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git Feb 04. 2022

박물관에서 만난 우주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승려장인전

요즘 내 새 별명을 하나 만든다면 트위터 중독자라고 짓겠다. 끊임없이 글이 올라오고 맘에 드는 사람을 팔로우 하고 하트를 찍는다. 트위터글이 재미있어서 팔로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생긴다. 140자의 짧은 글 안에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옛 물건이나 예술, 식물,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때 너무나 신이난다. 너무 신바람이 나서 댓글을 달다가도 갑자기 소심해져서 “계속 댓글 다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들때도 있다. 

내가 종종 댓글을 다는 기묘님이 맛난 까페를 하나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그 글에 유주얼님도 댓글을 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두 트친이 모두 추천하는 곳이라니, 꼭 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검색을 해보니 마침 용산에 위치한 까페다. 이건 정말 운명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바마셀을 가겠다!”고 트윗댓글을 달았더니 유주얼님이“승려장인전을 추천한다”고 댓글을 올려주셨다. 특히 곧 원래 있던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불상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전시를 보는것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예약을 하고 아침 일찍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사실 코로나 이후로는 처음 박물관에 가는거고 티켓은 온라인으로 샀으니 그냥 들어가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티켓부스에서 티켓을 바꾼 후 들어가야 하는것이었다. 하아.. 시골쥐가 다 되었다. 몇번을 헤매고 티켓을 받고 체온을 재고 큐알을 찍고 입장을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집에서 나올때부터 들어가기 전까지 전시를 보는 내 모습이 더 맘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생각을 하면 엉덩이 떼고 실행!”이라는 올해 목표를 지키고 있다는것이 좋았다. 그래서 승려장인들은 그냥 불심에 가득차서 그림을 그리고 불상을 만드는 분들 정도로 생각했지 박물관에서 내세운 ‘승려장인’이라는 이름에 그닥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석사시절 한학기 배운 한/중/일 예술사 시간을 기억하고 한국의 불상,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을 실제로 보고 느낄수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들어서자 마자  나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걸 깨달았다.   


“손을 씻고 향을 태우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립니다.” 

입구에 이런 말이 써있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다. 내가 그림그리며 느끼는 힘든 마음과 몸의 고통을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뭉근해진 마음으로 한발 더 떼면 위치와 크기가 각기 다른 세개의 원 안에 영상들이 투사된다. 그 시작은 나이가 지긋한 승려장인 한분의 기도로 시작되어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연결된다. 소리, 영상, 공간이 주는 느낌. 세개의 원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싶은건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장인의 마음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영상이었다. 


전시관은 총 4개로 이루어져있다. 전시관은 역사의 모든 걸음을 느껴보라는듯 골목에서 넓은 공간으로 다시 골목으로 이어진다. 모든 전시가 그렇듯 섹션의 초입에는 어떤 기준으로 모둠을 해두었는지를 설명하는 짧은 글들이 있고 그것을 읽고 나서 유물들을 만나면 그냥 유물들을 눈으로 보는것과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첫번째 전시관에서 바로 추천받았던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만났다. 부드러운 눈빛, 자애로운 입술 그리고 아름다운 손. 그리고 그 모든것을 포함한 자세와 아우라. 가장 아름답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신것이겠지만 어쩌면 저런 표현을 작업 장비도 그닥 좋지 않았을텐데 저정도로 해내실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가 않는다. 옷의 주름 하나 눈빛, 손끝, 발. 모든 선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기품이 넘치고 아름답다. 부처님의 손과 눈길에 이것을 만드느라 수고한 승려장인들의 손, 그동안 이 불상을 돌보아온 손, 여러곳에 모셔져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조심스레 운반하고 또 전시한 손길이 느껴졌다. 

커다란 탱화를 보고 또 한번 눈이 똥그래졌다. 그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이 각자의 성격에 따라 모두 다르게, 그리고 그들이 입은 옷의 무늬도 특징적으로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있다. 와 이걸 정말 이렇게까지 잘 해낼일인가? 그때 이런걸 잘 해낼 도구와 염료가 있었단 말인가! 이 일이 승려장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느껴졌다. 일의 무게감도 무게감이지만, 그들에게는 자부심이자 커다란 목표였으리라.




또 재미있는것도 발견했다. 우리가 열받고 답답하면 “아이고 복장 터져! 너 정말! 왜그러냐” 할 때가 있다. 그 복장이 바로 불상안에 넣는 복장을 의미하는것이라고 한다. 복장물을 너무 가득 채워 몸이 닫히지 않는다는 의미였는데 지금 우리는 “아 너 진~짜 답답하다!”의 의미로 쓴다.

복장을 좀 더 설명하자면 후령통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귀한 의미를 지닌 것들을 다섯개의 종류나 색으로 구성해서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 후령통이 부처님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귀한 물건들을 주변으로 꽉 채워 넣는다. 후령통의 후령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한다는데 그 안에는 색실과 천조각들로 모양을 만든것들을 넣었다. 향도 다섯가지, 천도 다섯가지, 각자 넣는 것은 다르지만 예를 갖추어서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종이에 쓴 고대 인도문자 - 아마도 불경이겠지 - 와 기원을 바라는글, 그리고 이 불상을 누가 제작했는지와 이 불상을 만들때 누가 지원을 했는지 그런 분들을 특별히 한번 더 적어주면서 그들의 복을 함께 빈다. 세상이 불심으로 가득차기를, 특별히 많은 공을 쏟은 이들에게 복을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마도 답답하고 복장터지는 느낌은 승려장인분들이 느낀걸수도 있겠다.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만드는 불상에 인간의 욕심과 기대를 한껏 넣고 있는것이 답답하게 보였으려나. 


전시관을 옮겨가며 새로운 기술로 불상의 제작방식이나 복장유물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조금 더 안전하게 정확하게 발견해나가는 학예사들의 노력과 어떤 도구로 어떻게 만들고, 큰 작업을 승려장인들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해냈는지도 설명되어 있었다. 큰 일을 여러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하고, 또 당신들만의 네트웍으로 안될법한 일도 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니 지금과 별다르지 않아 재미있었다. 옛 장인들의 편지를 카톡형식으로 설명해둔 공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 한글로 쓰인 편지는 읽어보며 이게 어떤뜻일까 해석하는 재미도 있다.

불상들도 멋졌지만 나는 몇개의 시리즈로 완성되는 커다란 불화들에 감동받았다. 내가 그림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것일테다.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것이니 정성스러운것은 당연하다. 전체의 구성도 좋고 세세한 표현들도 뛰어나다. 그리다보면 자꾸만 더 디테일하게 자꾸만 더 큰 사이즈로 그리고 싶은 마음은 모두 똑같은가보다.

밑그림과 완성본을 비교해둔것도 재미있다. 밑그림은 밑그림으로만 쓰이기 아까울만큼 디테일하고 완성본의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밑그림에서는 천자락의 흐름과 부드러움이 세세하게 표현이 되었다면, 채색된 완성본에서는 천의 무늬나 색이 더 중요해진다. 나무와 건물의 모습은 사람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특히 지옥을 표현한 부분은 안타깝기도 하고 쌤통처럼 느껴졌다. 화탕지옥이 묘사된 데를 보고는 여기 누구를 보내면 알맞는가 생각했다. 이미 죽은 몇몇과 아직 살아있는 몇몇이 생각났다. 좀 전까지 부처님의 미소를 보고 감동했던 내가, 이 그림에 내적 복수심을 불태우다니. 진짜 하찮은 중생이다. 하지만 그래서 염라대왕님이 있는것 아닌가!

누군가에게 상벌을 주는것을 미물인 내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한획한획 또는 한켜한켜 작업한 작품들처럼 각자의 삶의 방향과 무게, 색과 냄새가 결정되겠지. 가능하면 옳은 방향으로 맑은 색으로 나쁘지 않은 향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탕지옥도 발설지옥에도 가고 싶지않다.  

전시장을 나오기 전, 아주 전통적인 무늬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둔 공간이 있다. 무용가 안은미님이 생각나는 공간인데, 그 화려하고 정신없는 공간에 몇백년전의 부처님들이 찰떡깥이 어울린다. 사이키델릭한 공간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있는 부처님들이라니, 게다가 한 부처님은 자세까지 힙해서 더 맘에 들었다. 이렇게 한 다리는 결가부좌하고 다른 다리를 세우는걸 윤왕좌라고 하는데 이 자세가 정말 좋다. 자세, 표정 모든것이 정말 힙하다. 내가 예전부터 제일 좋아하던 요나라 시대의 “남해의 관음<미국 넬슨앳킨스 미술관 소장>”도 딱 그 자세다. 이게 뭐람? 싶으면서 어머, 이게 뭐람! 하고 웃음지어지는 공간이다. 여기에 둠칫둠칫 음악만 있으면 춤도 출 수 있을것 같다.


전시된 유물들이 너무 좋아서, 전시 기획이 너무 잘되어서 한번만에 다 보고 느끼기엔 아까웠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데까진 한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다리가 아프고 조금 지쳤던것 같은데, 집중하느라 지친줄 몰랐다. 나왔더니 긴장이 확 풀어져서 힘들었다. 체력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리고 몇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부터 선배 예술인들이 자신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감동했고, 감사했고, 안심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냥 이대로 꾸준히 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전시장의 첫 걸음부터 뭉클한 마음이었다. 마치 선배 예술가들이 “짜식, 잘 해오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불안해하냐?”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으로 부처님들을 만나고 선배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단순한 선으로 빠르게 작업하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그릴 수 있을때까진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나는 작업을 하면 할 수록 더 세밀해지고 작업 사이즈도 더 커지고 있어서 팔목과 어깨, 눈이 나빠지는걸 실시간으로 느낀다. 나를 갈아 넣으면 넣을수록 작업의 완성도가 좋아지는걸 느낀다. 작업의 시간이 고행과 수련에 가깝지만 점차로 완성되면서 느껴지는 기쁨과 불안이 좋았다.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해놓고는 다른 작가들이 빠르게 완성하고 매일 인스타그램에 올려놓는 그림들에 조바심이 났다. 

그분들은 어땠을까? 나처럼 기쁨과 불안을 함께 느꼈을까? 아니면 완성에 대한 순수한 기쁨만이 있었을까? 나도 저렇게 커다란 작품을 해볼 수 있을까? 작업에 대한 욕심이 난다. 

어서 빨리 집에가서 그림그리고 싶다. 내 고양이들이 보고싶다. 

그 전에 바마셀에 들러 에스프레소 두잔을 마실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