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ldred Jun 06. 2023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라서

"일을 좀 줄이세요. 그렇게 일만 하면 내 삶이란 게 없잖아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네이버에 무작정 검색해서 찾아간 병원이었다. 나름 동네 맘 카페에서 알려진 '유명한 병원'은 거의 한 달 뒤에나 예약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시간에 초진 예약이 되는 곳이라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다 나랑 비슷한 상황이었나. 자연스럽게 문진표를 받아 들고 한쪽 테이블에 앉아 수많은 항목에 대해 체크를 했다. 몇 년 전에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했을 때는 문진표를 작성하면서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른다. 이번에는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그때처럼 울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때는 목 끝까지 울음이 차올라서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을 때고, 지금은...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작성한 문진표를 넘기고 기다리는데 잠시 뒤에 간호사가 다가와 원장님께서 문진표를 보시더니 뇌파 검사랑 전두엽 검사를 해보면 좋겠다고 했단다. 검사는 지루했고 또 지루했다. 단순 반복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의사는 1시간 반이나 지난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의외로 넓었던 진료실 안에 우아하게 앉아있던 의사는 나를 보자 첫마디를 꺼냈다. "일을 좀 줄이세요. 그렇게만 일하면 내 삶이란 게 없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일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책임감이라고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졌다. 젠장, 이번에는 안 울 줄 알았는데. 몇 년 전 심리상담센터에서 만난 상담사는 엄마 뻘로 다정하고 또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병원을 방문하면서 기대했던 것도 그런 모습이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냉정하고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하는 의사를 보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당신도 이게 직업이고 수많은 사람을, 수많은 환자를 월요일부터 내내 보면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이야기는 연애로 넘어갔다. 문진표에 최근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 때문에 힘들다고 쓴 것 때문이었다. 언제 헤어졌느냐고 물으며 의사는 혹시 첫 연애냐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이별이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이고 결국에는 다 극복해 나갈 문제지만, 게다가 내 나이 정도면 겪어도 몇 번은 겪었을 일이라는 게 예상이 됨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그게 이렇게 병원을 방문할 만큼 큰 충격이었는지 '팩트'를 체크하는 것쯤이라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의 어이없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뇨"라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구질구질한데, 결혼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내가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본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덧붙였다.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뭐하러 했을까.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고 어필하고 싶었던 걸까.


여러 장의 검사지를 펼쳐보던 의사는 우울이 너무 깊다고 했다. 자책도 심하다고 했다. 우선은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약은 각각 달랐다. 항우울제와 약간 에너지를 올려주는 약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늘 불면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숙면을 도와주는 약도 있었다. 약 덕분인지 잠은 평소보다 잘 잤지만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에는 방법이 없었다. 굳이 이런 상황을 주변에 알리거나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회사에 있는 동안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가 우리 집 현관의 숫자가 보일 때쯤이야 눈물을 쏟아냈다. 어쩔 땐 뺨이나 팔을 때리면서 버티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너무 나약한 거 아닐까. 생리 전이라 호르몬의 노예가 된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일이 바빠지고 잡생각 할 여유조차 없어지면 그런대로 또 살만해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영화를 보고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다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동네 공원을 힘차게 걷다가, 밥을 먹다가, 유튜브를 보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운다.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후욱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 위에 밝은 가면을 쓰고 하루를, 또 일주일을 버텨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가도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래, 이대로는 안된다. 다시 병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 병원을 다녀온 뒤로 우울증에 대해 검색을 했더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대방의 위로와 진심에 대해 의심하는 거다. 그래서 더 확실해졌다. 내 상태가 정말 좋지 않구나. 누군가는 차라리 그때 갔던 심리상담센터를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 고민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따뜻함보다 확실함이, 상담보다 치료가 필요한 때 같다.


이유 없이 힘들었던 10대를, 처음 겪는 일들로 괴로웠던 20대를, 지금은 그때 그랬었지 하며 아득하고 아련하게 추억할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 지금의 내 모습도 그렇게 기억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또 쓴다. 쓰기 시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