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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Mar 25. 2022

앗!의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돼

그림작업을 마치고 침실로 올라와 침대에 누우려던 순간 엇! 하고 눈앞에 뭔가가 스쳤다. 

새 작업의 구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그림을 그리면 매력있을것 같아! 머릿속에서 눈앞에서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그림수첩에 스케치를 시작한다. 침대 옆 바닥에 있던 작은 수첩을 펼치고 엉덩이를 땅에 붙이지도 못하고 가슴팍과 허벅지와 종아리를 붙인 자세로 쭈구리고 앉아 스케치를 한다. 신나는 기분에 흐흐 웃음을 흘리다가 나도 모르게 스케치북에 침을 뚝 떨어뜨렸다. 헉. 왜, 나는 집중한 상태가 되면 침 컨트롤을 못하는것일까? 하지만 지금 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고양이와 식물의 모습을 잊기전에 그려야 한다. 침을 옷소매와 무릎으로 슥슥 닦고 얼른 스케치를 이어나간다. 어짜피 이 스케치북은 나만 보는거니까. 

스케치를 대략 완성하고나서 보면 별 그림이 아닌것 같이 느껴진다.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그런 그림일 뿐이었는데 왜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그곳의 공기와 색깔과 바람까지 느껴졌던것일까? 이렇게 엇! 하는 스케치를 그리고 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더 그리고 싶고, 단박에 새 캔버스를 꺼내와서 완성하고 싶지만 이걸 오늘밤에 다 그릴수 없다는걸 알고있다. 사실 그것보다도 이걸 실제로 옮겼을때 내 머릿속의 그것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쁨을 발견하고 한껏 즐거워한 후 그것이 희미해져가는것, 그리고 현실에서 내 능력으로 구현했을때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것 그래서 나 자신이 좀 미워지는것까지 이해하는것 모든것이 내 몫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돈오’라고 했던것 같다.

이 ‘앗!’의 순간, 내가 우주 한가운데 있는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아니 그 순간은 찰라의 순간이다. 하지만 눈과 머리가 맑아지며 심장이 두근두근, 아드레날린이 급속도로 뿜어져나오는 찰라 뒤에 찾아오는 현타의 시간은 길다.  내가 캔버스 안에 이 살랑살랑한 바람의 느낌을, 고양이의 깊고 맑은 눈을, 울창한 식물들 사이의 맑고 습한 공기를 표현할 수 있는 만큼 실력이 쌓여있는가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이걸 표현해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급속도로 피곤해지고 마음이 뻥 뚫린듯한 기분이 든다.  

다시 한번 앗!의 순간을 느껴보고 싶어서 작업방으로 내려갔다가 침실로 올라오던 길을 똑같이 걸어본다. 똑같이 침대에 누우려고 해본다. 그리고 스케치를 하는것 처럼 쭈그려 앉아본다. 하지만 그때 그 감각들은 우주 저멀리로 날아가버렸거나 원래 없던듯 소멸해버렸다.

신이 나에게 답지를 살짝 한번 흔들어 보여주고, “자, 봤지? 이제 해봐.” 라고 말하는것 같은 기분이다. 신이시여, 나에게 답지만을 흔들어 욕심나게 해놓고 가는 길은 가시덤불로 만들어두는 이유가 뭡니까? 저에게 가시덤불길을 헤치며 갈 끈기와 용기는 기본옵션으로 주신거겠지요?


식물과 고양이, 종이캔버스에 오일파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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