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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작인 May 04. 2022

세상에 노는 사람 하나 없네

방금 전에 심심하다고 했던 말 취소요 취소



휴직 6개월 차, 결국 동네 아줌마들과 친해졌다. 

아이들 등원 길에, 놀이터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다가 한 명 두 명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이제 입주 5년 차에 접어들어 입주 초기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줌마들 무리가 있었는데, 나는 중간에 이사 온 데다가 엊그제까지 워킹맘이어서 주간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처지였던지라 그들과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못 했다. 전업맘은 워킹맘을 따돌린다는 괴소문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내다 보니 그들만의 장벽 같은 건 없었다. 다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고민거리가 비슷했고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애들 이야기만 했지만 점점 갈수록 하는 일이나 집안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한 명 한 명 알아갈수록 놀란 점은, 다들 전업주부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하는 일이 한두 가지씩 있다는 것이었다. 출산하기 전까지는 엊그제의 나처럼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크게 했지만 아이를 낳고 난 뒤로는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서 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해 일하는 엄마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수익을 내는 건 아니라도 내 아이와 남편, 혹은 그 외의 가족을 돌보는데 24시간을 바치는 사람도 있었고, 다양한 의미로 자기 몫을 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상에 노는 사람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회사를 다닐 땐 그냥 휴직하고 놀면 어떨까, 회사 때려치우고 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이 생활로 넘어와보니 나도 '노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주변에도 '노는' 사람은 없었다. 



Photo by JACQUELINE BRANDWAYN on Unsplash



막연하게 회사를 안 가면 노는 건 줄 알았는데 회사 밖을 나와서도 할 일이 무지 많았다. 다양한 분야로 할 일이 많았다. 단순하게 돈을 번다는 측면으로 보자면 돈을 벌 기회가 생각보다 많았고, 돈을 떠나서 흥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한다면 그 길 또한 많아 보였다. 또 가족을 돌보고 살림을 살아내는 측면에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할 일이 무진장 많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정해진 시간을 일하고 그에 정해진 월급을 받고 또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는 게, 때로는 경쟁심과 성취감을 얻는 게 내가 삶을 살아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래서 그 생활을 끊어낼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안 가도 할 일이 많았다. 



종종 회사 동료들이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왔는데 그때마다 심심하긴 한데 또 막상 심심한가 싶었다. 같이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하루 24시간을 꽉 채워서 사는 걸 보면 정말로 심심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같이 떠들면서 스트레스 해소할 기회가 없어서 심심하다고 느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스스로도 심심하다 심심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다 못 해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심심해할 시간에 하기로 한 일이나 잘 하자라고 되뇌게 된다. 



휴직 초기에는 회사 다닐 때만큼 돈을 벌지 못할까 봐, 그만한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할까 봐 불안감이 컸다. 퇴사 후에 마음의 안정을 찾고 더 행복하게 지낸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그냥 현실 도피한 것 아닌가, 정신승리한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약간 있었는데 이젠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 물론 회사를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러한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어차피 돈은 많으나 적으나 더더욱 많이 갖고 싶다 느낄 테고, 사회적 지위 또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할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인간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굳이 이런 욕구를 정복해서 꺾으려고 하기보단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정신수련을 통해 이런 욕구들을 꺾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기본 체제가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정신승리할 자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다음 편에 바로 취소요 취소 퉤퉤퉤 할 수도 있으니 '적어도 지금은'이라고 한정하기로 한다.) 다만, 그것이 없어도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포기할 순 없지만 우선순위는 조금 뒤로 미룰 수 있는 것 아닌가.



Photo by Keegan Houser on Unsplash



휴직을 한 뒤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일상적으로 해내는 무급노동 중에 가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그중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 바로 육아를 비롯한 돌봄노동이고 그 외에 각종 살림을 위한 행위들도 꽤 가치가 높다고 느낀다. 사실 회사를 다닐 때는 우리 애가 어떤 성향인지, 뭘 좋아하는지 하는 것들을 잘 몰랐다. 나는 성격 자체가 무딘 타입인데 아이와 보내는 시간도 부족하고 더군다나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은 볼 기회가 전혀 없으니 우리 애가 사회성은 어떤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어떤 성향이 도드라지는지 등을 알 기회가 없었다. 워킹맘이어도 오늘 하루 어땠는지 일상을 공유하며 아이의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는 둥, 아이의 감정을 어루만져줘야 한다는 둥 여러 전문가의 육아 조언을 들을 때마다 분명 한국말인데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부모가 아이의 사소한 부분까지 잘 몰라도 아이가 잘 클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지라 지금 이렇게 여유가 있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육아 외에도 집안 살림 정리정돈이나 가족여행 계획하기 같은 정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꼭 필요한 무급노동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난리가 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내가 집에 있다고 해서 이런 것까지 혼자 도맡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많)지만 이제 어느 정도 찾아서 하게 된 걸 보니 나름의 재미를 찾은 건지 아님 요령이 생긴 건지 아무튼 적응해나가고 있다. 이럴 때 보면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을 크게 벌여서 대단한 사람이 돼볼까 생각을 했던 시절은 어디 갔나 싶다.(사실 아직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하긴 한다.)



Photo by Volha Flaxeco on Unsplash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인가. 나를 고용한 고용주인가. 고객인가. 아님 나를 둘러싼 사람들인가. 나라고 생각했지만 고용주일 때도, 고객일 때도, 혹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일 때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지분이 가장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삶은 나의 지분이 가장 컸었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체적으로 사는 것인가. 요새는 놀랍게도 '나'를 둘러싼 일차적인 환경부터 나의 요구대로 잘 가꾸고 사는 삶이 가장 주인의식을 갖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노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삶 안에서 절대 놀고 있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아니까 괜찮다고 되뇐다. 



아까 분명 정신승리 안 한다고 했는데 다 쓰고 읽어보니까 결국 정신승리했다. 웃기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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