 압축하고 있다고 어쩌면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구치는 카후쿠를 경유해, 소냐(이유나, 박유림)의 수화가 더해진 카후쿠의 문장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하고, 바로 여기에 그, 그의 영화가 시도하는 진실을 향한, ‘우연의 발견’을 포착하려는, 가장 차선의 현실적 애씀이 있다. 소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방법론.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하마구치는 뒷이야기로만 알려진 자신의 작업 방식, 대사를 먼저 無의 상태로 만들고 다시 극으로 데려오는, 일종의 ‘말의 실험’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카후쿠의 워크숍 장면은 가히 하마구치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데모스트레이션이라 해도 전혀 무방하다. 말하자면 현실을 모방하는 극을 다시 극이 모방하고 있다.

그간의 하마구치 영화가 시점의 차이, 입장의 교차(나아가 교란)를 통해 고정된 말의 의미를 해체하는 작업을 지났다면, 이번엔 그에 더해 픽션이란 영화의 프레임이 하나 더 ‘말의 레이어’처럼 추가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 픽션일까. 아니 픽션을 닮은 현실일까. 하마구치는 그저 카후쿠란 1인칭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극에 반영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할까. 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사코’에 출연했던 이토 사이리는 그 리허설이라 불리는 과정이 ‘보다 나를 드러내는 통로가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나를 만나기 위한 우회로. 하루키의 남자가 대리인을 우회해 나를 마주하게 한다면, 하마구치 영화엔 배우란 대리인을 통해 알게되는 말의 숨겨진 의미가 꿈틀댄다. 배우와 캐릭터의 부딪힘을 매개로 연기가 아닌 인물의 현실이 도출된다. 그를 위한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다. '해피아워'에서 가장 미스테리했던 남자의 이름은 '우카이.' 그런데 그 ‘말’이란, 하마구치 영화에서 과연 무엇인가.


말의 3부작 : 너를 경유해 내게 돌아오는 길



이 지난한 과정에 대해, 하마구치는 ‘배우가 투명해져 극중 인물이 태어나는 것이 아닌, (배우의) 신체에 의해 틀어진달지, 그 신체에서 밖에 나올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도록 한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러니까 나와 나 사이의 노이즈. 혹은 의미를 상실한 말들의 불완전한 재연. 이는 곧 메소드 연기에 대한 저항이고, 영화를 보다 현실로 데려오는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안한 현실을 불안한 픽션 그대로 옮겨내려는, 영화도 현실도 아닌 ‘무언가’를 찾으려는 무모한 도전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그의 전작 ‘해피 아워’에서의 워크숍이 가장 잘 반증하겠지만, 그의 영화엔 ‘너무나 세세해 오히려 이해가 안되는 상황’과 같이, 극도로 현실적이라 도리어 현실을 넘어서는 듯한 ‘순간’이 꼭 금방 벌어질 것만 같다.

하마구치는 리허설을 동반한 촬영을 하루, 이틀 거듭하면 3일째 쯤 ‘놀라울 만한 게 나온다’고 했는데, 그 직전까지 벌어질 듯 벌어지지 않는 긴장감이 그의 영화를 현실 속 불길한 예언이거나 하나의 '증표'처럼 각인시킨다.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하려던 말을 그냥 했었다면. 그런 사소하고 사소한. 그렇게 중대하고 중대한. 하지만 치명적인. 우린 왜 하필 그곳에 그렇게 있었을까. 일본 영화의 한 세대를 넘어 하마구치의 '돌아감'은 결코 녹녹치 않고, 하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을 때 어쩌면 분명한 사실이 떠오른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너무나 세세해 오히려 소통되지 않는 감각.'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하마구치의 영화, ‘아사코’의 원제는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였다.



동일본 대지진 2년 뒤,  2013년 제작된 ‘동북 기록 영화’ 3부작 이후, 하마구치의 장편 ‘해피 아워’부터 ‘아사코’, 그리고 ‘상상과 우연’을 가리켜 ‘말의 3부작’이라 부른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말’과 함께 ‘탈 것’이 제기된다. 러닝 타임이 꼭 대사량에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이 세 편은 모두 두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해피 아워’엔 시작부터 온천지로 향하는 산악 전차가, ‘아사코’엔 료헤이가 아닌 바쿠와 센다이로 향하는 밤을 지나 아침까지의 여정이, 이번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예 제목부터 차가 전면에 드러나 있다. 어느 영화 감독의 작품 특징을 러닝 타임이나 ‘탈 것’이라 이야기하는 건 그저 나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하마구치에게 이 둘의 매개체는 그의 세계를 압축, 그리고 확장하는 툴로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말과 외부와 단절된 장소에서의 관계를 투영하는 필터로서의 탈 것.

먼저 ‘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하마구치는 늘 누군가와 함께 공동 작업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장장 5시간에 달하는 ‘해피 아워’는 하마구치와 노하라 타다시, 그리고 타카하시 토모유키로 구성된 ‘하타노 공방’의 공동 집필로 4년에 걸쳐 이뤄졌고, ‘아사코’는 시바사키 토모카의 소설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란 원작이 있었지만, 타나카 사치코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우 역시, 하루키 원작을 오오에 타카마사와 합을 맞춰 탈고한 작품이다. 물론 이는 그저 흔한 협업의 형태라 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건 다중 시점으로 쓰여진 이야기란 말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영화 속 ‘말’, 대화의 신을 살펴보면, 그곳엔 말이 아닌, 말의 관계, 나아가 여백이 보다 작용한다. 애초 말이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합으로 완성되는 2인칭의 언어이고, 그 의미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저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하마구치는 그런 언어의 비언어적 상황을 픽션을 무대로 하는 무려 영화 위에 펼쳐놓고 있다. 우리가 알던 ‘말’들이 그렇게 부정된다. 이야기는 지체되기 바쁘고, 이해 아닌 오해는 그대로 방치되고, 관계는 소통되지 못한 대화만큼 어긋난 현실에 삐걱거린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나는 것. 말들이 서로 부딪히며 와해된 뒤 남아있는 언어의 잔상. 하마구치는 이를 텍스트가 가진 ‘본래의 다양성’을 찾아(열어)가는 감각’이라 설명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카후쿠가 굳이 다국적 다국어를 활용한 연극 공연을 연출하는 이유, 그건 곧 하마구치가 영화에서 말을 사용하는 의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토 씨의 드라마는 정보가 너무 많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같은 게 좋아요.”



심지어 카후쿠의 연극엔 수화를 사용하는 한국인 배우 이유나(박유림)의 소리 없는 말도 등장한다. ‘말의 3부작’을 지나 하마구치는 좀 더 적극적인, 현실을 너머 픽션까지 아우르는, 말의 실험을 하고 싶었던 걸까. 물론 이는 체호프의 수 백년 세월이 쌓인 든든한 텍스트가 있어기에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와 아랍어, 그리고 수화가 오가는 리허설 현장에서, 소리 없는 말과 의미를 잃은 언어가 이야기하는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후쿠는 ‘대본이 물어오는 것에 반응하면 ‘왔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고 워크숍 현장에서, 본인 대신 바냐 역을 맡게 된 타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이야기하지만, 하마구치의 영화란 늘 그와 같은 시간을 관통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유나의 손의 언어는 소리를 지우고 서로 다른 나라의 서로 다른 말들은 의미를 덜어내고. 모든 게 무너져내리고 보이기 시작하는 것. 언어의 종말과 어떤 시작. 하마구치의 ‘말의 실험’, 그 핵심은 어쩌면 여기에 있던 게 아닐까. 다시 살아가기 위한 '증표.' 또 반복하지만, 하마구치는 '그럼에도 살아가는 강인함이 나의 기반이 되었다'고 말했다.


원폭과 지진에 대한 어느 노스탤지아의 메타포



개인적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하마구치의 최고작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179분이나 되는 영화임에도 스토리가 비교적 선명하게 정리된다는, 단순한 이유가 어쩌면 그 맥락일지 모른다. 아니면 그의 작업 방식, 말의 의미를 지우고 감정을 서서히 더해가는, 일종의 ‘말의 수련’과 같은 작업이 극중에 그대로 등장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하마구치의 영화란 평범한 일상에 찾아온 별 거 아닌 ‘사고’가 환기하는 불가해한 일상, 그 안의 진실, 그 자체였고, 그런 이유로 그의 ‘아사코’를 도쿄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몰입해 펑펑 울 수 있었다. 다만, ‘드라이브 마이 카’의 카후쿠는 하루키의 남자를 별로 넘어서지 못하고, 2년이란 공백을 넘어 그려지는 ‘그 후’의 이야기는 다소 상징의 얼개가 비교적 전형적으로 조합된다. 오토가 떠나고 바로 그 자리, 운전석에 앉은 미사키에게 오토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유추해보는 건 얼마나 예측 가능의 내일일까.



하마구치의 영화는 늘 예측보다는 무수한 예감이 가득찬 알지 못할 오늘과 곧 내일이었다. 말하자면 동북 대지진 이후 센다이와 교토, 도쿄를 오가는 ‘아사코’의 시간은 알아차리지 못한 오늘이지만, 엄마를 잃고 우연히 도착한 곳이 굳이 원폭의 상처가 남은 히로시마, 게다가 흔치 않은 이름 와타리가 그곳에선 흔하다는 사실은 이미 발견해버린 오늘에 더 가깝다. 심지어 카후쿠와 오토의 세상을 뜬 딸이 만약 아직 살아있다면 미사키의 같은 나이라는 건, 또 얼마나 우연을 감수한 현실인가. 물론 이건 잘 짜여진 우연의 영화적 설계라 할 수도 있지만, 하마구치 영화에서 우연이란 보다 알지 못함의, 보다 불투명한, 그렇게 비극과 동거하는,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알 것 같지만 끊임없고, 도착한 듯 싶지만 어긋나고, 때로는 거센 파도에 쓸려가고, 그렇게 무너지는. 하지만 다시 이어지는.

한 인터뷰에서 하마구치는 이에 대한 대답인 듯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의 스토리는 어딘가 ‘운명’의 색이 진하다고 만들면서 느꼈어요”, 운명이란 애초 선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그렇게 ‘그 후’ 밖에 남아있지 않는, 말하자면 겨울같은 것. 꼬박 하루를 달려 미사키와 카후쿠가 도착한 홋카이도에 사방이 눈으로 가득했던 건, 그런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을까. 삶이란 실패의 암초를 밟고도 그저 다시 걸어갈 수 밖에 없고, 세월에 흘러가던 그 강물은 지금 하나의 확신을 하려한다. 우연보다 조금 더 먼, 어쩌면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운명이란 이름의 돌이킬 수 없는 세월 복판에서. 위에서 인용한 ‘바냐 아저씨’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운명의 시점에서 그 궤도를 시간과 공간으로 정리해 본다면, 영화는 카후쿠의 잃어버린 2년을 뒤로 히로시마를 경유, 홋카이도의 밤을 지나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 구성의 작품이다. 일종의 커다란 U턴의 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그 두 길엔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고, 영화의 초반 길 위엔 카후쿠와 오토가 있었다면, 오토가 사라진 뒤 그 자리에 다녀간 건 타카츠키와 미사키, 그에 더해 한국인 코디네이터 단 윤수가 단 한 차례 동행한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카후쿠 1인칭에 의해 기술된다. 이전 하마구치 영화가 서로 다른 인물의 서로 다른 시점을 교차하며 그곳에 존재하지않는 ‘3인칭의 세계’를 드리웠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엔 오직 카후쿠에 의한 현실, 점점 시력을 상실하는 그의 완전하지 못한 두 눈이 반응하고, 대화하고 관계하며 벌어지는 반작용의 서사에 충실하다. 그렇게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은 크고 작게 카후쿠와 관계하고 반응하는 청자로서 때로는 카후쿠 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오토를 동경해 카후쿠를 찾아온 타카츠키란 남자. 타카츠키는 영화에서 오토 못지 않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 가리워진 인물로 그려진다. 동시에 카후쿠의 지난 세월, 오토 곁에 비로소 존재했던 카후쿠의 사라지고 남아있는 반쪽을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카후쿠는 한 쪽 눈의 시력을 점점 잃고있다. 어쩌면 그런 운명. 사실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보다 내밀, 농밀하다. 일종의 호모 에로틱한 관계가 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난, 타카츠키가 카후쿠의 빨간 사브에 올라타 카후쿠 곁에 앉았을 때, 오토를 함께 회상하기 시작했을 때, 둘이 키스를 할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느꼈다. 물론 혼자의 망상일지 모르지만, 그 장면 그 순간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 만큼 둘은 혼자로서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동시에 서로에게 완전하다. 그렇게 하나의 '현실'이 완성된다.

카후쿠가 미처 듣지 못한 오토의 유작 아닌 유작, ‘남자 친구 집에 몰래 들어가 징표를 남기고 오는 여학생’의 이야기, 그 다음을 채워준 건 바로 다름 아닌 타카츠키가 기억하는 오토와의 시간을 통해서였다. 기나긴 우회로를 지나 마주한 보지 못한 시간의 현실. 어쩌면 내가 아니고서 보이기 시작하는 나의 이면. 시종일관 시험대에 올라 부딪히는 하마구치의 말들이 그런 것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인물들은 때로 나를 은유하고, 내가 아닌 타인이란 결국 나를 완성하기 위한 부서진 시간의 남은 조각으로 나타나, 퇴장하기도 한다. 카후쿠와 오토의 섹스가 그렇게 작용, 이야기하고 있었던 걸까. 차 안에서의 길고 긴 대화 이후 침묵이 이어지는 장면을, 하루키의 소설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카후쿠는 아무 말도 없이 상대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타카츠키도 이번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에 멀리 떠나간 혜성과 같은 것이 빛나고 있음을 받아들였다.”


운명이 되려하는 우연의 드라이빙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모두 네 개의 죽음이 지나간다. 아마 이보다 더 많은, 수많은 밤이 찾아와 또 흘러가겠지만, 유독 단 하나의 밤이 지속된다. 오토와 카후쿠 사이 갑작스런 딸의 죽음도, 돌연 찾아온 오토와의 마지막 밤도, 미사키가 엄마를 고의 아닌 고의로 보내버린 오래 전 그 날의 밤도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와 운명같이 흘러간다.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이, 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란 사고가 지독한 밤처럼 찾아와 회복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고 지나간다. 하지만 어쩌면 오지 않았을, 혹은 피할 수 있었던 밤 그리고 죽음. 이런 건 당연히 우연이 아니라 한다면 필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운명일까.


하마구치 영화엔 삶에서 바라보는 이상한 감각의 일상 속 사건사고가 있다. 일상을 되돌려 바라보는 찬란한 삶의 우연이 있다. 카후쿠가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미사키를 만나 해결하지 못했던 오토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란 극히 영화적 설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침 그런 우연이, 그렇게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는 건 영화가 현실을 초월하려는 애씀의 의지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영화를 움직이는 진심이거나 진실을 향한 드라이브가, 그런 기적같은 비극을, 어쩌면 희망을 가능케한다. 그리고 그건 때로 관계에서 비롯되는 조각난 현실에서이고, 기억에서 회고되는 발견의 현실, 혹은 “운전이 섬세하고 배려있어 차에 타고있다는 걸 잊을 때도 있어요.” 때로는 중력 밖에 존재하며 찾아오는 지구 혜성의 빛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눈이 가득 싸인 미사키 엄마의 묘지 앞에서 그럼에도 생을 다짐하던 카후쿠의 장면을, 연극 ‘바냐 아저시’의 바냐와 소냐가 반복하며 그렇게 죽음과 생은 다시 한 번 이곳에 지속된다. 어쩌면 하마구치에게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필요했던 건, 1897년 발표된 그 작품에 쌓인 100년이란 세월 때문이었을까. 어제도 지금도 그래고 내일도 '알 수 없음'으로 지속되는 현실. 미사키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 카메라는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교차로 쉬지 않고 보여주고, 그 사이 밤은 또 한번 저물어간다. 강둑의 카후쿠는 라이터를 건네고, 미사키는 그녀 곁에 굴러온 프리스비를 개를 향해 던져준다. 엄마의 죽음과 함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던 개. 하지만 다른 개. 지나온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사람과 동물과 그와 그들과 관계하는 모든 것을 향한 사요나라. 또 한 번의 시작을 위한 예견되어 있던 마지막.

이별이 또 하나의 시작을 마무리하고, 세상이 또 한 번 어둠을 끝마칠 때, 삶은 죽음을 반복하는 걸까. 죽음이 삶을 반복하는 걸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은 분명 흘러가고,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건 너와 나 사이의 우연, 그 뿐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우연도, 운명도 살아가고 있는 한 지속되고 있다는 보다 넓은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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