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떼부자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내 의지나 능력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존재의 도움으로. 이 이야기는 2012년에 시작된다.
당시 나는 모 드라마의 조연출로 일하고 있었다. 조연출이 다 그렇지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다. 문제의 그날도 세 시간쯤 자고 어렵게 일어났는데, 잠은 깼지만 몸이 매우 무거웠다. 시끄러운 알람을 뿜어내고 있는 시계를 멈추려고 했는데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돌릴 수가 없었다. 아놔 8시까지 단역 오디션 세팅해야 되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인가?
한참을 끙끙거린 뒤에야 시계를 멈출 수 있었다. 아침 7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을 비추는 건 좋았는데,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어제 창문을 안 닫고 잤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어서 창문은 대체로 닫혀 있었다. 방범창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안전하다고도 할 수 없어서 나는 약간 긴장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책상 위에 놓인 지갑과 꼬깃 뭉친 지폐 두장이 그대로 있었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책상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만 해도 없던 것이 보였다. 침대 머리맡에 보라색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있던 것이다. 책상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색깔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저 포스트잇을 언제 저기다 붙였는지 기억이 없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트코인사'
아, 이쯤에서 이 얘기가 구라가 아닌가 의심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근데 정말 구라 아니다. 레알 트루 팩트다. 진짜 그렇게 쓰여있었다. 2012년 어느 가을에 내 방에서 발견한 포스트잇에, 비트코인사,라고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비트코인이 뭔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공포에 떨었다. 아 씨 내가 이제 몽유병이 생겼구나. 드라마 조연출 몇 년 차에 내 머리에 문제가 생겼구나! 내가 바보가 됐구나... ㅠ.,ㅠ 그리곤 그 보라색 포스트잇을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슝- 골인. 끝.
그 뒤 비트코인에 대해 다시 듣게 된 건 2017년이었다. 7월 경 드라마가 끝나고 긴 휴가를 맞았다. 혼자 여행도 다녀오고 사람들도 만나고 다니는데, 정말 투자와는 아무 관계없는 평범한 친구들이 다들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두 배를 먹었구... 블록체인 기술이 어쩌구... 미래에 이게 어떻게 되구... 환전이 없어지고 만국 공통 화폐가 되네 마네... 그런 얘기를 한심한 눈으로 듣다가 갑자기 2012년의 일이 떠올랐다. 엥? 그때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었는데? 비트코인사. 비. 트. 코. 인. 사. 그게 설마 이거였나!!!???
그때에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그널>에서 범인을 간절히 잡으려고 하면 미래에서 답을 알려주잖아...! 어쩌면 2012년의 그 쪽지는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낸 커닝 페이퍼 같은 게 아닐까? 미래의 내가 과거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회를 얻었는데, 거기에 딱 다섯 글자만 써서 보내라고 제약이 있었다면? 그래서 비트코인사,라고 적었다면? 내가 가위눌려있던 그 시간에 미래의 내가 과거의 몸에 들어와서 앞으로 3대가 먹고살 수 있는, 떼부자가 될 수 있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의 단어를 적어놓고 간 것이라면? 2012년의 내가 바보 같아서 그때의 기회를 날려먹은 거였다면? 이미 많이 올랐지만... 혹시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면?!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미래에서 답을 알려줬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10배 넘게 올랐지만, 쫄보라 두려웠지만 그러면 어떠랴, 운명이 나를 인도하는데? 왜 진작 사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나는 전재산을 털어 비트코인을 샀다. 2017년 7월의 일이었다.
... 그래서 떼부자가 됐냐고? 3대가 먹고살 수 있게 됐냐고?
나는 지금 한남동 고급 주택 펜트하우스에서 우아하게 한강 뷰를 보며 최고급 원두로 만든 아이스 카페 라테를 마시고 맥북 프로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로 이 글이 마무리된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 아니 근데 진짜 억울한 게, 첨엔 진짜 대박 나는 줄 알았다니까? 10월인가에 원금이 두 배가 됐다. 두 배 먹었으니 딱 뺐지. 근데 그게 2주일인가 지나니까 세 배가 되는 거다. 눈이 안 뒤집히겠나, 가만히 2주만 참았으면 버는 돈이 얼만데? 그래서 기존에 뺐던 돈에 추가 실탄을 더해서 다시 들어갔고... 뭐... 그랬단 얘기다. 원금을 건졌네 마네... 하는 얘기는 가슴 아프니 넣어 두자...
결론적으로 미래의 내가 보낸 다섯 글자의 메시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커닝을 해도 오답을 베끼는 애들이 꼭 있더라. 내가 그랬다. ^^ 정답을 미리 봤지만, 다른 질문에다 그 답을 써냈다. 그 뒤로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과거의 나에게 다섯 글자를 보낸다면 어떤 메시지를 보낼지. 만약 나에게 같은 기회가 다시 온다면, '비트코인사'라고는 보내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절대효도해' 같은 걸 써서 보내지 않을까. 네가 부모님을 사랑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너는 되게 많은 후회를 하게 된다고. 그런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당신에게 과거로 다섯 글자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당신은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최고의 다섯 글자를 한 번 고민해보자. 그리고 그 다섯 글자를 - 일단은 보낼 방법이 없으니까 - 현재의 자신 안에 깊이 보관해두면 어떨까. 혹시 아나, 미래에 진짜 그 글자들을 과거로 보낼 수 있게 될지. 혹은, 현재에 품은 그 다섯 글자로 미래가 달라질지 말이다.
아,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이 글에는 팩트만 적었다. 비트코인사. 정말 그렇게 적혀있었다. 근데 팩트 중에 좀 헷갈리는 것들이 있는데... 비트코인 투자하려면 은행가서 환전하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