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내면화 소멸하느 힘, 그의 영화가 다시 남자 곁에 설 때
어느 영화 앞에 서면, 시간은 한뼘 삶에 대해 물러난 듯 관찰하는 위치에 서게된다. 평상시의 영화를 보지 않거나 떠올리지 않았을 때, 별 다를 부침이나 머뭇거림 없이 흘러가던 그 여느 때에의 삶에 낯설고 익숙한 무언가가 스쳐가, 나의 살아간다는 것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는 일이 더러 있다. 그저 영화를 보았을 뿐인데, 또 하나의 세계가 나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내 지금을 압도하며 보다 앞서 실재의 현실이 되어있음 또한 깨닫는 순간을 실감하게 된다.
직접적으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제목이란 게 바로 그러한 작동을 하고 마는데, 즉각적이고 탐색하는, 동시에 추상적이면면서 개별적으로 드러나는 그 말들은, 영화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포장하는 외피 전체이자, 머물지 않고 나의 세계로까지 어느새 전이되어 이제 곧 환기되어 일어날 것들에 대한 장치로서 작동을 해왔던 것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훈민정음체로 적은 듯한 제목의 타이틀이 등장하며 그 시작을 알릴 때, 그건 이미 여기가 아닌 것에 대한 첫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가 제목을 쓰지않고 시작을 한 적이 있을까. 그의 서른 세 번째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영화는, 아마 이미 쓰여진 제목의 #scene 1로 시작한다..
프레임 안과 밖,
'집' 앞에 선 영화
여자가 요리를 한다. 싱크대 앞에 식재료를 올려놓고 물에 씻고 칼질을 한다. 다만 화면은 그의 요리를 하는 손동작만을 보여주고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집 밖으로 나가 찻길에 서있는 차 안에서, 영화의 주요 인물인 시인이자 백수 동화,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 준희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대체로 대수롭지 않은, ‘거의 다 왔어.’랄지, ‘여기서 그냥 가?’라거나, 혹은 ‘나 그냥 갈까’같은, 흔히 있을 법한, 아니어도 상관은 없을 말들이 오래 보여지고 관찰된다. 이전의 짤막한 인트로적 장면을 떠올려보면, 심히 수상한 상황의 전개이다. 없던 의미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이 두개의 연결신은 사실 아무런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혹은 그렇게 보이면서 붙어있다. 전자는 손의 동작만 그리고 후자는 거의 별 움직임 없이 말만이 오고간다. 흡사 정물과 풍경을 바라볼 때의 그것과 같이, 같은 곳을 다르게 바라본다. 한 쪽은 상황을 제시하고, 나머지 다른 쪽은 상황에 부연한다. 똑같은 정지된 프레임에 잡힌 물상이지만 그 역할과 하는 일의 성질은 다른 것이다. 그렇게 시계의 질서가 교란한다. 이후 밝혀지는 주방에서의 일하던 여자 곧 준희의 엄마 선희는, 이 영화의 커다란 모티브가 되는 집, 자연과도 맞닿아있어, 그렇다면 일종의 배경이 되는 장면에 더 수렴하고. 프레임과 프레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물감을 뱉어내는 이 영화의 세계 안에서라면, 오히려 그건 Mother Earth, 태초의 그것에 아마 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들에 대해서도, 그 쓰임은 좀 묘하게 어긋나있다. 동화의 준희는 집에 다 도착을 해놓고도 내리지 않거나 못한다.(여자: ‘응, 거의 다왔어) 집 앞에 한참을 머물면서 들어가지 않거나 그러지도 못한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돼’, 부러 미루기도 하고, ‘집 좀 보고갈래? 간신히 이제는 집에 들어가나보다, 그러기를 청하는가 싶다가도 ‘집 마당까지만 갈건데’, 겨우 집의 안뜰까지만이 허락된다. 집 앞에 있지만 집에는 있지않고, 집 밖에 있으면서 또 어쩌면 집 안에 있다. 집에 돌아가기가 참 힘든 영화다.
하지만 그에 반해, 둘의 차가 정차된 곁을 빠르게 주행하는 대형 트럭들의 연이은 개입은, 이상하리만치 계속된다. 소음도 바퀴에 이는 흙먼지도 생생해 다소 위압적으로까지도 느껴진다. 아마도 현장 그대로를 단지 통제하지 않았을 뿐인 그 장면은 그래서 어떠한 의도를 읽게 하는데, 가령 준희와 동화 그 둘이 지금 도착해 위치한 곳의 맥락에서의 장소성, 그를 보여주고 있음이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차들이 연신 쌩쌩 달리는 좌측에 도로변, 그리고 우측에 동화가 처음 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저런 집’의 사이 동화와 준희는 위치해 있음을 드러내고 비추며, 통제되지 않는 실재성의 흉포와(왼편), 보여지지 않음으로 보호되어 있는 허구적 대상('저런 집', 프레임 밖의 오른편)의 대비를 통해 지금 이 영화가 도착한 자리 또한 상상케 한다. 이를테면 그의 전작 ‘당신의 얼굴 앞에서’와 ‘소설가의 영화’가, 그리고 '물 안에서’에서 더 심화되었던 프레임 안팍에서의 실험, 영화로서의 현실이 아닌, 영화가 되는 현실에 대해 새삼 배회하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동화는 시인이지만 변변한 직장은 없는 30대 남성, 그는 지금 같이 또 다르게 오직 그곳에만 보이는 것들을 향해 frame in, 들어간다.
처음부터가 여기와,
여기가 처음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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