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작인 May 17. 2023

나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걸까

언제쯤 마음이 편하지는 걸까


5일째 두통과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 목도 아프고 기침도 하고 콧물도 나는 걸 보니 감기 몸살 증상이다. 3일을 타이레놀과 약국 감기약으로 버티다 결국 내과에 가서 약을 타왔다.



남편은 그보다 이틀 앞서 아프기 시작했다. 요새 회사일과 병행하며 새롭게 시작한 박사과정 공부에 치이는 것 같더니만 주말에 여행을 다녀온 뒤로 완전히 앓아누웠다. 진짜 침대에 누워서 꼼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들은 한 달 전부터 약 2주 동안 감기 증상으로 심하게 앓다가 좀 진정되는가 싶더니 다시 새로운 바이러스에 잠식당했다. 한 달 전쯤 동네에 코로나+A형 독감+아데노를 비롯한 각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바람에 동네 놀이터에 파리만 날렸었더란다. 우리 애들은 그때는 상대적으로 적게 앓고 넘어갔는데 2차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들은 꼭 밤이 되면 더 아프다. 낮 동안에는 에너지 넘치게 놀고 장난치고 하다가도 밤만 되면 열이 오르고 생기를 잃는다.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에 아픈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아이들의 열을 체크하고 물수건을 갈아 준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애들이 아픈 적이 잘 없었다. 우리 집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코로나 시절 이후로 애들이 자주 아픈 것 같다. 그건 어쩌면 코로나를 기점으로 직장생활을 관둔 내가 애들한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병간호를 하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어릴 적 아팠을 때도 우리 엄마가 이렇게 보초 섰을까부터 시작해서, 세상 어버이은혜의 감사함에 눈물짓다가 갑자기 내일 회사를 가야 됐더라면 지금 엄청 절망적이겠지 참 다행이다 이런 생각도 들고, 직장 동료들은 지금쯤 잘 지내려나 회사는 여전히 잘 돌아가려나 걱정도 했다가 문득 우리 남편은 지금 애들 열나고 기침하다 토해서 이불빨래 산더미인 것도 모르고 혼자 코 골며 잘 자고 있겠지 흥칫뿡이다 뭐 이런 생각도 스쳐 지나가고.



회사는 안 가지만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라서 내일 스케줄에 어떤 차질이 생길지 미리 생각해 본다. 애들이 학교는 갈 수 있겠지? 등원시키고 나서 거의 회사 출근하듯 안 빼먹는 운동은 내일 하루 그냥 빠질까? 오늘 거의 밤샐 것 같은데. 내일 하루를 충실히 보내고 온 애들이 내일 밤에 또 아플 수도 있으니까 낮에는 쉬는 게 좋겠다. 쇼핑몰 업무는 급하게 해야 될 게 뭐가 있더라. 주말 새 들어온 주문을 미리 정리해 보고 모바일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건 먼저 해뒀다. 그다음 급하게 컴퓨터로 봐야 할 것들은 내일 등원 직후에 하기로 하고. 스튜디오는 새로 꾸민 영역들 사진을 다시 찍어 릴스영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건 잠시 미뤄야겠다. 기존 쇼핑몰 외에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 자사몰 홈페이지는 맨날 머릿속에서만 왔다리갔다리 하는데 오늘도 날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머릿속 저 깊은 곳으로 넣어둔다. 일단 상품 소싱만 조금씩 해두자. 장바구니 클릭클릭. 이런 식으로 하면 애들 물수건 갈아주면서 밤새도록 일하겠다 싶다.



회사를 휴직한 이후로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다. 내 필명 경작인은 끊임없이 씨를 뿌린다는 의미로 지은

것인데 이름에 걸맞게 경제적 수입 측면에 있어서도 숱하게 씨를 뿌려댔다. 그 결과 올해 들어서는 그 결실이 월 300만 원을 넘어섰다 딱히 뭐 하나 이렇다 싶게 수입이 큰 건 없는데 이래저래 모으니까 그렇게 됐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시간은 하루 1-2시간 정도로 회사 다닐 때에 비하면 훨씬 줄었다. 그 대신 틈틈이 짬날 때마다 일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은 맨날 노는 것 같다. 그냥 아침에 눈 떴을 때 잠시 일하고, 운동하러 가기 직전에 잠깐 살펴보고, 애들 하원하러 가기 전에 한 시간 정도 앉아서 뚝딱 거리다가, 또 애들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잠시 살피고. 뭐 하나 특별히 집중해서 빡세게 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뭔가 다 대충대충 하는 것 같은데 이런저런 수입이 모여서 300만 원이 됐다. 올봄에는 갑자기 평일 아침에 꽃놀이 가자며 꼬셔댄 남편 왈 내가 자기랑 드라이브 가는 30분 동안 잡담하면서 핸드폰 몇 번 만지더니 오전 업무 끝! 하는 걸 보고 현타가 오신다 했다. 사실 그날 그렇게 간단하게 오전업무를 끝내기 위해서 나는 그동안 업무시간을 축적해 온 것인데 그 순간만 보면 성실한 직장인인 우리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을 법도 했다. 그렇게 그냥 놀러 가면서도 잠깐 일을 하고 어떤 날은 그 일이 오전업무의 전부가 되기도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게 일과 삶의 영역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직장인이던 시절에는 직장인도 일과 삶을 잘 구분하지 못해 힘든데?라고 생각했는데 뭐랄까 약간 개념이 다른 것 같다. 직장인은 직장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일상에 녹아들어서 주말에도 그냥 막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고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일이 일상에 녹아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도 자영업자이자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일하면거 놀면서 쉬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바로 주문을 확인하지만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진 않는다. 주문 현황에 따라 오늘 하루 어떻게 움직 일지를 결정할 뿐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루종일 일에 매여 사는 삶에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곤 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됐다. 자영업자이자 프리랜서의 삶으로 전환 완료다.



이렇게 전적으로 내 몸과 정신을 다 바쳐 가족의 안위를 챙기는 일에 헌신하게 될 때마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일을 미뤄도 되는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이러니하게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일과 삶의 형태를 바꿔가면서까지 무언가 잘 해내는 내가, 지금 이렇게 놀며쉬며일하며 살고 있는 건 왠지 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틀에 박힌 제도권 안에서만 잘 살 줄 알았는데 밖에 나와서도 이렇게 잘 살아가는 내가, 한마디로 이렇게나 유능하고 뛰어난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말도 안 되게 거만한 생각이지만 오늘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 시리즈를 쓰면서 논다 일한다에 대한 나의 개념이 참 편협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내 시각은 아직도 편협하구나 싶다. 먹고살만하다면서 아직도 먹고사니즘을 위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걸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에 다시 빠진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데 병간호 보초를 서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마주하려고 한 적도 없었는데 내 민낯을 갑자기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1분 1초를 아껴 치열하게 보내야 할 30대에, 너무 좁은 틀 안에 나를 가두고 어쩔 수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는 게 아닐까.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걸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잠 못 드는 밤 여러 생각이 스친다. 도대체 언제쯤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불안의 정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