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 쓰기
2019년 6월의 마지막 날,
1.
주말이었지만 웬일인지 생각보다 빨리 눈이 떠졌다. 요즘 도통 늦잠이란 게 오지 않는 모양이다. 눈을 뜨자마자는 S님께 받은 푸글렌 원두를 갈고 아이스로 내려 마셨다. 처음엔 과일의 상큼함이, 끝에는 단맛이 길게 남는 원두였다. 받은지 벌써 2주일이 되어 가지만 이제서야 처음 내릴 수 있었다. 그동안 집에서 커피를 내려마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2.
방의 구조를 바꿨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창문 쪽에 붙어있던 긴 책상을 방 한가운데 두고 소파를 창가 쪽으로 배치했다. 큰 가구들을 옮기니 그 밑에 있던 먼지들이 인사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씻어내겠다는 마음으로 대청소를 시작했다. 집 앞의 공사장은 소음만 성가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래도 많이 날라오더라. 구석구석에 공사장 모래가 한가득이었다. 부엌의 기름때와 화장실의 물때도 제거했다. 다 치우고 나서는 담배를 피우며 모든 것들을 연기에 날려보냈다.
3.
파마를 한 탓에 머리를 감지 못한다. 그래서 나가지 말까 하다가 집에만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씻고 나갔다. 안국역에서 내려 한 바퀴를 삥 돌고 학고재 갤러리에 갔다. 프랑수아 모를레의 테이블이 중심에서 3도 회전되기 전 중앙값 90도 표시에서 10초간 머물렀다. 진실은 90도인데 내가 삐딱한 걸 수도 있겠구나. 두 걸음 옮겨 또 다시 모를레의 선들로 이루어진 작품 앞에 멈춰 섰다. 무수한 선들을 보며, 또 우연히 그어진 선들을 보며. 예전엔 우연이란 단어를 좋아했는데 우연이 참 거지같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우연이 대체 무어길래 캔버스 세계를 휘젓는건지. 알렉산더 칼더의 별자리, 선과 선이 만나 면을 이루고 어떤 선을 만나느냐에 따라 색이 변한다. 역시 거지 같다. 스페이스2에서는 김호득 작가의 작품밖에 기억이 안 난다. 밤바다. 서서히 그러나 힘 있게. 스며든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4.
삼청동 길을 쭉 따라 언덕까지 올라가고 다시 북촌쪽으로 내려왔다. 일본의 누가 일본에는 언덕이 많아서 꼭 일본에 오면 다른 나라에서 느끼지 못하는 언덕의 묘미를 즐겨보라고 했는데, 웃기지 말라고 해라. 고요한 동네를 지나 그린마일 커피에 도착했다. 시끄러웠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키고 얼마 전에 산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다시 도쿄를 가게 되면 책에 소개된 곳들을,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꼭 가리라.
5.
이사하고 나서 사야지 사야지하고 이제까지도 사지 못한 핸드소프를 사러 무인양품에 갔다. 가는 길에 인사동길을 옆을 따라 쭉 걸었다. 익숙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득문득 시선이 닿는 곳들도 있었다. 더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더웠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다행히도 터지기 전에 매장에 도착했고, 핸드소프와 과자를 쥐고 나왔다. 다다미가 세일 중이어서 살까 하다가 잠시 머뭇거리고 놓고 나왔다. 할인은 11일까지니까 조금만 더 고민해봐야겠다.
6.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조금 더 돌아 찐풍물시장을 보고 왔다. 더 들어가면 노포 중의 노포인 곳들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굳이 막걸리를 먹고 싶진 않았다. 중고물품의 냄새와 아재, 담배냄새, 술냄새가 섞여있는 곳이었다. 이런 곳을 지나 오니 나라도 우아하게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한 병 샀다. 안주는 감바스가 좋을 것 같다. 끓어오르는 더럽고 저렴한 생각들은 우아하게 대해주어야겠다. 나도 똑같아지면 안 되니까. 갑자기 학고재에서의 인트로말이 기억난다. 사실 혹은 진실은 대체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 주말의 마지막이자 6월의 마지막 날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