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연극 <크리스천스>를 봤다. 미국의 한 대형 교회 목사가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품어주시는 분' 이라고 설교하며 연극은 시작된다. 이 설교는 교회 내에 갈등을 일으킨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설교하던 부목사는 교회를 나가버리고, 많은 신자가 부목사를 따른다. 어떤 신자는 '내 딸을 죽인 자와 내 딸이 하나님 옆에 같이 있다는 소리냐' 라며 울부짖는다. 목사는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거대한 분' 일 거라고. 장로회는 목사에게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목사의 아내마저 목사를 떠난다.혼자 남은 목사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것인지 흔들린다. 기독교 신앙의 논쟁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는 이 연극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지옥이 뭐길래'.
비슷한 시기에 본 가스파르 코에닉의 소설 <지옥> 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소설 속 지옥은 우화에 가깝다. 자본주의가 끝까지 가면 어떤 모습일 줄 알아? 그게 바로 지옥이야! 라고 저자는 외친다. 끊임없이 소비하지만 만족할 수 없고, 체제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 목적지마저 잃어버린 채 컨베이어 벨트를 도는 게 바로 지옥이라고, 자본주의의 미래라고. 반면 소설 속 천국은 자본주의의 반대, 원시사회처럼 그려진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인류 역사가 발전해온 과정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로 보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다들 <월든> 처럼 살자고 하는 걸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다. 그런 나에게 <크리스천스>의 논쟁이나 <지옥>의 묘사는 둘 다 허무하게 느껴진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렇게 피곤한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고작 80년 사는 인간을 영원히 지켜보는 시스템 말이다. 왜 인간을 만들어 부조리와 고통 속에 짧게 살게 하고, 죽은 뒤에 영원히 돌보는가? 그럴 에너지가 있으면 현실 사회의 부조리나 좀 없애주시지... 소설 <지옥>에서 묘사하는 지옥을 유지하는 에너지 정도면 지상에 낙원을 만들고도 남지 않았을까. 어떤 영화가 본편이 10분인데 에필로그가 영원히 나온다고 상상을 해봐라. 감독이 정상으로 보이는지.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옥이란 '내 딸을 죽인 자가 죽은 뒤에라도 벌을 받길 바라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왔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경제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옥>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 존재하던 왕정국가나 신정국가, 전근대국가에 비해 자본주의가 특별히 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인권이 내려갔는가? 원시사회가 이상향이라고 하면, 법도 원칙도 없는 원시사회에서 힘이 강한 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70억 인구가 현 시점에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이 가능은 한가.
작년에 유튜브에서 인상적인 영상을 봤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미국판 같은 느낌이 드는 다큐였는데, 스노우보드 선수로 부와 명성을 이룬 남자가 미국 산골짜기에 자신만의 집을 짓고 개와 둘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진짜 자연인이구나 하면서 보다가, 나중에 하나씩 나오는 정보에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아내도 있었고 아이들도 둘이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도시에서 살다가 가끔 아빠를 만나러 왔다. 아빠는 산 전체를 소유하고 겨울에는 그 산에서 스노우보드를 탔다. 찐 부자 자연인. 미국 정도 되면 <월든> 도 저런 스케일로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옥> 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이 일종의 '미국 자연인'처럼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당장 한 끼도 먹을 게 없는 9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해보라. <월든> 같은 소리가 나올는지.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아마 천국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