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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20. 2023

팬데믹 영화같은 시절,
어느 映画로움에 대하여

우리가 삶을 삶이라 인식하기 이전, 영화가 그곳에 있었다. '기생충'




얼마 전, 일본 오사카의 어느 고등학교에선 김치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하는데, 일본에서 김치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2002년 ‘겨울연가’ 이후부터였다. 당시 한류 열혈 팬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잇코 씨가 TV에 나와 김치냉장고 이야기를 했을 때, 난 의아하기만 했지만 일본의 가전 양판점 ‘요도바시 카메라’가 그 김냉을 팔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다.  근래 유럽 국가에서 한국의 국민주 소주 판매량은 급속히 늘어 역대 최라고 하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늘 빼놓을 수 없었던 건 그들에게 ‘초록병’이라 불리던, 바로 그 소주였고, 왜인지 어쩌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란 역사상 종종 있(어왔)다. 한류란 말보다 먼저, K푸드거나 컬쳐의 태생 보다 먼저 왜인지 도착해 이미 알고 있는 것. 당시 그들에게 한국은 좀 생소할지 몰라도, 겨울연가의 김치거나 초록병의 홍상수 영화라면 왜인지 잘 알았던 것이다. 지난 2019년, 세상이 봉준호의 ‘기생충’에 반응하며 나도 몰랐던 '짜파구리'를 발견해냈을 때, 그래서 난 그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이, 참으로 신선하고 또 의미 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사카 카이세이 학원 고등학교(星学園高校). 한국도 아닌 일본의 고교에서 학생들이 자의로 모여 김치를 담그고, 대회에 참여하고, 교내 최대 이벤트 ‘문화제(文化祭)’에 출품, 클럽 활동을 한다. 묘하게 국적을, 시대를 넘나든다. 한국의 음식, 동양의 식문화이기 이전 그건 이미 그곳에 있었고, 나라와 시대를 초월하며 공유되어간다. 그리고 이건 아마 따라서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 함께 마시고 싶은 기분, 그리고 바로 그 술에 취한 흥겨움을 같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보편적인. 국적이나 인종이나 성별은 작용하지 않고, 오직 인류 공통의 경험, 보다 인간의 본능이거나 감각에 의한 작용과 반작용일 만이 움직인다. 말하자면 짜파구리에 김치 하나 얹는 것 만으로 '함께'가 시작하는 시절, 사는 거 참 별 거 없다 싶지만, 세상은 사실 늘 그래왔다.


김치와 소주의 한국 영화,

그리고 짜파구리



봉준호가 첫 영화를 만들고 오스카, 칸의 최고상을 수상하기까지 20 여년, 세상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SNS 시대를 지나 이젠 OTT와의 시절을 보내며  21세기는 매스 미디어가 아닌, 밀레니얼 ‘마이 미디어’의 문을 열어버렸다. SNS가 중앙 집중형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해체한 것과 같이 OTT로 대변되는 원하는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 자율 기반의 초멀티플한 시스템은, 가히 관람 패턴의 개인화, 즉 ‘마이 채널’의 등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영화를 보(게되)는 기존 1백년 역사의 극장 포맷 시네마를 가볍게 넘어서고, 작게 그리고 가장 넓은 형태로 개체화한다. 코로나 이후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이 극장이 파리를 날리고 OTT는 그에 반하는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때, 그건 단지 방역이나 전염-비전염의 맥락에서 뿐 아니라, 애초 OTT라는 게 함께이지만 결코 '곁'에는 있지 않은, 철저히 독립된 개인의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막장 드라마가 2, 3년 세월이 흘러 동남아 국가에서 인기를 끌 줄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사랑의 불시착'은 왜 다시 '한류'에 불을 지폈나. 그리고 마치 재앙 블록버스터의 어느 한 대목처럼 코로나 팬데믹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을 살아갈 줄이야, 아마 그건 봉준호도 몰랐을 것이다.


한류도 한참 시들어 가물가물한 시절에 ‘사랑 불시착’이 다시금 일본 시청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서로 다른 OTT의 시계가 돌아가는 시절에 마침 그 드라마가 그곳에 딱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콘텐츠가 시차를 지우며 공유될 때, 그건 매우 가까운 원거리가 된다. 한류는 세월이 한참 흘러 국경도 막히고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집구석 콘텐츠’로서 다시 한번 그들의 선택을 받았다. 이 얼마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서 OTT는 미디어의 개인화, 곧 콘텐츠의 민주주의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낯선 제3세계의 영화도 OTT 유통망 안에선 모두 동일하게 취급받는 현실, 그것이 OTT, 포스트 코로나 시절의 민주주의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그 가장 이상적 원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찾아오는데, 우린 가장 한국적이자 세계적인, 그리고 글로벌한 로컬의 영화 봉준호의 ‘기생충’이 탄생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영어권 영화가 주름잡는 세계 영화판에서 한국인 배우와 한국말만으로 완성해낸 세계적 히트와 성공. 이는 이례적이고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 사건이고 동시에 4천만 국민 모두를 환호하게 하는 그야말로 성대한 뉴스였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더이상 그런 ‘대중의 사고방식’, 거시적 해석은 이제 별로 유효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개인주의, 밀레니얼적 탈장르와 다양성 시대 탈국적 조류 안에서의 영화 만들기, 즉 무엇보다 봉준호라는 개인의 보편성이 그 날의 그 성공을 이뤄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국적과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 인종과 문화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어느 영화의 성공이라고 평하는 게, 보다 밀레니얼적, OTT를 아우르는 미래적 영화판 시절에 더 적절할 것 같다. 기무치와 소주의 세월이 그래왔던 것처럼, 이건 좀 우리 살아가는 세월의 이야기를 닮았고, 시대의 변화와 그의 반영으로서 전세계 129개국 상영, 전세계 3억불 흥행 수익을 낼 수 있는 초-글로벌한 로컬 영화가 가능해진다. ‘기생충’ 성공의 해,  2019년은 하필이면 한국 영화사 100주년이기도 해 봉준호 감독의 이 성공 예는 한국 영화사의 업적이라 쉽게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이미 시대는 ‘마이 미디어’, 매스로 이야기되기를 거부한다. 바로 다음 해 칸 경쟁작이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 강동원 송강호 배두자 주연의 한국 제작 영화 '브로커'의 국적을, 우린 아무 고민 없이 한국이라고 적을 수 있을까. 영화는 어쩌면 지금, 좀 더 영화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감독·작품상을 수상하며 말했던 소감마냥,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이는 이탈리아 계 미국 감독 이건 마틴 스콜세지의 것이라고 봉 감독은 이야기했는데, 잘못 옮겨진 건지 때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거나‘가장 세계적이다’가 되어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 좀 어떤가. 중요한 건 지금은 이미, 대중이 아닌 개인, ‘마이 미디어’의 시대가 도착, 공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탈국적의 영화와

MASS를 넘어 MY MEDIA 시대



‘기생충’의 성공 비밀을 풀어보는 건, 사실 쉽고 또 어려운 문제이다. 너무나 이상적인 흥행 공식 그대로 세계 곳곳 영화제를 돌며 작품성에 대한 인증을 받았고, 글로벌 개봉을 통해 대중의 호감도도 획득해갔다. 무엇보다 봉준호라는 시네아스트의 다시 한국에 돌아와 찍은 작품이란 점에서 ‘가장 로컬적인 게 세계적이다’란 말을 실험하게 하는 쉬운 예의 작품으로도 보인다. 봉준호가 세계적 감독으로 자리매김 하게 한 작품이라고, 쉽고 편하게 정리해 말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영화는 단순히 성공한 영화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묘한 구석이 있다. 천만 영화도 이제 한 둘이 아닌 국내 영화 시장에서, 그리고 더이상 국적이 무의미한 글로벌 영화 판에서 ‘기생충’의 흥행은 비단 관객 수익이나 규모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그는 비평과 관객,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그를 반영하듯 미국과 유럽의 시네판에서 동일하게 호평, 흥행을 이뤄냈고, 무엇보다 오스카와 칸의 최고상 수상이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성취를 보여주었다. 이건 굳이 예를 들면 우리의 김치와 일본의 기무치가 좀처럼 어울릴 수 없는 것과도 좀 비슷한데, 맵고 날카로운 유럽인의 심미안도, 두루두루 장르를 따라가며 재미도 메시지도 챙기는 미국인들의 효율적인 안목도 ‘기생충’은 모두 '클리어'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칸과 오스카의 작품상을 다 수상했던 건 1994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유일했다. 다만 그건 미국인 감독이 만든 영어권 작품이었고, 비롯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이기는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래서 비영어권 한국 영화로서 이 쾌거는 새삼 더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라디오 프로그램  <프랑스 컬처>의 앙투안 귀요 PD는 대중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 수상작.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물론 영화가 제7의 예술로 추앙받고 숭배되는 것에 대한 가장 우수한 예로서, 봉준호의 ‘기생충’은 입증했다’고 평했다. 세상엔 취향은 넘어 공감되는 '좋은 것'이란 게, 여지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곧 영화라고 말해보고 싶어진다.



예술성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칸 영화제, 대중성과 전통을 중요하게 심사하는 미국의 아카데미 어워즈.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잣대를 모두 충족시켰다는 의미에서 ‘기생충’은 분명 남다르다. 영화감독 봉준호가 이뤄낸 분명 가장 큰 성취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천재가 나타난들 시대가 알아보지 못해 한참이 흘러서야 뒤늦게 발견되는 역사의 예는 수도 없이 많고, 애초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수 십년 째 듣고있는 아카데미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이를 봉준호 개인의 성과, 그가 그저 잘해서 얻어진 결과라고 말하기에는 역시나 조금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다. 물론 봉준호의 영화가 시대에 조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거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등의 무리를 했던 건 결코 아니지만, 그가 모두 6편의 장편을 만들어오는 사이 영화의 관람 문화 역시 그만큼의 변화를 살았음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극장 개봉과 상관없이 세계 어느 곳의 영화도 마음껏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시스템적 관람의 환경으로서 OTT. 각 지역의 공중파 보다 OTT 광역망이 더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시대에 영화의 타깃이란 새삼 어느 나라의 사람들인가. 이를 OTT 생활권의 시작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봉준호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첫 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1인치 자막’에 대한 멘트를 남겨 길게길게 회자가 됐다. 분명 유효한 지적의 소감이지만, 어느새 우리집 안방 극장이 되어버린 OTT 안테나 아래서, 수 백 편의 한드를 시청하며 살아가는 일상에 한국말은 별로 낯설지 않은 그야말로 조금 먼 이웃나라 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인치밖에 되지 않는 자막의 벽을 넘으면 여러분은 더 많은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그 단 1인치의 벽을 넘게 도와준 건 분명 OTT로 물밀듯이 밀려든 해외 어느 이름 모를 국적의 콘텐츠, 그런 말들과의 조우, 조금은 다른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어색함, 또는 저항감의 완화, 혹은 해소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국적도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보다 자유로워진 그 어느 세계에 '우린 더 많은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봉 감독은 4관의 무대였던 아카데미 시상식 자리에서 첫번째 상을 수상하며 이런 얘기도 했다. 



“이름이 바뀐 첫 상을 받아 의미가 깊다.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오스카가 추구하는 방향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본래 그가 탄 ‘국제 장편상’의 이름은 ‘외국어 영화상’이었다. 이유라 한다면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세상은 여러모로 다양성의 내일이다. 그 해 오스카 시상식에선 서로 다른 국적의 11명의 엘사가 출연 '겨울 왕국2'의 주제곡 ‘Into the Unkown'을 부르기도 했는데, 근래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조차 틀에 박힌 관념을 훌쩍 벗어던지고 점점 더 ‘탈국적’의 세계로 진입하고, 까만 피부와 머리칼을 한 인어 공주를 만나리라고, 그 옛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국적도 피부색도 언어도 모두 다 지우고 오직 영화로만 남아있는 것. 봉준호의 영화는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직 '봉준호란 포지션'에서 꾸준하게 작품을 '발신중'이다. ‘기생충’ 직전 ‘설국 열차’와 ‘옥자’, 그리고 ‘’까지 그의 몇몇 영화는 한국을 떠나 글로벌한 현장에서 제작되어 왔지만, 그건 곧 그가 한국 영화란 틀에 갇히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예임과 동시에, 보다 보편적인 한국적 장르거나 정서에 얽매이지 않는 인류 공통의 역사적 경험, 감정과 작용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의 '1인칭 소감'이 이야기했던 건 말의 차이를 가르는 벽에 대한 하소연이 아닌, 그럼에도 전해지는, 1인칭 너머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이해, 보편적 공감대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다시 ‘홈 그라운드’로 돌아와 완성한 오리지널 ‘메이드 인 코리아’의 '기생충.' ‘가장 로컬한 게 가장 세게적이다’란 말은, 비로소 이곳에 쓰여지는 게 아닐까. 봉준호의 보편성이, 바로 이곳에 있다.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반지하’가 ‘banjiha’로 떠돌며 이해, 공감될 수 있는 건 바로 그와 같은 계급 불균형에 대한 역사적 공통의 기억 때문이다. '반지하'가 없어도 알 것 같은 것,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 영화란 바로 그런 개체적 구체성보다 일반적 공감의 보편성에 기반한다. 이에 관해 유럽권 평들은 그래서 좀 흥미로운데, 건축법상 지하는 창고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프랑스의 라디오 방송 '카날플뤼스'는 토론 코너를 마련해 ‘지하라는 공간이 환기시키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이미지가 폭넓게 변주된다. 수십년 전 나치 독일 점령기에 지하실로 숨어들어야 했던 유대인들,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난민들의 숨어 사는 삶이 패닝을 따라 계단을 내려간 그곳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즉 너로 인해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네게 비친 나의 기억이거나 너의 아픔의 변주형. 봉준호의 ‘기생충’은 거의 만장 일치의 호평을 받았는데(실제 칸 황금종려상은 심사위원 6인 만장일치였다), 우린 사실 각자의 기생충을 보았을 뿐이다. 같은 영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공유하며 각자, 그리고 함께하는 것. 그렇게 가장 자유, 민주적인. 그런데 이 말은 왜이리 OTT적인가. 영화의 시작은 늘, 1인칭이었다.


OTT와 봉준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글로벌'하다



봉준호의 ‘기생충’, 나아가 그의 영화의 한 가지 특징은 아마, 호불호가 존재하지 않는 감독의 영화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국 영화 신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박찬욱, 장준환, 또는 홍상수의 영화가 좋고 싫음이 명확하게 갈리거나 혼재하고 있다면, 봉준호의 영화는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그의 ‘개인적인 보편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믿게된다. 봉준호의 영화는 늘 사회의 어떤 부조리, 혹은 계급이나 차별에 대한 휴머니즘적 비판과 고찰에 장르적 상상과 때로는 초현실의 판타지를 아우르지만, 그게 결국 그려내는 것,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란 인류 보편적인 경험이거나 트라우마, 혹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나 비약, 또는 그를 복구하기 위한 상상과 도약이다. 특히나 이번 ‘기생충’은 프랑스 영화 시장에서 가장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개봉 한달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뒤 기존 황금종려상 수상작 중 최고 성적이었던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95만명)’나 프랑스 자국 영화 중 1위였던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76만 7천명)’ 등을 훌쩍 뛰어넘어 봉준호 감독 영화 중에서도 최대 관객 동원작이 되었다. 나아가 프랑스 내 비상업 아트 영화 중에서도 1위 수준의 흥행을 기록하고 말았다. 

심지어 ‘기생충’은 개봉 당시 할리우드 대작 ‘엑스맨: 다크 피닉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와 거의 1~2주차로 '대결'했던 걸 감안하면, 그곳에서 봉준호란 이름은 이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물론 그 질감이나 성격은 상이하지만 흥행, 또는 주목도란 면에서 거의 비등비등한 무게감의 네임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의 또 다른 영화 ‘설국열차’는 알포손 쿠아론 감독의 대작 ‘그래피티’와 정면 맞대결을 해 파리 개봉관 전석을 만석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란 특수성, 그런 지역색이란 때로 한국의 대중적이다란 말보다 더 관객 흡인력을 갖는다. 즉, 여기서 한국 영화라는 건 굳이 불필요한 사족이 된다. 소위 봉준호의 영화는 곧 이름이 장르라는 말은 이제 더이상 영화의 작법상 스타일 만을 가리키는 수사가 아니라, 영화 시장 내 그의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 소비되고 공유, 확장하는 그 제반의 모든 걸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기생충’을 설명하는 가장 유효한 문장은 좀 허무하지만 오직 봉준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는 국적을 초월하면서도 아우르고, 인종과 종교, 성별과 존중하면서도 배반한다. 그렇게 영화이면서도 현실적이다.‘ 



‘기생충’에 대해 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드 시네마’는 이런 문장의 평을 내놓았다. 

'봉준호가 펼쳐내는 풍경화는 서로 대비되는 두 가족의 삶에서 비롯되는 코미디, 블랙 코미디 영화처럼 보이지만, 한 발 더 나아가 누구나 상대적 약자가, 혹은 강자가 될 수 있음을 경유해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우리 인간을 추모한다.’ 그리고 난 삶을 보다 더 삶이게 하는 것, 영화를 보다 더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 애초 이건 가장 인간적인, 국적도 종교도 인종도 성별도 초월한 가장 인류 본연의 맨몸과 같은, 낯설고 친숙한 미래를 이곳에 상영하는 일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만들었고, '기생충'은 그와 다시 개인의 품으로 돌아오는 영화의 시대적 조류와 마주한 사건이며, 우린 그 어느 쪽에서도 내게 맞는 '기생충'을 발견해 냈했을 뿐이다. 작고도 창대한, 사소하지만 장대한. 영화가 영화인 건 아마도 이런 아이러니 때문이다. 영화란 언제 한 번 현실이 아니었던 적이 없고, 현실은 지금도 영화적 내일을 꿈꾸며, 삶이란 그렇게 좀 영화적이다. 언어를 넘어 우리가 살아갈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기생충'은 증명한다. 영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음의 미래를 희망한다. 오늘도 오늘을 살고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모두 다 '계획을 갖고 살아가는 것.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성공이나 실패는 결코 계획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영화같이도 왜인지 그건 늘 그래왔다. 

영화는 그저 오늘도 오늘을 계획할 수 있어, 딱 그만큼 희망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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