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1955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주민등록은 1956년으로 되어있다. 어렸을 때 자꾸 경기를 일으켜 외할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미룬 때문이다. 세상 문을 늦게 두드릴 만큼 연약했던 그녀는 나이를 먹으며 또래보다 키 크고 머리 좋은 아이로 자랐다. 중학생 시절엔 교내 핸드볼부 활동을 했는데, 도내 대회에 나가 입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3남 3녀 중 두 번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둘째 오빠를 유독 좋아했다. 둘째 오빠는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해 집안을 일으킬 사람이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젊은 나이에 자전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어머니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동생과 비교당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큰 오빠는 먼 시골로 낙향을 했다. 둘째 오빠를 많이 따르던 셋째 오빠는 한참을 방황하다 사업을 한답시고 집을 날려 먹었다. 집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딸을 고등학교 보내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중학교를 마친 뒤 부천에 있는 전자회사에 취직했다. 처음엔 말단 사원이었으나 금세 능력을 인정받아 스무 살 무렵 공장 내 총반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생산량을 조절하는 일을 야무지게 해냈다. 20대 중반이 되었을 땐 관리직을 제안받았다.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즈음 집에서는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하라고 성화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추천하는 선자리에 몇 번 나갔다가 어느 날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한 시간 늦게 약속된 장소로 왔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술에 취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나는 집안을 일으켜야 되는 사람이라 부자와 결혼해야 된다. 당신 집은 돈이 많습니까?
이 터무니없는 말에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부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가진 능력으로 열심히 살면 한 만큼 살 겁니다.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사람이 처덕 볼 생각이나 하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미안합니다.
그렇게 무례했는데 인연이 이어진 건 놀랍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아버지가 빠르게 사과를 했던 게 유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어머니는 훗날 이렇게 소회를 풀곤 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둘째 오빠를 꼭 닮아 마음에 들었다고. 역시 남자는 얼굴이다. 당신이 박보검을 닮았다면 첫 만남에 돈 많냐고 물어도 인연이 될 것이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니 우리 따지지 말자.
할아버지는 아들이 선을 봤다는 이 아가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두 사람이 두어 번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담판을 보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어 하던 어머니에게 결혼만 하면 그것을 차려주겠다며 선심성 공약을 했다. 물론 여느 공약이 그렇듯 할아버지의 공약도 가짜였다.
아버지는 4남 1녀 집안의 두 번째 아들이었는데,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이 없다시피 해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위암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할머니가 옷 장사를 해서 몇 푼이나마 돈을 벌었고 아버지는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매우 바빴다.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병시중과 시동생들을 도맡았다. 당시 시동생들은 고등학생, 중학생, 국민학생들이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시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그 사이 태어난 나와 내 동생을 돌보았던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짐작을 하기 어렵다.
7년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들이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면 안 된다고, 학교는 서울에서 보내자고 우겼다.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며느리가 반란을 일으키니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할머니는 몸져누우셨고 아버지도 반대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가출해 이모 집으로 가서 2주일을 버텼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러 찾아왔지만 서울로 가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선언만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내친김에 이모에게 돈을 빌려 서울에 단칸방을 얻었다. 이쯤 되니 아버지도 어머니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 내 동생. 4인 가족의 단칸방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업을 한다고는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던 아버지는 서울 단칸방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일에 진지해졌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린 뒤엔 생활이 점점 좋아졌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엔 방 세 개짜리 우리 집도 생겼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묵묵히 주변을 챙기고 지켜냈다.
자신의 욕망을 잊은 채 가족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온 어머니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나와 내 동생이 대학을 간 뒤의 일이다. 어머니는 숙제가 끝났으니 내 할 일을 해야겠다고 선언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등학교를 마치고, 방통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3개의 산업기사를 포함한 6 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계시다. 얼마 전엔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러 가셨는데 주행 시험 도중 금을 밟았다며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내 삶을 돌아보곤 한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부끄럽게 살기는 힘든 일이다. 참으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