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하는 글쓰기
나에겐 우선 그 자리를 벗어나 새롭게 나아갈 목적지가 필요했다.
그간 SNS의 피드 속에서만 들여다보던 여행지를 나의 임시 대피소로 삼았고,
그제야 맴돌던 자리에서 경로를 이탈할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우선 대피소에 다녀온 뒤에 정하기로 했다.
이전처럼 무작정 발자국을 찍어내는 방식이 아닌 다른 소통 방식이라면 뭐든 좋았다.
에세이든 노블이든 시나리오든...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세우고 싶었다.
지나온 길을 되짚으며 맴도는 공허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글쓰기 이정표는 좀처럼 잘 세워지지 않았다.
빈 문서 창을 닫고 이불속으로 숨어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그냥 기억나는 걸 모조리 옮겨 적어 보자'는 심산으로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부담을 덜어내고자,
작가라는 선언처럼 엄숙함이 느껴지는 기존의 텍스트창 대신,
SNS처럼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브런치' 창을 열었다.
-브런치에는 글을 비공개로 담아둘 수 있는 ‘서랍’ 기능이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공항에 도착하는 시점부터 적어 내려갔다.
적다 보니, 공항으로 출발하던 때가 떠올라 거슬러 올라가 다시 적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항공권을 급하게 예매하던 순간이,
여행 짐을 꾸리던 시간이,
캐리어를 주문하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나의 글쓰기는 날마다 과거로 뒷걸음치며 후진만 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전진시켜 보고자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물 건너간 이야기는 모두 건너뛰고,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으로 억지로 데려다 놓았다.
그제야 비로소 글이 진전된 듯 보였다.
하지만 여행의 감흥은 하루가 다르게 흐릿해져 갔다.
뚝뚝 끊긴 필름을 선명하게 돌리기 위해,
사건 경위서를 쓰듯 떠오르는 것은 낱낱이 미주알고주알 쏟아냈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은 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마음이 급해질수록 글은 같은 곳을 맴돌며 정체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구멍 난 사이사이를 가상의 이야기로 메워볼까."
그렇게 선택한 돌파구가 영화 시나리오 글쓰기 워크숍이었다.
평소 영화를 즐겨봤던 데다,
난독증이 심할 때에도 희곡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혔던 기억이 나를 부추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나리오 글쓰기의 관문은 혹독했다.
10주 동안 시나리오는커녕 전 단계인 시놉시스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워크숍 종강 날을 맞이해 버렸다.
미련이 남아 다음 날 혼자 카페에 앉아
강사님과 수강생들의 조언을 받아 적은 메모를 들여다보았지만,
꽉 막힌 벽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까지 온 힘을 다했던 열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결국 글쓰기는 중단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니?
재능도 열정도 없는 상태에서, 또다시 무언갈 시작하려 하다니..."
그렇게 나는 다시 익숙하고도 뼈아픈 자책과 검열의 모드로 침잠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