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스페인 9편> 카탈루냐의 정체성 1부
* 사라고사: 피에드라 다리에서 바라본 필라르 성모 대성당과 라세오 성당. 피에드라 다리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임. 강 건너 왼쪽이 라세오 성당, 오른쪽이 필라르 성모 대성당임.
ps. 이전편이 분량이 많아 수정재작성 했음!!!
<재미난 스페인 9편>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1부
이전 글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체성의 시초는 서기 801년,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고,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를 전부 다 차지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어인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 영토까지 욕심을 내게 된다. 당시 프랑스 지역은 프랑크 왕국이 있었고,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했다.
결국 732년에 프랑크 왕국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투르와 푸아티 지역에서 크게 전투가 벌어졌다. 투르-푸아티 전투에서 프랑크군은 무어인들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때 사령관이 카를 마르텔이었다. 이후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이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도 이슬람 세력은 지속적으로 피레네 지역을 위협했다. 계속된 전투 중에 영웅도 출현하고, 그런 영웅을 드높이는 서사시도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서사시가 바로 <롤랑의 노래>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의 영웅담을 담은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영웅 서사시로 불린다. 실제로 <롤랑의 노래>는 778년,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바르셀로나대성당: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와는 다른 성당이다.
8세기가 가고, 9세기로 넘어왔다. 801년 4월이었다. 이 당시도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루트비히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바르셀로나는 약 80년간 지속된 이슬람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피레네산맥과 인접해 있는 이베리아반도 동북쪽, 칸타브리카산맥이 있는 서북쪽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거나 비교적 짧게 받게 된다.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수도였으니, 700년 이상 아랍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몇백 년 동안 지배를 받은 곳과 불과 몇십 년 정도만 받은 곳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이슬람 통치 기간의 차이도 카탈루냐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변경 지역이 되었다. 이 변경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베라라는 사람이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라고 불리는 에스파냐 변경령의 시초다. 이런 역사적 형성과정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크 왕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탈루냐어가 프랑스어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카롤링거 왕조는 바르셀로나 이외에도 여러 곳에 백작령을 두었다. 백작령들은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들이 이슬람 군대의 북상을 막아주는 완충지 역할을 했다. 프랑스 본토에 대한 이슬람 군대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에스파냐 변경령은 말 그대로 변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정치군사적인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작령들은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함양해 나갔다. 백작령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더 나아가 멸망했던 10세기경에는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이런 백작령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건 바르셀로나 백작령이었다. 다른 백작령들을 병합해나가며 우두머리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는 중심지로 우뚝서게 되고, 카탈루냐 정체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필라르성모 대성당: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성모 대성당. 앞에 보이는 강이 에브로강이다. 사라고사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수도였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하카(Jaca)라는 도시가 있다. 피레네산맥의 아랫동네라 주위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1035년, 이곳 하카에서 아라곤 왕국이 탄생했다. 아라곤 왕국의 초대왕인 라미로 1세(Ramiro I)는 이웃 나라인 팜플로나 왕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초 3세(Antso III)였다.
안초 3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각각의 영지를 물려받는데 라미로 1세는 아라곤 백작령을 상속받게 됐다. 이에 라미로 1세는 백작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게 된다. 이때가 1035년이었다. 참고로 팜플로나 왕국은 12세기에 나바라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하카의 중심지 뒤로는 피레네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데 방어에 이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외로 진출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지형이다. 필자가 하카 시내를 직접 방문한 후에 느낀 소감이다. 그래서인지 아라곤 왕국은 이후 우에스카(1096년), 사라고사(1118년)로 잇달아 천도하게 된다. 특히 사라고사는 평원지대로 에브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 팜플로나성: 팜플로나 왕국의 아라곤 백작령이 아라곤 왕국의 시초였다.
하카나 우에스카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사라고사(Zaragoza)는 스페인 5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j’는 ‘ㅎ’로 발음되서 하카가 되고, ‘z’는 ‘ㅅ’로 발음되어 사라고사가 됐다.
작은 소국에서 시작한 아라곤 왕국은 1137년에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하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트로닐라와 약혼한다. 당시 페트로닐라는 1살이었다. 누가봐도 정략적인 혼인동맹이다. 실제 결혼은 1150년, 페트로닐라가 14살이 되던 해에 행해진다.
연합 당시에 아라곤보다는 바르셀로나가 더 부유했지만 왕국의 명칭은 아라곤으로 정해진다. 아라곤 연합왕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위치했던 까탈루냐 지방의 정치와 행정은 독자적으로 운영됐고, 14세기 이후로는 카탈루냐 왕자령(principado de Cataluña)으로 불리게 된다.
* 하카성: 하카는 아라곤 지방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하카에는 산 페드로성이라고도 불리는 하카성이 있다. 하카는 아라곤 왕국의 초기 시대 수도였는데 피레네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사진 오른쪽에도 피레네산맥이 보인다.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카스티야 왕국이 버티고 있어서일까? 아라곤 연합왕국은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하나하나 영토를 늘려갔는데 15세기 중반에는 그 범위가 지중해 전체에 이를 정도로 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711년부터 700년 넘게 이어져 온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드디어 1492년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이 물러간 것이다. 레콩키스타의 마침표를 찍은 주역들이 있었는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였다. 두 사람은 1469년 결혼을 했고, 두 왕국은 공동왕국을 이루게 됐다.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공로로 그들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부터 ‘가톨릭 공동왕’이라는 칭호를 선사 받게 됐다.
* 이베리아반도지도: 13세기 초반 지도이다. 당시 남쪽은 이슬람 알모아데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 카탈루냐 지방을 보면 현재의 스페인-프랑스 국경과는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