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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L Jun 20. 2018

1100만 원짜리 검진을 하신 환자

진료실 풍경

매일이 전쟁터처럼 바쁘지만 토요일 오전은 특히나 바쁘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차례차례 보다 문득 시계를 보니 11시다.

가장 바쁜 시간대.

62세 남성 초진환자가 내원하였다.  

차트를 쭉 훑어보니 체중은 안 쟀고 혈압은 151/87 mmHg이다.

 혈압은 원칙대로라면 30분 안정 후에 재야 하는데 오시자마자 혈압을 재서

활동 시 혈압이라 다시 재야 할 거 같다.


환자와 부인으로 보이는 보호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는 20초 남짓의  

자투리 시간에 컴퓨터 모니터를 슬쩍 보니 대기환자가 20명!

 게다가 다음 대기환자는 39.2도로 고열이 있고 여러 지병으로 병세가 심한 분이시다.

 "먼저 독감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겠네" 혼자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본다.

 대기환자가 많이 아프신데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인사를 가볍게 나누고 환자 주소를 살펴보니 강동구 주민이다.  

동네 분도 아닌데 무슨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아마도 상담을 잘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오신 모양이다.


 손에는 100페이지 정도로 보이는 두꺼운 책자 같은 검진 자료를 들고 있다. 우선 진료의자에 앉으시게 했다. 62세에 검진 기록을 들고 온 걸 보니 최근 퇴직 직전이거나 여유가 생겨  건강을 챙기려고 맘먹고 온 환자고

토요일에만 내원 가능한 바쁜 분이다.

 중간 정도의 키에 영양상태는 약간 과영양, 운동은 약간 부족해 보인다.

건강은 그 나이 또래의 평균보다 오히려 좋아 보인다.

 체중과 신장 기록이 있으면 좋을 텐데 직원들이 바빴는지 측정은 못했나 보다.


 큰 병은 아니고 관리를 해달라고 온 환자다!



환자를 볼 때 의사는 힐끗 보는 것 같지만 첫인상과 문진에서 에서

경험이 적은 의사도 80%, 경험이 많은 의사는 90% 까지 대략 진단이 가능하다.



"앉으시죠 혈압 다시 재십시다."

 혈압을 다시 재니  138/91 mmHg,  예상대로 경계치 고혈압 (borderline hypertension). 

약한 혈압약으로 치료를 시작하거나 2-3달 생활습관 교정하면서 관찰 가능하다.

정밀 검진을 이미 한 환자로 진찰이 중복이지만 그래도 병원에 온 이상 시진, 청진은 빼놓을 수 없다.

청진을 마치고 병세도 안 묻고 시간 절약을 위해 바로 문진에 들어간다.


”직장이 근처 신가 봐요.”    

“아닙니다. 그.. 제가 원래는 ㅅ...”

“검진 기록을 들고 오셨네요.”

 죄송스럽지만 환자의 말을 끊고 빨리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대화를 잇는다.



 예상대로 1시간 걸려 찾아오신 모양이다.

소개를 받고 오신 분이라면 소개해준 분을 물으면 말이 길어지니 생략하기로 한다.


진료기록을 검토하고 나서 진료를 제대로 보려면 시간도 최소 15분 이상 걸릴 거 같고

지금도 50분이나 기다리셔서 겨우 진료 보는 건데 많이 기다리시는 환자들에게 미안하니 난감하다.


고혈압이나 만성질환자를 한번 보기 시작하면 평생 인연을 맺고 같이 늙어가야 한다.

 우선 평생 인연이 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한다.

큰 병은 아닌 듯하고 다른 의사도 쉽게 볼 수 있는 질환이라 서로 믿고 신뢰하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라포) 형성이 중요한 환자다.


비싼 검진을 받은 걸로 봐서 의심이 많아 신뢰 형성이 어렵지만 한번 신뢰를 쌓으면

 오래가고 진료비 아껴가며 신경 쓸 필요 없어 진료가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서 주기적으로 시간 들여 내원하시기는 시간낭비가 커서 평생

병원에 오셔야 하는데 장기적으로는 내원하시는 데에 불편하실 것으로 판단된다.


내 환자가 아니다. 다른 의사에게 소개하자!

정리가 되자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진료에 임한다.


“이거, 한번 보시죠.” 환자가 검진 자료를 내민다.  

S의료원 1100만 원짜리 검진 보고서 기록이다.

“과체중, 경계치고혈압, 고지혈 , 지방간, 위염 , 약간의 골밀도 저하가 나왔죠? ”

하니 환자분은 검진 기록을 펼쳐서 보면서

"아니, 검진 기록을 언제 봤습니까? 순서도 안 틀리게 말씀하시네."

놀라는 눈치다.

 ”그 정도는 검진을 안 해도 웬만한 의사가 보기만 해도 추정할 수 있는 겁니다.

검진 1100만 원 짜리죠? 저 같으면 3만 5천 원 만 써도 확진해드릴 수 있는 건데요.

그렇게 돈 쓰는 건 아깝네요. 차라리 불우이웃 돕기 한 것만 못하네요.

제가 말한 이외 진단 더 나온 거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관리만 하시면 되는 거니까 여기 시간 내서 다니시기는 너무 멀고

동네 내과에 가셔서 매달 1번씩 건강 상담하신다 생각하고 다니세요.

혈압약은 드시는 게 좋을 거 같고 검진은 좀 더 싼 거루 정기적으로 받으시고...

동네에 다니시던 내과 있으신가요?”

“네”

“S의료원에서 주치료하기에는 병세가 경합니다. 계속 관리하시려면 그리 가시는 게 좋겠네요.”

환자가 끄덕끄덕한다.

 

진료를 끝내고 고열환자를 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나라에서 의사로 일하는 분들이 새삼 부러워진다.

하루 20명 환자만 봐도 직원 월급을 줄 수 있다면 여유를 갖고 좀 더 세심히 진찰해드릴 수 있을 텐데.

진료 현장에서는 우선 순위에 따라 불가피하게 의사가 환자를 선택해야 할 수도 있다.


환자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조금은 씁쓸해진다. . .









#애경내과 #신도림역 내과 #구로동 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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