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를 걷어내고, 허비를 멈추다

SNS 글쓰기의 중단

by 아리아리아

어느 날, 나는 내가 여기저기서 주절대는 것으로

나의 창작 에너지를 탕진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창작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 모두,

그저 한낱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문제는,

주절거림의 무대가 죽도 밥도 안 되는 사적인 술자리와 SNS뿐이었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주절대는 키보드워리어나 되고자 SNS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SNS에 발을 들인 목적은 단순한 아카이빙에 있었다.

마음과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을 때

"뭐 좀 채울 게 없나?" 하고 열어 볼 수 있는 냉장고,

혹은 내가 채집한 창작 재료들을 모아 둔 팬트리 같은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종종 들려 재료들을 채워 넣다 보니

이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 먹어봐도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도구를 들여놓아 요리해 먹기 시작했고,

배를 채우고 나니 노곤해져 이불까지 끌어와 잠까지 청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팬트리는 내가 온종일 기거하는 터전이 되어버렸다.


재료를 넣어두려 잠시 들른 공간에 나 스스로를 가둬버리게 된 것이다.

잠시 쉬며 사진과 글을 올리려 했을 뿐인데,

수면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질 않나, 소중한 일과를 다 날려 먹질 않나...

포스팅에 나의 하루를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있었다.


문득 일전에 내가 겪었던 '3단 콤보 사건'

(노트북 먹통, 외장하드 먹통, 포트폴리오 사이트 계정 삭제)으로

데이터를 모조리 날려버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의 마지막 데이터 저장소인

SNS가 폭파되는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만약에 내 SNS계정마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가상으로 돌려본 'SNS의 공백' 자리에는 '허무한 삶'이 똑 떨어지게 들어앉았다.

내게 포스트가 소실된다는 것은 단순히 기록이 지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 자체가 소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SNS가 내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내 삶이 SNS 안에만 존재하는 듯 했다.


그제야 보였다.

정처도 의미도 없이 발자국만 찍고 있는 나의 모습이.

주종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나의 발과 발자국의 기묘한 관계가...


관성의 궤도를 이탈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SNS계정을 삭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에 쌓인 기록들을 마주하니,

차마 내 손으로 폭파시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나는 방향을 틀었다.

'삭제' 대신 '거리 두기'로.

팔로워를 정리하고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애초에 아카이빙이 목적이었으니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작업조차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스크린 바깥의 현실 공간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오래 방치된 물건들을 비우고, 오래 붙박여있던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쌓인 먼지와 곰팡이를 발견하기도 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해묵은 물건을 되찾기도 했다.


현실공간에서의 탄력을 받아,

가상공간인 SNS로 달려가 냉큼 비공개 계정으로 돌렸다.


내친김에 십여 년간 쓰던 연락처도 바꾸었다.

새 번호로 갈아타자마자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는 "이걸 왜 이제야 했지?"라며 무릎을 쳤다.

매일 수십 통씩 날아오던 스팸전화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변화였다.


이전 연락처 목록을 훑어보다 문득 떠오르던 지인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SNS에서 살가운 안부와 '좋아요'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좋은 시간 돼요"

나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고,

그녀가 던져준 마지막 퍼즐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동안 나는 그녀와의 만남 뒤에 남겨진 미스터리한 퍼즐조각들에 당혹해하며

어떻게든 나 보기 좋은 그림으로 빈칸을 메우려 애써왔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퍼즐을 맞춰 보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더 빨리 SNS를 정리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을 조금만 더 일찍 손에 넣었더라면..."


가상의 세계를 폭파했을 때 파괴될 것은 허수뿐이었고,

어떤 참사가 벌어질까 우려했던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제라도 발자국만 찍어대던 헛수고를 멈추고,

인생을 허비하던 허수와 허세를 걷어낸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목적지는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SNS만 벗어나면 더 넓고 깊은 세상이 기다릴 거라 믿었던

그 믿음 자체가 거대한 허상이었던걸까?

"허수를 걷어 내면, 실수가 드러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나는 갈 곳을 잠시 잊은 것이 아니라,

갈 곳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인 듯 했다.


ARIARIA (아리아리아) | Sometimes, Lost (때때로, 길 잃은) | Mixed media on paper | 420X297mm | 2012–13

IMG_2074.jpg 워런 버핏의 평생 동업자이자 버크셔 해서웨이의 부회장이었던 찰리 멍거(Charlie Munger) 2022년 데일리 저널(Daily Journal) 연례 주주총회의 문답세션 중

“The hell with the pretentious expenditure."
허세 가득한 소비(pretentious expenditure)는 집어치우세요.

"The world is not driven by greed. It's driven by envy."
세상은 탐욕이 아니라 질투에 의해 움직입니다.

-찰리 멍거(Charlie Munger)-
*찰리 멍거 :
2023년 11월 별세 당시 약 26억 달러(한화 약 3조 4,000억 원)의 재산을 보유했던 억만장자.
1996년 당시 보유했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의 약 75% 이상을 이미 팔거나 기부.
만약 그가 주식을 팔지 않고 그대로 보유했다면,
그의 재산은 100억 달러(약 13조 원)를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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