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아리아 May 19. 2023

나의 ‘이니셰린’에 대하여..

절교 그리고 실존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하여…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주인공 콜름은 오랜 친구 파우릭에게 더 이상 친구를 하지 않겠다고 절교선언을 한다.


난 이 영화를 두어 달 전쯤에 극장에서 한 친구와 함께 봤다.

그 날 극장 안이 조금 춥다 싶었는데,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오한이 오기 시작 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너무 흥미로워 포기 할 수가 없던 나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덜덜 떠는 몸을 다잡으며 보았다.

하지만 그걸 눈치 챘는지, 친구는 영화를 보는 중간에 자신의 외투와 목도리까지 다 걸쳐주며 곁에서 세심하게 날 챙겨주었고 영화가 끝나고도 인상 한번 찌푸린적 없이 내 안위를 챙겨주었다.

그 시간으로 인해 나는 그 친구에게  더 깊은 우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급속도로 더 가까워지기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그 절교 영화를 함께 보았던 친구에게 영화와 같은 이유로 절교 선언을 했다.

나는 그 친구로 인해 아팠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아서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구구절절 긴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이해하겠어?”

내 물음에


친구는 답했다.

“그러니까 대충 넌 더 이상 나와 산책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전시를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지 않겠다는.. 그런 거 잖아?“


그다지 긴 시간 자주 보던 사이도 아닌데,

‘관계의 허무함을 논했던 관계’라 그런가

의미가 좀 남다르다


이 나이에 절교라니…

절교로 인한 멘붕에 빠져 살고 있다니...

내가 당췌 뭘 했고,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근래 <닥터스트레인지>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 ‘멀티버스’란 소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세상이 그래서 그런지,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지..

비단 나에게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다시 환기되는 듯하다.


영미문학을 전공하신 영어 교사셨던 외삼촌은 아버지가 없는 우리 집에 종종 들러 나와 동생들을 챙기곤 하셨다.

그런 삼촌이 나 학창 시절, 우리 집 근처 대학의 교육 연수 때문에 며칠 우리 집에 머문 적이 있으셨는데,

그때 삼촌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브로드웨이 연극 녹음테이프를 매일 듣고 계셨고

나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고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고도’는 마치 ‘호밀밭파수꾼’보다 한 단계 진화해야 알아낼 수 있는 더 ‘고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삼촌에게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하였고, 삼촌은 서머싯 모옴의 ‘더 서밍 업’을 추천해 주셨다.

제목으로나 표지로나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책이라 대충 읽은 척 넘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니었기에,

책을 읽게 되었고 난독증 증세를 겪었음에도 그 자서전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잘도 읽혔다.


어릴 때 삼촌께 선물로 받았던 펄벅의 ‘대지의 딸’과는 어쩐지 사뭇 다른 느낌의 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지의 딸’은 대충 자신의 삶을 주도해 가는 당찬 여성상을 그린 작품이라 한다. 난 지금까지도 그 작품은 읽지 않았는데,

대신에 학창 시절 난 삼촌이 놓고 가서 구석탱이에 꽂혀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란 책을 읽었다.

그 작품은 여성 주인공이 남자에 의해 인생이 망가지는 이야기다.

비슷한 시기에 보았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런저런 것들이 답답해 어제는 우디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를 보았는데

-포스터의 ‘케이트 블란쳇’이라면 블루 한 재스민을 현명하게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젊은 나이에 대학도 중퇴하고 돈 많은 갑부 남자와 결혼했던 여자, 재스민이

알고 보니 사기꾼 바람둥이 남자와 이혼하고 빈털터리로 우울증에 걸리고 미쳐서 브루클린 거리에 나 앉게 되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마치 솜사탕 같이 부풀어 있는 우울한 마음에 강력하게 내리쬔 열기 같았고

덕분에 난 다 녹아 떨어진 설탕물이 된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어제와 오늘 내내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최후의 통첩으로 자른 손가락을 내 던지던 콜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니셰린의 벤시>에서도 어제 보았던 <블루 재스민>에서도,

극 중 누구도 ‘너에게 폭력을 주겠다!”며 가해를 의도한자는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위해 발버둥 치는 가엾은 존재였을 뿐..

아마 어제 봤던 영화 감독 우디앨런도 내게 이러한 허망함을 주려고 의도한 적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나의 허무주의는 더 깊어졌는데…


실존주의 철학가 메를로 퐁튀는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폭력적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폭력과 폭력이 아닌,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이는 내가 전에 5년 동안 채식을 하면서, 주변에 채식주의자(페스코 베지테리언) 선언을 할 당시에 만나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에 설명할 때, 내가 빌어 쓰던 개념이었다-


철학에 무식한 나는 그저

내가 “신은 없어!”라고 외치면서도 ‘간절히 기도를 하는 꼴’이나

“운명은 개척해 나가는 거야!”라고 외치면서도 ‘어젯밤 꿈과 데자뷔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는 꼴’이나,

‘사랑이란 없어 다 조작된 거야”라고 주장하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꼴’에 대해

 ‘실존주의’와 ‘허무주의’란 이름을 붙이는 수준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정반대의 노선인 개념이 어떻게 모든 예술 세계에서 같은 노선을 걸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 삶에서도 엎치락뒤치락 팽배하게 싸우면서도 자리 잡게 된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어쩌면 그것은 마치 내가 길바닥에서 (흔히 말하는 공황증세로) “이렇게 죽는건가?” 싶었던 순간,

눈앞에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밝은 흰색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마치 -아직은 정확히 풀어내긴 어렵지만- 추상의 개념이 환영이 아닌 구상에서 나온 점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이 글의 마무리 짓고 싶은데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여기까지 글을 썼던 내게도, 내 글을 여기까지 다 읽었던 사람들에게 참으로 허무하게도 말이다.

그것은 마치 실존은 허무한  것이고, 허무한 것이 실존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지금은 그저 도대체 내게 이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는 타파해야 할 존재들인가

아니면 인정하고 따라야 할 존재들인가… 다만 나는 그것을 알고 싶을 뿐…


참고로 내가 본 문학 세계 누구도

이것을 뚫고 가지 못했다.

영화<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 여동생 ‘시오반’이 ‘이니셰린’이 유일하게

그 곳을 떠나 원하던 곳으로 향한 인물로 나오지만…

나도 많은 평론가들도 그녀가 행복을 향해 떠난 곳을 ‘죽음’으로 해석하였으니..


*참고로 ‘이니셰린’은 아일리쉬로 ‘아일랜드의 섬’이란 뜻이며,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공간이다.


그냥 나는 머리만 복잡하고

어디에서도 어떤 좋은 결말은 떠오르지가 않는다.


-침고로 어제는 창업 지원 사업 신청에 미선정,

좀 전에 올해 예술인 창작금 지원 결과에서 미선정 됐다는 소식까지 들어버린 하루-


아, 생각해 보니 애초에도 뒤죽박죽이었다.


아, 매일 하는 나 자신과의 잡담도 진절머리가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