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완두와 니무라헤이세이이찌고 / 3.13
조그맣고 귀여운 씨앗 구경은 늘렁거리는 재미가 있다. 쌀쌀하지만 햇살이 좋은날에 썬룸의 딱딱한 쇠의자에 앉아 씨앗통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앉아있다가 샥샥 씨앗통을 흔들면 나는 척척 소리는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작물을 제일 튼튼하게 키우는 방법은 직파라고들 하지만, 날씨나 밭 상황에 따라 직파한 씨앗들이 제대로 싹트지 않을수도 있어서 겁이 난다. 나는 농사 실패의 경험이 많아서 만약 올해 제때에 싹이 트지 않으면 올해를 다 버리고 내년에나 재도전할 수 있다는 불안주머니를 명치 살짝 위쪽, 가슴팍보다는 등에 가까운 부분즈음에 항상 묵직하게 넣고다닌다. 그래서 자꾸 이것저것 넉넉히 씨앗을 심고 모종을 추가로 내게된다.
노루뫼밭에는 이미 완두콩들 씨넣기를 했지만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올해는 어짜피 밭도 더 커졌겠다, 이것저것 키워보잔 마음에 껍질까지 먹는 완두를 종묘사에서 추가로 구매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완두들은 수확해서 깍지를 까둔 그대로라 동그랬던 씨앗이 수분이 빠지면서 딱딱해지고 울퉁불퉁해지고 색도 진해졌다. 거기에 주근깨같은 진한색 점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종묘사에서 산 완두봉투를 뜯어보았다. 완두알들은 반짝이는 청록색으로 약품코팅이 되어있다. 더 잘 자라도록 하고 병충해도 줄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것이겠지. 인공적인 색감, 인공적인 펄감. 한눈에 봐도 이거 그냥 먹으면 안돼!를 온몸으로 설명하고 있다. 너무나 강렬한 색감과 인공적인 느낌에 맨손으로 만지기도 부담스럽다.
마당 한쪽에 던져두었던 모종 포트를 들고들어왔다. 몇년전에 인터넷에서 사진만 보고 샀는데 포트 하나가 4x4센티는 되는 커다란 포트가 가로네줄, 세로네줄로 16칸이 한 세트로 붙어있다. 이걸 육묘판이라고 부른다. 집에 왜 있는지 잘 모르겠는 남대문 시장에서 이모들이 밥 배달할때 사용하는 쇠로 된 쟁반위에 육묘판을 놓아본다.두개가 좌우로 놓아지고 아래로 조금 공간이 남는다.
지난해 사다둔 모종용 흙봉투를 꺼내 가위로 자르고 흙을 포트 칸칸마다 넣는다. 스쿱으로 푹 떠서 먼저 수북하게 칸마다 부어주고, 나무스푼으로 모자란 흙을 조심스레 채워넣는다. 쟁반에 물을 왕창 부어 육묘판 아래쪽에 난 구멍으로 물이 흡수될 수 있도록 만들어둔다. 사실 이렇게 천천히 물을 먹여야 하는데, 마음이 급한 나는 위쪽에도 천천히 물을 붓는다. 흙이 가라앉으면 나무 숫가락으로 얼른 흙을 더 떠서 넣는다. 위로 물을 부었더니 쇠쟁반으로 흙가루가 쏟아져 나온다. 쟁반이 지저분해지는것은 아쉽지만 마음이 급하니 어쩔수 없다. 미리미리 했으면 깨끗하고 멋지게 할 수 있었을텐데 이미 이렇게 된거 뭐, 어쩔수없다. 위쪽에 새로 떠넣은 흙들만 말라있어서 압력분무기에 압력을 만들어서 슈우우욱하고 물기를 더해준다. 분무기의 압력덕분에 물방울은 더 고운입자로 뿌려진다. 물에 적셔졌지만 흙이 적당히 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육묘판에 시간을 준다.
왼쪽 포트에는 토종보리완두를 넣고 오른쪽 포트에는 니무라헤이세이이찌고를 넣었다. 토종씨앗은 포트위에 자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넣었지만 종묘사에서 산 씨앗은 핀셋으로 넣었다. 완두콩은 암발아하기때문에 콩의 지름보다 더 깊게 푹 질러넣는다. 콩들을 다 넣고난후 다시 흙을 살짝 덮어주고 한번 더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어두워야 자라는 씨앗이니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는것이다.
이제 오늘의 좋은 기운을 모아서 육묘판 위에 뿌려준다. 다른 농부들은 안하는 이상한 짓이지만 나는 씨앗을 넣고나면 항상 나만의 인사시간을 가진다. “자, 편히 쉬고 씩씩하게 자라렴. 올해 잘 부탁해.” 어짜피 조용한 집에서 혼자 작업하고 있지만 왠지 이런 마법의 농사주문은 혼자서 중얼중얼 작은소리로 해야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암동 언니에게도 완두콩 모종을 나눠주기로 했으니 더 잘 컸으면 좋겠다. 얼른 충분히 물을 마시고 촉을 틔우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