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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29. 2022

우린 때로,
살아가기 위해 '삶'을 잊는다

'내일'을 열고 떠난 엔딩, 하마구치 류스케 '해피아워'를 열다




무려 5시간 28분, 328분의 여정을 시작하며 우린 하나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구름이 많이 낀 아침, 산을 오르는 열차는 어둠에 잠기고, 터널을 통과하는 창 너머 풍경은 프레임 탓인지, 두 길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터널을 빠져나와 보이기 시작하는 코베의 시가지와 여전히 하늘을 가린 층층의 구름들. 주인공 4명이 등장하는 건 바로 그 무렵인데, 이들은 모두 열차와 반대 방향, 창 밖의 풍경을 등지고 앉아있다. 현악기 멜로디를 배경으로 많지 않은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터널 밖을 빠져나온 열차가 시내를 가르고, 난 이건 하나의 전환, ‘터널'을 빠져나온, ‘그 후'의 이야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는 건 어쩌면 대부분이 어긋남. 기대했던 피크닉은 궂은 날씨로 시작부터 어긋나고, 주인공들은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산 어느 문턱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과 디저트를 먹고 다음 만남을 약속한다. 영화가 오프닝 타이틀 ‘해피 아워'를 보여주는 건 그제야, 그 무렵에서인데, 쥰과 후미와 사쿠라코와 아카리. 이들은 기혼이거나 미혼. 목적지에 도착해 점심을 먹기까지, 우린 고작 그들의 그 정도만를 알고있다. 단순한 영화의 인트로가 아닌, 어쩌면 이상의 ‘인트로덕션.’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제야 도착한, 장장 다섯 시간을 넘는 2015년작 ‘해피 아워'의 시작. 어떤 이야기엔 아마, '시작을 위한 시작’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알게된 건, 아마도 4년 전 한 줄의 문장에서였다. 그의 다른 영화도 다른 무엇도 아닌 단 하나의 문장이 묘하게 마음을 붙들었다. 한국에선 ‘아사코'가 되었지만 원제 그대로 옮겨보면 ‘자고 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일본어로는 寝ても覚めても。 말이 의미를 품고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라 한다면, 내게 이 문장이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의미라기 보다, 하나의 전환, 뿌옇고 또렷한 어떤 뉘앙스의 감각이 있었다. 곰곰히 뜻을 반추하면 잘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거나 언제도 아니거나. 그러니까 ‘올 오어 나씽.’ 모든 걸 지워버린 듯한 이 문장에 난 왜 마음을 빼았겼을까. 그저 개인적 여담이지만 당시 난 입원과 동시에 퇴사, 1년이 넘는 병원 생활이 막 마침표를 찍으려 하던 무렵이었다.

https://youtu.be/APyYqRFbIFE


너와 나의 3월 11일


영화는 2010년 출간된 시바사키 토모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이라 얘기되는 311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조금 전 출간된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혹은 그와 상관없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늘 그 만의 세계로의  진입을 유도한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 혹은 체험, 쓰여지지 않는 의미이거나 이곳에 그릴 수 없는 그림. 또는 풍경을 뒤로 한 시점이거나 ‘무언가'를 관통하기 까지의 ‘여정.' 그리고  무엇보다 남아있는 침묵의 시간을 하마구치의 영화는 품고있다고, 난 이제 생각하게 되었다. 그 해의 겨울, 시부야 작은 극장에서 난 영문도 모를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고, 그건 분명 내것, 동시에 내가 아닌, 모르던 눈물이었다. 전하지 않았지만 전해지는 것. 어쩌면 그런 전부. 어떤 ‘알 수 없음'의 묘한 화해가 그곳에 아마 있었다. 

‘아사코'는 갑자기 떠난 남자의 어제와 오늘을 맴도는 전에 없던 ‘이별의 영화', 이건 그 무렵 도쿄의 이야기였고 동시의 나의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다.

https://youtu.be/XsiDTMGBrAE


나에겐 4년 만, 정확히 이곳엔 7년 만에 도착한 ‘해피아워'를 이야기하는 건 쉽고, 또 어려운일이다.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상 난해함을 말하는 건 아니고, 5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무게감을 이야기하는 건 더욱더 아니다. 단지, ‘해피 아워’엔 모든 게 자리를 비움으로서 의미를 찾아가는 비상한 시간이 흐른다. 이 영화는 어느 영화보다 대사, 말이 많고, 5시간을 넘는 러닝타임은 곧 대사의 양과 비례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지만, 그 말들은 결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 오히려 말의 바깥, 말이 발화됨과 동시에 드러나는 ‘말이 아닌 말의 자리’를 남겨놓고 떠나간다. 지극히 일상적인 말들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지극히 생경하게 느껴진다.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란 교집합은 얼추 처음부터 짐작이 되지만, 그의 모든 인물 설명이 이뤄지는 건 그들간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상대를 매개하는, 작용 반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너와 나’의 아슬아슬한 ‘집합체.’ 어쩌면 그 안에 이 영화가 있다. 대화가 거듭되고, 이어질 수록 우린 어느 즈음 ‘이건 너에게 비친 나, 그와 그들이 기억하는 나(너)의 이야기’란 사실을 말이 아닌 감각으로 체험하게 되고, 네 명의 친구 사이란 곧 내가 아닌 나를, 혹은 ‘그들 곁에만 존재하는 나’를 도려내 전시하는 장치임을 은연중에 알아차린다. 그리고 나아가 이건 어느새 (하마구치 영화 안에서) 불완전한 세계로 진입하는 어떤 입구의 관계가 되어있다. 아뿔싸.

다시 말해, 쓰여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뒤늦은 알아차림. 1인칭 관점의 현실엔 애초 보이지(존재하지) 않고, 영화에선 편집으로 희석되버리는 ‘너와 나’가 아닌 그 모든 것. 지금까지 이런 ‘영화같은 영화’가 또 있었을까.



화목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조금씩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며 얼그러지고, 그건 곧 ‘함께’란 이름을 지우고 남아있는 너, 그리고 나의 어쩌면 가장 ‘진짜'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셋이 다니면 꼭 하나는 소외된단 말은 왜인지 시대 지역을 망론하고 정답같지만, 넷이란 가장 완전한 조화 속에 숨어있는 가장 완벽한 거짓말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제목 ‘해피아워'가 반어법이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3+1, 그런 어떤 불안을 담다


5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 ‘해피 아워'의 스토리를 과감히 한 줄로 정리해보면, ‘사이좋은 여자 친구들의 실은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여름에서 그해 겨울 초입까지의 시간을 아우르는 영화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했다가 돌아왔거나 서로의 가정을 살아가는 이들의 때때로 만나고 헤어지는 날들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레 10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에 숨어있는 각자의 생활, 그리고 혼자의 시간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흐른다. 물론 이건 가식적 우정에 대한 고발을 의미하는 건 아니고,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건 성격이 닮아서인지, 아니면 달라서인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 하마구치 감독은 인지유(仁智勇),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다를 바 없는 구조라고 이야기했다. 



난폭한 장남과 총명한 차남과 심성이 착한 막내 아들. 영화로 옮겨오면 활발하고 직설적인 아카리(타나카 사치코)와 이성적이고 절제하는 쥰(카와무라 리라)과 여리고 우유부단한 사쿠라코(키쿠치 하즈키). 그러니까 절친한 친구 사이 이면에 지속되고 있는 각자의 일상들.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화기애애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건 어김없이 서로 다른 일상에 기반해 발화되고 이(오)해되는 말들에 다름 아니다. 후미(미하라 마이코)는 자신을 대하는 남편 타쿠야의 태도에 ‘거의 방치’란 말을 하지만, 웃음이 오가는 자리에서 그건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대화 내내 이와 비슷한 이해 아닌 오해는 유쾌한 대화마냥 줄줄 흘러간다.


엄밀히 말해 '사소한 소통의 실패.' 하지만 사쿠라코와 쥰, 그리고 아카리와 후미의 20년 넘는 세월을 생각하면 거대하고도 사소한 실패의 소통. 4란 숫자는 완벽한 조화라기보다 정반합을 넘어선 3+1의 불안한 조합일까. 새삼, 관계를 만들어주는 건 이해의 시간에서일까, 오해의 곁에서일까. 

하마구치 영화의 ‘시간'은 일면, 알면 알수록 ‘알 수 없음’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실패, 그런 축적, 어떤 일상의 수행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사이가 좋지'만'은 않다'는 건, 보다 삶을 향해가는 어떤 입구. 기념 사진을 부탁 받은 여자는 ‘다섯 더하기 하나는’이라 말하는데(일본에서는 대부분 하나 더하기 하나), 지금 이곳에 없는 그 ‘하나’는 무슨 의미일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이 지워버리는 어떤 진심. 하마구치는 이번 영화에 대해 ‘카메라는 절대 인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몇 개의 ‘약속'을 지닌 일상이 그저 지속되기만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를 비범하게 하는 건 영화가 구현하는 ‘시간'에 대한 어떤 정직함에 있다. 영화는 극 중 인물들의 일상과 꼭 같은 질량과 무게로 그들의 삶을 그대로 재현된다. ‘인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던 하마구치 감독의 말처럼 쥰이 코헤이와 이혼 소송을 치르고, 결혼의 실패 이후 새로운 만남에 문을 닫았던 아카리가 닫혀진 문 앞에서 다리를 다치고, 사쿠라코의 아들이 여자 친구를 갑작스레 임신시키는 집안 내 대사건 등, 현실 속 일상이 필름 속 ‘비현실의 현실’로서 최대한 리얼 타임으로 그려진다. 

여타 영화라면 플래쉬백이나 회고의 신, 혹은 편집에 의해 생략, 영화적 기법으로 충분히 압축할 법한 이야기이지만, ‘해피 아워엔 그 너머를, 혹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느림의 카메라’가 있다.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이야기, 혹은 전이거나 후의 시간, 나아가 ‘나의 시점' 에 가려진 ‘너의 시점'까지 아우르며 영화는 내연을 확장한다. 충분히 넉넉한 러닝 타임이 그곳에 할애한다. 극중 아카리를 연기한 다나카 사치에는 5년 전 전주 국제영화제 내한 시 ‘이건 긴 영화가 아니라 슬로우 무비'라 이야기했는데, 이 영화엔 그런 삶을 따라잡으려는 ‘슬로우'의 몸짓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이 의미를 다하지 못하고, 관계가 진심을 왜곡한다면, 하마구치는 보다 많은 시간, 보다 농밀한 관찰 만이 그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있는 것처럼, 카메라를 인물에 밀착한다. 표면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내면, 말들이 각색해버린 ‘진심을 위장한 거짓’이 아닌, 말의 실패로 암시되는 ‘진실'의 뉘앙스를 서로 다른 네 여자 사이에서 바라본다. 영화엔 육교나 철로, 하나 이상의 방향을 가진 소위 ‘교차’의 포인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인물과 인물 사이의 ‘교차.’ 절친한 네 명의 친구 사이라는 게 고작 포장에 불과하다 해도 그렇게 알게되는 내가 아닌 나와 너가 아마, ‘그곳’에 있다. 어떤 반사경과 같은. 혹은 거울에 비친 정반대의 나와 같이. 그리고 내가 가지 않은 길과 너가 뒤로한 나의 자리에 남아있는 시간. 그렇게 그의 영화에서 ‘대화’는 '지금', '여기'를 초월해 흘러가는 걸까.

‘씨네21’의 송경원 기자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론을 쓰며 ‘대화는 진심을 가장하기 위한 거짓’이라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하마구치 영화에서 말이란 결국 나(혹은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우회(迂回)'의 수단인지 모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워크숍 ‘중심이란 뭘까(重心ってなんだ)’를 기획한 남자의 이름이 ‘우카이(鵜飼)'인 건, 그저 의도된 우연이었을까. 살얼음판을 걷던 후미와 쥰, 사쿠라코와 아카리의 일상이 비약하기 시작하는 건 바로 그 워크숍 자리에서였고, 그 워크숍이란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에서 비롯된 기억이 시작이었다. 서로 교차되는 시작과 시작. 다시 이야기하지만 영화가 제작된 건 2015년. 세상엔 남아있는 시간의 현실이 있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아마도 아직, 그곳에 있다. 이미 지나온, 하지만 기억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쩌면 그곳의 그렇게 오해된 세상에.


'일상의 재난'에서 깨어나다



이곳엔 가장 먼저 도착한 하마구치의 영화 ‘아사코’와 마찬가지로 ‘해피 아워’는 10여 년 전 3월 11일 동일본 지역에 발생했던 대지진, 그 재난의 자장 안에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재난 영화의 전형적 서사를 그리거나 직접적 인과 관계로서의 드라마를 끌고가는 건 물론 아니다. 다만, 여기엔 어쩌면 진정한 ‘재난 이후의 삶’이 재난이 아닌 ‘일상’의 시점에서 흘러간다. 뉴스엔 밀려오는 파도에 집이 쓸려가고 사람들의 아우성과 함께 마을이 무너져 내리지만, 실제 그 후, 이들의 일상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또 하루를 더해가는 시간의 이야기가 묵직하고 느릿하게 흐른다. 그리고 이건 사소하고도 거대한 차이인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재난이란 특별한 사건이라기 보다 일상 속 숨어있던 잠재된 ‘파괴’, 혹은 실패를 드러냄에 보다 가깝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311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311이 일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일상이 일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그의 영화에서 재난은 어디까지나 일상에 다름없고, 나아가 교차로의 한 쪽 길을 택하며 가지 않은 나머지 길에 두고 온 모든 ‘알지 못함’의 다소 잔인한 은유이기도하다. 후배를 훈계한 뒤 갑작스레 계단에서 넘어지는 아카리의 사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믿고있던 아들이 고작 중학생 나이에 여자 친구를 임신시키는 일은 어떤 전후 관계에서 설명이 될까. 그러니까 우린 얼마나 많은 ‘일상의 재해’를 품고 살고 있는걸까.

‘아사코’에서 직접적인 재난 장면은 극중 후반에서야 등장하지만 이미 영화는 한 남자와의 이별로 폐허가 된 여자의 시간을 걷기 시작했고, 그 남자란 왜인지 얼굴이 똑같은 하지만 이름은 다른 바쿠와 료헤이였다. 어쩌면 삶이란 삶이 아닌 것들을 살아가는, 말이 진심을 위장하며 대화를 이어가듯 ‘알 수 없음’을 버티기 위한 우리 모두의 가장극은 아니었을까. 후미가 제안한 워크숍의 타이틀은 다시 한 번 ‘중심이란 뭘까.’ 조금 바꿔 질문해보면 ‘우린 어디에 살고있는가.’ 하마구치의 영화는 그렇게 무너진 일상에서 (보이기) 시작되는 1일의, 실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극히 일상의 품에서 정직한 템포로 삶을 좇아가는 하마구치의 영화이지만 동시에 '비범한 시간'을 드러내는 계기, 그 촉발이 되는 건 ‘해피 아워’에서 한 번의 워크숍과 하나의 낭독회이다. 고작 하나의 워크숍과 낭독회. 하지만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처럼 느껴지는 이런 일들은, 굳이 수첩에 적어넣어야 할 작은 약속과 같은 일과는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시간, 그렇게 보지 못한 일상의 시작이기도 하다. 

먼저 우카이, 워크숍 진행자인 그가 갤러리 사람들과 첫 미팅을 하는 자리는 다소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본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해 갤러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에서 그는 워크숍에 대한 필요필수적인 말들을 주고받지만 소위 갤러리하면 떠오르는 아티스트란 말에 꽤나 머뭇거리는 모양새다. 곤란해하는 후미, 그리고 기획자 앞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감각의 문제입니다.’ 애초 그가 워크숍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건 츠나미에 쓸려갔던 단 하나의 의자. 해변에 나뒹구는 의자, 집기들을 재미삼아 세워보기 시작했는데 그건 왜인지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중심’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의자의 발이 아닌 발의 어느 지점과 지면이 맞닿아, 어느새 서로의 무게가 제로로 수렴하고 중심이 사라지는 이상한 시공간의 발견. 굳이 말로 표현하면 무게, 질량이 0으로 수렴되는 중심을 초월한 무중력의 세계. 그러니까 나도 너도 아닌 자리. 그런 어떤 하나의 ‘무(無).’ 


지금, 이곳을 '관통'한다는 것



하지만 그 비현실의 현실은 이후 우카이의 삶을 송두리채 뒤바꿔놓았고, 그건 곧 재해의 흔적이 남은, 기억하는 일상의 1일이 되어버렸다. 인간을 포함 모든 사물에 존재한다는 ‘정중선.’ 우카이의 작업은 그 정 중앙의 선을 탐지하는 일이며, 그건 곧 다시 돌아오기 위함의 작업이기도 하다. 열명 남짓이 모인 자리에서 우카이는 그 ‘의자의 체험’을 다시 시연해 보이고, 난 순간 알포손 쿠아론이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만든 ‘로마’의 어느 선구자가 제시한 동작, 한 발로 땅에 서보는 기이한 체험의 장면이 떠올랐다. 수 많은 수행자들은 실패하는 동작을 일개 가정부 클레오가 해내는, 설명 불가능한 일상 아닌 일상. 어쩌면 여기가 아닌 ‘그곳’에서의 장면. 

네 개의 발이 아닌 발의 어느 한 지점, 손가락 하나에 중심이 이동하며 하나의 질서, 완전한 조화를 만들어낸다는 건, 어떤 현상의 은유일까. 어쩌면 나에게 너가 다가오는 일일까, 아니면 너에게 내가 자리하는 일일까. 그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신기하다’거나 ‘우와’라는 감탄사 정도 뿐.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우카이는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감각’의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건 곧, 하마구치 영화에 대한 문장이기도 하다.



우카이가 진행한 워크숍과 같이, 그리고 영화의 초반 인트로의 ‘터널’ 장면에서 암시하듯 영화엔 어떤 ‘길목’을 관통해내는,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각, 체험한 뒤 찾아오는 묘한 정화의 순간이 있다. 결코 말로는 옮길 수 없는, 그저 말과 말로 드러낼 뿐 뒤늦게 알아차릴 뿐, 이곳에 머물지 못하는 너머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건 떄로 전혀 의도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고 어느새 잊혀져 다시 일상 안에 수렴되어 버린다. 워크숍 뒤풀이 자리에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쥰은 ‘행복했다’고 말한다. 정말로 별 거 아닌, 오히려 진부한 소감이지만 뒤이어 이들은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서로 소개를 하며 인사를 건네받고, 여기서 우린 이 ‘행복했다’가 분명 어딘가 다른, 정말 진심에서 우러난 문장이라 몸으로 납득하게 된다. ‘중심 찾기’, ‘등을 맞대기’, ‘배 소리를 듣기’ 등 우카이의 워크숍에서의 몇 가지 연습은 그야말로 아리송지만, 이 모든 동작이 끝내 도달한 건,  쥰의 경우 이렇게 ‘행복하다’란 감각이곤 하다. 쥰이 아닌 아카리와 후미와 사쿠라코 역시 서로 다른 소회를 '말'하고, 그건 아마도 어쩌면 같은 의미의 '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쥰의 이 대사는 이후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이전까지 영화는 죤 카사베츠의 ‘Husbands’에서 가져온 ‘신부’였다) 그렇게 영화엔 각각 네 명의 여자가 각자의 ‘터널’을 지나, 하나의 깨달음, 혹은 알아차림과 조우하는 서로 다른 여정의 일상이 그려진다. 하마구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모든 게 ‘끝까지 헤엄쳐내다(潜り抜ける)’의 영화다’란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우리 일상의 한발짝 더, 이해와 현실이 아닌 ‘알 수 없음’의 어느 복판. 물속을 잠영하듯 ‘알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발걸음의 316분. 우린 쥰의 ‘행복했다’는 말을 결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건 분명 기나긴 터널을 지나온 ‘이후’의 한 마디, 어쩌면 ‘로마’ 속 클레오가 고난 끝 마주한 얼룩진 희망과도 닮은 '무엇'인지 모른다. 네 명이기에 행복했던 날들이 모두 지나온 창밖으로 흩어져 흘러가고, 어쩌면 인생, 산다는 건 모두 다 거짓말. 인생이란 다리 하나로 지탱하며 곧게 서는 의자처럼, 홀로 완전하다는 건 아마도 가장 불안한 균형이다.




상영 시간도 5시간이 넘는 ‘해피 아워’는 모두 8교 만에 각본이 완성됐다. 1년이넘는 작업이었고, 6교 때까지 제목은 ‘해피 아워’가 아닌 죤 카사베츠의 1970년 작품 ‘Husbands’를 그대로 사용한 ‘ハズバンズ(허즈번즈)’였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허즈번즈’가 아닌 와이프 혹은 전 와이프, 모두 네명의 여성. 그렇게 이 영화엔 애초 시작부터 인물의 대립항, 내가 아니 너를 염두한 어떤 반작용,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말되어지는 것, 혹은 듣는 시점의 말에 보다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만큼 ‘영화란 현실’을 벗어나 있다. 그렇게 자꾸 영화는 '그 밖'으로 이탈을 한다. 이를 보다 '진짜'를 향한 터널이라 이야기하면 과장된 해석일까. 



전반부 워크숍과 같이 등장하는 어떤 메타포의 극중극, 낭독회 장면. 이 대목은 중간의 몇 번 자리 이탈을 하기는 하지만, 무려 30분이 넘는다. 타쿠야가 담당 편집을 맡고있는 소설가 노세의 짧은 단편을 영화는 낭독이란 툴을 빌려 글이 아닌 소리, 말로서 영화 속에 새겨넣는다. 소설은 혼자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의 온천을 배경으로 한 여행기. 주인공 여성의 관점에서 회고되는 사랑에 대한 자조적 기록이고, 그러니까 남자가 빠져있는 반쪽짜리 세계의 반쪽 밖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다. 결국 여자 넷이란 완벽한 조합도 ‘허즈번즈’, 결국은 남편 없는 관계의 반쪽, 불완전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걸까. 하마구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리고 극중 쥰의 남편 코헤이의 입을 빌려 ‘여자는 수수께끼에요. 전 지금 그걸 알아가고 있어요’라 말하기도 했다. 

겨우 반쪽짜리의 애씀. 우린 그렇게 늘 ‘알 수 없음’의 곁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참고로 코헤이는 지금 쥰과 이혼 소송 중. 쥰은 며칠 전 갑작스레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이다. 아리마 온천에서 돌연 혼자의 길을 떠난 쥰. 그의 시간은 지금 어디쯤을 맴돌고 있을까. 4에서 3이 되었을 때 드러나는 무엇. 그건 과연 1의 자리일까. 아니, 애초 인간이란 2인칭의 동물로 태어난걸까. 넷은 되었지만 둘은 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곳에서 가장 치열하고, 동시에 가장 불완전하게 완전하다.



어떤 엔딩은 '내일'을 열고 떠난다


'해피아워'는 328분, '드라이브 마이카'는 179분, 그리고 가장 최신작 '상상과 우연'은 121분이지만 그의 구상으로는 모두 단편 7개 중 3개에 해당하는 절반 이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길다. 중간 인터미션이 필요할 정도로 길고 또 길다. 하지만 이 물리적 의미에서의 '길다'는 그 어떤 화려한 서사나 장치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여지없이 모두 '일상에서 흘러나온' 길이의 시간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현실의 시간을 압축, 축약하며 대략적 2시간의 러닝 타임 안에 응축시켜 넣는다면, 하마구치의 영화란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보다 긴 '픽션의 현실'이 되어버린다. 

'아사코'에 출연했던 이토 사이리는 이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하마구치는 사전에 충분한 리허설을 갖고 그 자리에서 배우들은 모두 3단계의 대사 리딩의 과정을 '통과'한다. 처음엔 무감정으로 읽기,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졌다 생각되었을 때 감정을 넣어 읽기, 그리고 본방에서 연기하기. 그렇게 인물이란 세계에 그 인물로서 자리하기. 아마도 이런 방식이 그의 영화에 보이지 않는 시점을 새겨넣는 게 아닐까. 그렇게 지나간 날들을 구원해내는 게 아닐까. 하마구치의 영화엔 '이입'의 드라마가 아닌, 나에게 다가오는 '나의 이야기'가 있고, 그건 아마 우리가 일상에서 만난 상상 이상의 상상이 된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내가 그의 2019년 작품 '아사코'에반응한 건 그곳에 흐르는 시간이 왜인지 나의 것과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의 난 갑작스런 일상의 뒤틀림 이후 아직 길을 헤매는 중이었고, 갑작스레 남자가 떠나간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아사코의 삶이란, 알게 된 것을 애써 모른 척, 강둑에서 내려와 현실 너머 '이곳'에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시작도 마지막도 불분명한 그 길이란 내가 잃어버린 길을 다시 보여주지 않고, 돌아갈 수 없는 어제 만이 잊지 못해 오늘도 발에 치인다. 하지만 하마구치 영화의 어떤 '알 수 없음.' 옳고 그름과 거짓과 진실이 무화되고, 솔직하려다 말하지 못한 진심이거나 대화를 위해 진심을 가린 무수한 거짓말들은 묘하게 '오늘의 보이지 않던 출구'처럼 다가온다. 



결코 이해를 해서가, 이유를 알게되어서가 아니라 '알 수 없음'이 긍정되는 어떤 무한의 세계가 그의 영화 속에 잠들어있다. 멀리 길을 떠나는 쥰이 사쿠라코의 아들과 항구에서 이별을 할 때, 그건 어느 하나의 시작과 마지막 사이 헤어짐이자 엔딩이었고, 다리를 다치고 다시 돌아온 병원에서 훈계하기만 하던 후배 간호사와 서로 포옹을 하는 장면은 내가 나에게 건네는 뒤늦은 사과처럼도 보였다. 살면서 갖게되는 슬픔, 상실, 그리고 고뇌. 어떤 영화도 그에 대답을 헤주진 않지만, 아니 해줄 수 없지만 하마구치 영화에선 어떻게든 '해소'의 과정을 갖는다. 그렇게 노력한다. 아마 그가 이야기한 潜り抜ける. 시간을 갖고 오래 바라보면 보이고 알게되는 어떤 '텅 빔'의 자리.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인생. 하마구치는 한 인터뷰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어쩌면 나를 부정할 때, 진정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고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그곳에 있거나 혹은 없거나. 너가 내 곁에 다가올 때, 그렇게 드러나는 어쩌면 '오늘의 나'가 있다. 아마도 금새 지나갈, 곧 끝이나버릴 그 '해피아워'의 시간에.


https://youtu.be/ckUM9VXzy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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