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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 Jun 19. 2024

[서울의지형도] 영화의 공간, 영화라는 공간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382호 기고

Korea Mational University of Arts News

서울의 지형도 Topography of Seoul 정기연재


6 영화의 공간, 영화라는 공간 

작은 균열로 공간을 새겨넣기 : <메모리아>(2021)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미지의 소리로 시작하는 <메모리아>는 소리의 정체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소리는 말 그대로 영화의 시작이다. 정지된 듯 보이는 쇼트가 소리보다 먼저 스크린 위로 제시되지만, 이것이 영화의 의도된 시작인 것인지, 상영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시간 안에서 관객이 영화의 작동을 실제로 감각하는 순간은 쿵 소리를 기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놓여있는 이미지 위로 몇십 초의 시간이 지난 후 울려 퍼지는 쿵 소리에 인물이 반응하고, 인물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의문의 해소와 함께 (혹은 이를 통해) 영화의 세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제시카의 일상을 큰 축으로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는 소리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그만의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 공사에 대해 물어보는 후안과의 대화, 주변에서 들려오는 유사한 소리에 반응하는 제시카의 모습, 레코딩룸에서 여러 음원을 재생하며 기억을 되짚어보는 시간. 소리는 먼저 제시카에게 인지된 다음 자신의 주변을 통해 관찰되며, 입으로 말로 몸짓으로 설명되고자 한다. 소리의 기억은 매우 구체적인 지형과 질료의 충돌로 묘사되었다가, 데이터상의 개별 상황과 이름들로 치환되고, 음악으로 재해석되는 등 점차 다양한 양상으로 자신의 생김새를 만들어 나간다. 몇 번의 시도를 지나온 이후, 이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시카는 더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한 듯 이를 무시한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동생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이어간다. 쿵 소리는 여전히 미결의 상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해서 문제가 된다. 도시를 벗어나 작은 마을에서도 끊이지 않는 소리에 병원을 찾아가지만, 제시카는 신경안정제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따라가고, 주의를 집중한다. 소리를 따라 몸을 기울여가며 도착한 곳에서 제시카는 에르난과 조우한다. 에르난과의 대화 속에서 쿵 소리는 또 한 번의 명확한 묘사를 얻는다. 이는 에르난의 기억이며, 우리의 시간보다 앞선 기억이자 진동이라는 것이다. 신체의 접촉을 통한 기억의 공유, 더 나아가 제시카와 에르난의 몸과 공간에 새겨진 진동이 영화의 세계에 공유된다. 그러나 쿵 소리는 한 번 더 자신의 정체를 바꾼다. 수풀에 감추어져 있던 비행물체가 움직이고, 움직임과 쿵 소리가 정확하게 맞물려 떨어진다. 카메라는 비행물체가 남긴 파형이 공기 중에 뚜렷하게 잔존하는 것을 보여주며 쿵 소리가 이와 연결된 것임을 확인시킨다. 소리의 정체가 얼마간 설명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요동치던 집에서의 일이 가능한 세계라면 갑자기 비행 물체가 나타나는 것도 허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열림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영화는 소리에 대한 질문을 되돌려놓는다. 현관에 앉아 머리를 주억거리며 무언가 떨쳐내려고 하는 에르난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쿵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으리라 추측하게 하고, 신비의 정체를 좇아온 두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사실 망상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일련의 장면들은 관객을 다시 해답과 멀어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소리가 취한 생김새는 디제시스와 논디제시스 차원을 아울러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고 에르난의 내부에 고립되어 있다.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는, 더는 소리조차 아닌 것이 된다. 쿵 소리는 완벽한 물질에서 다시 추상으로, 관념으로, 미지의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소리의 근원을 향한 여정. 영화는 하나의 큰 축을 설정해 관객이 따라갈 이야기를 제시하고, 관객은 그에 합당하다고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장면들을 취사하여 논리를 구축한다. 이야기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이러한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말이 되게 할 것’. 내러티브의 진행, 제시카가 거치는 시공간에는 쿵 소리 외에도 다양한 상황과 사건이 들어있다. ‘미지의 소리’ 외에도 영화는 계속해서 자기 안에 새로운 의문을 불러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단 한 번 등장한 제시카의 집 내부의 작은 방은 왜 등장하는 것이며(영화에서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주의를 들여 보여주는 것인지), 주차장의 차들이 덜컥 빛과 경고음을 뿜어낸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동생이 언급한 개의 일 이후로 공터에 앉은 제시카의 뒷모습, 제시카와 인류학자가 함께 앉은 벤치 근처에 들개가 서성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뿐 아니라 꽃 보존 장치에 자금을 보태겠다고 말하기까지 한 에르난은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다른 인물의 생사가 왜 각각의 인물에게 오인되어 있을까? 왜 카메라는 갤러리에 들러 사진을 바라보고 찍는 제시카의 모습을 보여줄까? 에르난이 사라지고 난 뒤 듣게 되는 연주는 에르난이 제시카에게 들려준 곡을 암시하는가? <메모리아>에서 탐색의 범위는 정확하게 제한되어 있다. 설명될 것과 설명되지 않을 것을 영화는 분명하게 정하고, 설명되지 않을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결정과 함께 이어지는 영화의 이미지 저편으로 사라지게 한다. 관객에게 이러한 순간들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혼란스럽고, ‘말이 되지 않는’ 것과 영문 모를 것들의 등장이다. 그러나 영화가 이들을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이는 의문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질문과, 영화의 푸티지로부터 단서를 찾고자 시도하더라도 관객이 이를 서사 내에 직조해 낼 여지는 충분하지 않다. <메모리아>는 설명을 하지 못하는 영화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소리를 모른체 하던 제시카와 마찬가지로 질문하기를 그만둔다. 이 모호한 지점을 영화적인 것으로, 영화적 허용이 발생하는 순간으로 대체한다.


시 영화 안으로 들어와 관객들에게 잊힌 것들을 떠올려본다. 대개 카메라는 가만히 놓여 있었다. <메모리아>의 카메라는 대체로 가만히 서 있다. 종종 인물의 방향을 따라 패닝하고, 카메라를 움직여 쇼트와 쇼트를 몽타주함으로써 상황을 전달하거나, 함께 길을 걸어가고(꽃 보존 장치를 보는 제시카와 에르난을 뒤따라가는 카메라의 핸드헬드), 위치를 바꾸어 다른 각도에서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등의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카메라는 인물과 사건에 관계없이 ‘그곳’을 향해 단지 놓여 있었다. 한 공간을 비추고 있으면 인물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무언가를 살펴보거나 대화한다. 혹은 그 공간을 지나쳐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여러 공간을 프레임 안으로 제시한다. 카페, 도서관, 광장, 동상, 마을 광장, 연구실, 갤러리, 건물의 지하, 길거리, 터널 ……. 이런 공간과 그 위로 놓인 시간을 두고 앞서 언급한 질문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이들에게는 어떤 연관도, 일관도 찾아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다. 관객은 단지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을 보여주는 만큼 충실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충실한 응시 앞에서 카메라가 보여주었던 장면들은 세부의 내용을 지우고 공간 일반으로, ‘그곳’으로 남는다.


두 가지 균열이 영화 안에 자리한다. 소리의 근원은 여전히 미결의 상태이고, 영화가 경유한 곳곳의 공간들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영화는 알 수 없는 대상을 지시하면서도 결국에는 물리적인 공간조차 얻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되게끔 하며, 자신의 세부 내용을 지우고 단지 눈앞에 현전하는 곳으로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공간 일반이 되도록 한다. <메모리아>는 의미가 없는 것과 의미를 모르는 것,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 기억할 것과 잊힐 것들을 교묘히 엮어나간다. 소리가 이름과 형태를 얻음으로써, 카메라가 보여주는 무분별의 공간은 자신의 장소성을 잃음으로써. 그렇게 이들은 무수한 해석이 덧붙여질 수 있는 장소, 공간, 이미지, 서사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단 하나의 영화이기도, 영화라는 공간이기도 하다. 돌 안에 지나간 진동의 흔적이 제시카와 에르난의 신체를 경유하여 현재의 시공간을 일부 점유했던 것처럼, 두 균열은 (미지의) (아무것도 아닌) 영역으로 잠시 영화 내에 자리를 차지한다. <메모리아>는 두 가지의 균열을 해결하지 않으면서도 ‘말이 되도록’ 하라는 전제조건을 잊지 않았다. 때로는 하나의 이름을, 형태를, 시간과 공간을 지닌 채로, 때로는 쇼트를, 씬을, 시퀀스를, 차지한 채로. 여러 성질과 형태를 거쳐 이를 영화라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http://news.karts.ac.kr/?p=1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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