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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Dec 15. 2023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 아그라 성에 유폐되다!

잔시 역

16세기 악바르 황제는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겼다. 당시 무굴제국은 현재의 네팔과 파키스탄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넓히며  200여 년 동안이나 크게 번성했다.  그곳에 샤 자한이 왕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지은 세계 문화유산인 타지마할과 요새인 아그라 성이 있다.


잔시역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아그라로!

인도 사람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인도의 열차를 타보는 거다. 열차는 영화 '설국열차'에서 처럼 특급과 일반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이드가 '특급'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지만 객실은 천장까지 3단이나 되는 침대로 이뤄져 있다. 낮에 일행이 같을 경우 제일 아래 칸에 3명이 앉아서 갈 수 있겠지만 아래 칸 사람이 누워있다면 제일 꼭대기 칸에 누워 천장만 보며 가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 칸은 요금이 특급열차의 10% 밖에 안 되지만 지정된 좌석도 없고 마치 짐칸 같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잔시역에는 소와 개까지 들어와 있다. 정차한 기차 아래로 마구잡이로 드나드는 개 중에는 다리를 절룩거리는 놈도 있고 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철로 위를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짐칸처럼 보이는 일반 칸과 나름 침대까지 구비되어 있는 특급 칸
특급열차가 다니기 전에 이용했다는 건너편에 정차한 열차는 이제 새들의 놀이터


특급 칸의 열차와 열차 사이의 화장실 앞에는 일반 칸의 승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채 쭈그리고 앉아 있다. 수시로 검표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인상 좋아 보이는 검표원은 그들을 그냥 모른 채 하고 지나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상부의 관리인이 오면 이를 단속하지 않은 검표원은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


지방의 작은 역에 정차하면 많은 사람들이 큰 보따리를 이고 지고 뛰어왔다.


차창을 통해 지평선과 들판이 끝없이 지나갔다. 농번기가 아니어서 인지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가끔 양이나 염소 소들이 풀을 뜯고 있거나 나무 한그루가 휑하니 서있을 뿐이다. 


6,000여 킬로미터나 되는 인도의 기차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 이는  200 년 동안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며  모카와 밀, 차와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와 두 아이가 옆 칸에 탔다. 귀여운 아이들을 보고 가방 안에 있던 바나나 두 개를 꺼내  권했으나 그들은 이내 도리질을 하는 것이다.  음식물에 약물을 타서 먹이고 싹쓸이를 해가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더니 나도 그런 사람으로 보였을까?


전날 실수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자이나교 사원에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다. 한 꼬마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달려왔다.  나는 구걸하는 아이로 여겨 이내 도리질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가이드에게 뭐라고 하더니,

"자기 아이가 외국인들을 보고 인사하고 싶어 왔으니 인사 좀 받아 달라는 것이다." 

순간 너무 미안해 손을 잡아주었지만 아마 그 아이는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건널목 차단기 앞을 보면 이들의 이동 수단 대부분은 오토바이나 릭샤인 듯하다.


드디어 타지마할!

개장 시간에 맞춰 새벽부터 갔지만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엄청나다. 그동안 사진에서만 보았던 타지마할이다.  공항도 아닌데 검문검색이 꽤 심하다.


붉은 사암의 아치 문 너머 타지마할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윳빛 건물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데다 안개 때문에 신비롭기까지 하다. 잘 정돈된 넓은 뜰 가운데 길게 이어진 수로의 끝에 눈부시고 기품 있는 타지마할이 있다.  바로 이곳이 샤 자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이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무덤이 또 있을까?

정문의 꼭데기에는 작은 돔 모양이 22개가 있는데 이는 타지마할을 짓는데 22년이 걸렸다는 의미다.
샤자한과 왕비인 뭄타즈 마할의 시신은 실제로 지하에 안장되어 있고 관광객이 관람하는 1층의 묘는 똑같이 만든 모형이다.


야무나 강변에서 올라오는 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하얀 대리석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300미터나 되는 크고 흰 사각의 대리석 기단에 떡하니 서있는 건물 위에는 이슬람 양식의 커다란 돔이 있고, 네 귀퉁이에는 미나르가 있다. 이는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약간 밖으로 휘게 만들었다. 우윳빛 타지마할은 아침 햇살이 비치면 분홍색으로, 저녁노을이 비치면 황금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이슬람 사원


건물을 짓기 위해  페르시아 출신의 우스타드 이샤, 이란의 이사칸, 베네치아의 보르도 등 해외의 수많은 건축가가 초빙되었고, 동원된 노동자가 2만 명, 코끼리도 1,000 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손목까지 잘랐다고 한다.

타지마할을 주변 건물들은 비슷한 형태로 지었다. (정문과 우측 건물은 영빈관)


크샤트리아 계급의 상징은 붉은색이라 이슬람 황제들은 붉은색 사암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나 샤 자한은 브라만 계급의 상징인 흰색까지 사용하여 모든 계급의 통치자임을 과시하였다. 외부 벽은 왕비가 좋아했던 하얀 대리석에 빨간 루비와 초록색 에메랄드, 파란 터키석, 노란 옐로 사파이어 등으로 수선화나 백합 튤립 문양에 피에트라듀라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하여 정교하게 장식했다.


수입한 대리석, 청금석, 홍옥석, 루비, 사파이어와 500 킬로그램 이상의 금은 당시 무굴제국 국가 전체 예산의 5분의 1이나 되었다고 한다. 과연 샤 자한은 로맨티시스트였을까? 폭군이었을까?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러브스토리

샤 자한은 왕위에 오르기 전 15살에 페르시아 출신의 아르주만드 바누 베금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아르주만드의 고모는 이미 샤자한의 아버지인 누르자한의 왕비였다. 누르자한은 샤 자한에게 2명의 왕비를 들이게 하며 결혼을 방해했지만 그는 5 년 후 기어코 첫사랑인 뭄타즈 마할을 왕비로 들였다. 


당시는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었다. 샤 자한은 왕위 쟁탈전으로 왕이 되었다. 금슬이 너무 좋았던 샤 자한 부부는 정복전쟁에도 늘 함께 하며 19년 동안 14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인도 남부를 정복하기 위해 데칸공원에 출정했을 때 14번째 아이를 낳던 뭄타즈 마할은 그만 죽고 만다. 


사랑꾼 샤 자한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두문불출하며 칩거하던 왕은 다른 왕비를 들이지 말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달라던 왕비의 유언을 상기해 일단 왕비를 가매장한다. 아그라로 돌아온 그는 아름다운 정원도시였던 야무나 강변에 타지마할을 짓고 완공 후 지하 묘소로 왕비를 옮겨왔다. 


14명의 아이 중 살아남은 아이가 7명. 그중 유난히 장남과 장녀가 사랑받았으나 야망이 컸던 셋째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타지마할이 완성되고 6년 후, 샤 자한이 왕궁 재산을 바닥 내고 위험에 빠트리게 했다는 이유로 쿠테다를 일으킨다.  아우랑제브는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아버지는 아그라성의 무삼만 버즈 탑에 유폐시킨다. 그 후 6년이나 감금 생활을 하던 샤 자한의 유일한 낙은 창으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것뿐이었고 1666년 74세의 나이로 죽은 뒤 그가 사랑하던 왕비 옆에 묻혔다.

샤자한이 유폐되었던 성에서 야무나강의 뿌연 안개 너머로 타지마할이 아스라이 보인다.


샤자한의 외로운 유배지, 아그라 요새

둘레만 6 킬로미터나 되는 아그라 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개의 성 중 하나다. 붉은 사암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 주변에는 해자까지 있어 난공불락이다.  악바르 황제가 짓기 시작해 100 년이나 걸려 완성한 성은 그들의 막강했던 권력의 상징물로 왕궁 겸 요새의 역할을 했다. 특히 샤 자한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멋진 궁전으로 변모시켰다. 이 성에서 악바르부터 아우랑제브까지 4대의 왕이 살았다

관광객이 출입하는 아마르 성 게이트


궁전내부는 화려했다.  악바르는 첫 번 째는 이슬람교, 두 번 째는 기독교 그리고 세 번째는 힌두교 왕비를 들이며 일레이 일라이라는 짬뽕 종교까지 만들며 종교적으로 통일을 시켰다.  궁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슬람과 힌두 라자스탄의 건축 양식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한 사람의 욕조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화강암으로 된 원형 욕조는  자한기르의 욕조
별과 연꽃이 섞여 있는 문양을 보면 이슬람과 힌두교가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운 바람이 대리석 창문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오면 기온이 낮이지기 때문에 모든 침실에는 벌집 또는 네모 모양의 작은 구멍이 뚫린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하얀 대리석에 보석 장식이 가득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무삼만 버즈(포로의 탑이라는 뜻)는 샤 자한이 유폐되어 지냈던 곳이다. 화려한 건물 안에는 작은 연못까지 있으나 이곳에서 샤 자한은 저 멀리 타지마할에 있는 왕비를 그리워하며  홀로 지내야 했다. 


화려하지만 약탈자들이 금은 보석을 빼가는 바람에 누추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커다랗고 굵은 40개의 기둥이 인상적인 디와니암은 왕의 접견실이다. 정원에는 1857년 인도 독립전쟁인 세포이 항쟁 때 죽은 영국 부총독 콜빈의 무덤도 있다. 

정면 높은 곳에 왕좌가 있다.


인도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다. 막강했던 무굴제국의 왕들, 찬란했던 그들의 문화, 애달픈 샤 자한의 러브스토리까지 벅찬 감흥 속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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