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서울에 온 건 일곱 살 무렵이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쭉 그곳에서 살았는데,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어머니의 고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억지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2층 단독주택의 반지하층, 그중에서도 건물 뒤편에 따로 입구가 있는 단칸방을 얻었다. 그 방은 정말 작아서 네 명이 누웠을 때 서로의 어깨가 닿지 않으면 잘 수 없는 곳이었다. 아마도 주인집의 식모가 쓰도록 만들어진 방이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다 보면 연탄가스를 마신 정도의 사건은 추억거리도 되지 못한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매일 바삐 일했고 어머니는 부업을 시작했다. 나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아직 어린 동생은 적응을 못해 매일 울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부천에서 살 때만 해도 나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찧고 까불고 다치고 떠들고 해도 할머니가 오냐오냐 받아주셨으니까. 그런데 서울에 오니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가 없어졌다. 조금만 뛰면 - 뛸만한 공간도 없었다는 게 웃기긴 한데 - 주인집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몇 번 혼나고 부모님이 주인집 눈치 보는 것을 본 뒤 나는 빠르게 활기를 잃어갔다. 마침 주인집 아들이 나와 같은 나이라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나도 자연스레 그 녀석의 눈치를 보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생활도 재미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매일 집을 나와 동네에 있는 도서관엘 가기 시작했다. 도망갈 만한 곳이 책 속 밖에 없었다. 어렵게 느껴지는 책들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자존감을 회복했다. 이문열의 삼국지가 그즈음 출간됐는데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먼 나라 이웃나라, 수호지, 초한지, 그 외 눈에 보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친구는? 없었다.
처음 내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3학년 때였다. 요즘 말로 하면 왕따 같은 것을 당하고 있다는 자각을 그때 처음 했다. 한참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너무 더럽다는 게 문제였다. 당시 나는 옷이 추리닝 두 벌과 겨울 외투 하나 있는,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아이였다. 당연히 냄새가 났고 애들은 날 피하고. 피하다 어느 날은 놀리게 되고. 함께 놀리니 더 재밌어서 모두가 놀리게 되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에 대한 놀림은 집요하지 않았다. 같은 반에 소아마비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형석이였다. 애들은 형석이의 바지를 벗겨버리거나, 똥을 먹이거나, 도시락을 엎거나, 책을 찢는 등의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형석이가 분노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 비틀대며 쫓아가면 그 모습이 또 구경거리가 되었다. 내가 괴롭힘을 당할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내가 힘이 세다면, 키도 크고 집도 잘 살고 싸움도 잘한다면 저런 못된 녀석들 다 혼내줄 텐데. 형석이를 못 괴롭히게 할 텐데. 그런데 그런 상상은 한 번도 현실이 되지 못했다. 한 번은 앞에 나서서 괴롭힘을 주도하던 아이와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었으나 그것을 내밀지도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는 이유로 더 맞기만 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도서관으로 도피를 하곤 했다. 적어도 책 속에서는 누군가를 때려주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은 내게 참 소중하다. 그때 가진 생각과 고민들이 지금의 내 안에 조금은 남아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싸우고 증오하고 혹은 자신을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 나는 외로웠다. 학교는 어린아이가 혼자 치르기엔 너무 힘든 전투를 강요했고 도피는 도피일 뿐 현실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 속에서 홀로, 어렵게 버텼다.
하지만 힘든 날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집의 경제 상황이 좋아지고 내가 키가 크면서 괴롭힘은 슬슬 없어졌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게 부끄럽다는 자각이 생긴 뒤엔 옷도 좀 사고, 같이 하교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책을 많이 읽어서 또래보다 말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말빨을 살려서 5학년 때는 반장도 해보았다. 수서지구 택지 부정 사건을 예로 들며 청렴한 반장이 되겠습니다-라고 일장연설을 했는데, 말을 끝낸 뒤 애들의 벙찐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게 닥친 어둠은 걷혔지만, 형석이에 대한 죄책감은 그 뒤로도 오래 남았다. 다시 같은 반이 되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형석이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달리곤 했다. 때론 바지가 없었고 때론 누군가를 때리려고 필사적이었다. 아이들에겐 형석이의 절규가 여전히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그때마다 나는, ‘저걸 구경하지는 않을 거야. 저런 걸 보며 웃지는 않을 거야’라고 다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훗날 어른이 되어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어린이 재단에 기부를 시작했다. 그 기부는 일종의 채무 상환이었다. 함께 전투를 치르다 뒤에 홀로 남겨 놓고 온 형석이에게 쓰는 반성문이었다. 물론 내 작은 기부가 바꿀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은 잘 안다. 나는 그저 이 땅의 또 다른 형석이들이 겪을 전투가 과거보단 나은 것이기를 바랐다. 형석이가 바지가 벗겨진 채 복도를 뛸 때 그것을 잡아줄 파수꾼이 있기를 바랐다.
부디 그렇기를 바란다. 지금도,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