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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Dec 01. 2022

기후우울증은 지나갔습니다만

함께 점심을 먹던 직장동료가 갑작스런 질문을 던졌다. 


'인간, 000님의 관심사는 뭐예요?'


'기후위기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일 말고 인간 000으로서의 관심사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지난해 기후위기 분야로 이직을 했다. 이 주제는 이제 내 '관심사' 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일'이 된 것이다. 관심사로 출발해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관심사를 묻는 질문이라니. 3초 간의 눈알을 굴리며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렸지만 딱히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그 둘을 구별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일하는 인간'이 아닌 '인간 개인'으로서도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의구심이 든 걸까? 


'사실 요새 관심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주어진 일에 반응하면서 사는 게 전부예요'


이직을 하고 기후 문제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얼마간 우울감을 앓았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접근할수록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했고, 심각성에 비해 사회와 사람들이 변화하는 속도는 너무나 더디게만 느껴졌다. 내가 느끼는 무력함이 심리학적인 반응이라는 걸 알고 얼마 간은 '기후변화 심리학'과 '기후변화에 관한 감정적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앓고 있는 '기후 우울증'에 대해 들여다보고 싶었고, 이러한 감정을 병리학인 현상이 아닌 생태계가 붕괴되는 현상을 목도하는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됐다. 오히려 아파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누군가는 말해주었다.




미래를 기대하거나 희망한다는 '감각' 자체가 소실되어가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지금 추앙하는 것들(물질적 부, 성공, 직업적인 성장, 노후준비, 안정 등)이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뭘 해야 하지? 그런 질문들이 자주 떠오른다. 그렇다고 전처럼 우울하거나 절망적이지는 않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이미 한차례 지나간 것 같다. 요즘은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오늘 주어진 일, 계획한 것들을 미루지 않고 잘 수행해내는 것,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사소한 기쁨과 바쁨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고 있다. 그 이상으로 생각이 나아가지 않도록 뇌가 전략적으로 스위치를 차단한 것만 같다. 얼마나 속 편한 소린가... 



요즘들어 유독 한 뇌과학자(올리버 색스)의 책에서 읽은 한 임상환자의 에피소드가 잠들기 전마다 떠오른다. 워낙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정확한 책 제목도 정확한 스토리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떠올려보자면 누군가가 말을 걸기 전에는 어떤 생물학적 반응을 하지 않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누군가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말도 하지 않고 움직임조차 없었고 심지어는 배가 고프다거나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리욕구 표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을 걸면 그 질문에 대해서는 또렷이 대답을 했다.  


며칠간은 내가 그 남자와 별만 뭐가 그리 다르지에 대해 생각했다. 정해진 일과에 맞춰 움직이고, 오늘 주어진 일을 수행하고, 누군가가 말을 걸면 반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사회적으로/업무적으로) 필요한 대화 그 외에는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을 만큼까지만 하고 그치는 것. 그 환자에겐 뇌와 관련한 문제였다면 내게는 정서의 문제인 것 같다. 뭔가를 희망하고 기대한다는 '감각' 자체가 소실되면서 내가 상상하는 시간의 지평도 짧아지는 것 같다. 주어진만큼 살아내고, 주어지만큼만 반응하는 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나온 자기 보호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기후우울증이 안 지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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