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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Mar 19. 2022

속도가 나지 않는 날

그림작업 일기

한번도 그림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었지만 결국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림을 너무 사랑했기때문에. 너무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어느날에는 결국 이 일을 싫어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리고 또 그리며 살았다. 

물론 작업으로서의 그림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그림은 확실히 다르다. 슬렁슬렁 그리는 그림이야 기분좋고 신나기만 하면 되는것이지만 작업으로서의 그림은 내가 그리고 싶은것을 그리면서도 그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완성도있게 만들어야 하기때문에 그 압박감이 크다. 더 잘 그리고 싶어서 더 많은 것을 담고싶어서 괴로워진다. 사실 누구에게 의뢰받은것도 아니면서 팔릴지도 안팔릴지도 모르는 그림을 꾸역꾸역 그리고 있는것이다. 

나는 만년필로 그림을 그린다. 물론 아크릴 물감이나 오일파스텔을 쓰기도 하지만, 만년필로 선을 계속 긋고 점을 찍어 그리는 그림이 가장 나답다고 생각한다. 얇은 선을 계속 그어  형태를 만든다. 선들이 모여 고양이의 몸을 만들고 식물을 만들고 숲을 만든다.  


40호 캔버스, 이번작품은 완성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중이다


캔버스가 커져서 더더욱 완성까지의 시간은 더디고 더 잘그리고 싶어서 선을 긋는 횟수는 더 많아진다. 밑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놓고 시작하는 그림이 아니다. 어디에 나무가 있으면 좋을지 고양이가 어떤 자세로 있으면 좋을지, 꼬리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을지는 그리면서 정한다. 작업을 하다가 자칫 만년필을 떨어뜨리거나, 만년필 잉크가 옆으로 번지기라도 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 하다. 여태까지 그려놓은 작업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긴장한 상태로 만년필을 꼭 쥐고 그림을 그린다. 


한땀한땀




오랜만에 작업을 하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새 더 눈이 나빠져서 화판과 만년필과 나의 각도를 계속 조정하면서 집중이 잘되는 각을 찾아본다. 오늘은 다섯시간쯤 작업을 했지만, 그중 한시간은 카펫위에 누워 고양이와 낮잠을 잤다. 눈이 피로하기도 하고, 봄눈이 오고 우중충한 날씨에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선을 그어도 큰 캔버스는 빨리 채워지지 않는다. 오늘도 계속 고양이의 앞가슴을 그렸다. 같은 작업의 반복, 큰 화판을 놓고 편하게 그릴 수 있는 거치대가 없어 이젤에 올렸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리면서 작업을 한다. 남들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인 딱 그만큼 그상태. 그게 오늘 다섯시간, 아니 네시간 작업의 결과다. 나에게 남은것은 더 진해진 고양이의 가슴팍과 손가락과 어깨, 골반의 통증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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