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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Nov 09. 2024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딸

내게는 딸이 둘이 있는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큰 딸은 어려서는 꽤나 똘똘해 우리가 퇴근해 돌아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날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깜짝쇼를 벌여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작은 딸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시험 문제 하나만 틀려와도 종아리를 맞는 것은 큰 애였고, 작은 애는 수학 점수가 48점을 받아와도 우리는 기가 막혀 웃을 뿐 혼내질 못했다. 늦게 태어났고  우리가 뒷바라지를 해준 게 별로 없어 그저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런 우리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큰 애는 아주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는데 작은 애는 캐나다에 조기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로는 눈에 띄게 개방적이고 활달한 아이가 되었다. 

    

큰 딸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코스프레를 즐기더니 갑자기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 네가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런데 우린 애니메이션보다는 회화과 같은 것을 전공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미술학원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딸은 갑자기 미대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미대에 가려면 어려서부터 준비했어야 하는데 난 몰라도 정말 너무 몰랐다. 고등학생이 되도록 조각상 하나 그려본 적이 없던 애가 어떻게 갑자기 미대에 갈 수 있단 말인가!     

  

홍대 쪽 미술 학원에 다니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의 벽을 깨닫고는 학원에도 나가지 않고 혼자 방황하다가 아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딸은 홍대 앞 언덕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큰딸은 아빠가 너무 무서워 12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려고 했단다. 치매 걸린 외할머니와 어린 동생도 잘 건사하며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던 아이였는데 우리 부부는 정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해 수능 점수는 잘 나왔지만 실기 점수가 모자라 딸은 재수를 하고 말았다. 큰 믿음을 실망으로 바꿔놓은 딸이 미워서, 내 딸이 재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나는 그 후 늘 딸과 다퉜고 그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게다가 전공도 기어코 자기가 원하는 애니메이션 과를 택해 조치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땐 내가 빵집을 하고 있어서 조치원에 내려가 본 것은 입학식과 졸업식뿐이었다. 

      

그렇게 본인이 원했으면 제대로 만화가의 길을 갔어야 할 텐데 그 애는 지금도 열악한 만화업계로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만 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내일모레면 40인데 결혼도 안 하고 아직도 기다려 달라는 말만 하는 딸을 볼 때면 정말 속에서 천불이 난다. 품 안에 자식이라더니 내 딸이 저렇게 바보같이 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허구한 날 다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몇 년 전에 강제로 충정로의 행복주택으로 쫓아냈다.  솔직히 혼자 살다 보면 외로워서 결혼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딸은 도리어 남자 하고는 벽을 쌓고 말았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건지 사람이 그리운 건지 아침이면 내게 전화해서는 길게 수다를 떨곤 한다. 난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저 짤막하게 대꾸하다 보면 

“엄마 나랑 전화하기 싫구나. 그래 그만 끊자”  

"아, 내가 또!"


쉬는 날 집에 오면 내 눈치만 보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느닷없이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난, 엄마가 좋아”      

그때조차 난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질 못하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게 된다. 솔직히 이따만한 딸이 좀 징그럽기도 하고 아직도 어린애처럼 안기는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만 바라보는 큰 딸이 있는가 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작은 딸도 있다.    

      

아들을 낳으려고 한약까지 먹고 낳은 딸이다. 백일이 되도록 그저 우유만 먹이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은 철썩 같이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다. 당시 나는 직장에서 책임자였는데 임신만 하면 꼭 결산이나 가결산 때 걸려 두 번이나 인공유산을 시킨 후 얻은 아이였는데 또 딸을 낳은 것이다. 첫 애와 달리 둘째는 나이 드신 친정엄마에게 더 이상 맡길 수가 없어 이웃 아주머니께 육아를 부탁했다. 그때는 직장 생활하느라 늘 피곤했고 밤늦게야 퇴근했다. 쉬는 날에도 피곤에 지쳐 종일 자느라 작은 딸과 별로 놀아주지도 못했다. 큰 딸 키울 때는 아이를 핑계  삼아 놀이동산이며 여행을 자주 갔는데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느 날 앨범을 정리하다 보니 큰 딸의 앨범은 10권 가까이 되는 데 작은 애 것은 채 두 권이 채 안 되었다. 영어 학원도 제때에 보내지 않아 초등학교 5학년이 되도록 알파벳 밖에 몰라 궁여지책으로 캐나다로 조기 어학연수를 보내야 했다. 


작은 애는 서울 끝자락의 대학에 겨우 들어갔다. 재수를 하고 싶어 했으나 당시 남편이 곧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늘 과에서 1등을 하더니 3학년 때는 편입까지 성공해 학교 이름도 바꾸고 대학 4년 동안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짠순이 엄마가 학교에서 받는 장학금을 그대로 돌려주었더니 그 돈을 받기 위해서였을까? 사위를 만난 것이 대학교 1학년 때니 내가 주는 용돈으로 데이트를 하려면 용돈이 모자랐을 테니 아르바이트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을까?


나를 닮아서인지 여행을 좋아하는 딸은 해외여행이 가고 싶으면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 일은 알아서 척척 해내는 딸이 그저 대견스러웠다. 취업해서도 이과생이 영어를 잘해서 인지 딱 부러지게 일을 해서 벌써 표창창도 여러 차례 받았다.  

       

나와는 궁합도 참 잘 맞는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내 맞장구를 치며 웃어주니 그 애와 같이 있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일찌감치 생긴 남자 친구 때문에 서른이 되자마자 결혼을 해서는 벌써 내 품을 떠났다.  얼마 전까지는 큰 딸이 결혼하기만을 바랐지만 요즘은 작은 딸과 사위가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눈곱만큼도 모르는지 전화 한 통이 없다.  궁금해 견디다 못해 전화를 하면 전과 달리 시큰둥하게 받는다.

“나쁜 지지배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어. 이젠 이 어미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봐!”

“아, 이제 그만 신경 끊어, 시집보냈잖아. 바쁜 애한테 전화해서는....” 

자기도 보고 싶으면서 딸 역성드는 남편이 더 밉다.      


며칠 전 어버이날에 와서는

“엄마 나 친구들 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

“왜?”

“아, 양가 챙기는 것 너무 힘들어”

헐! 결혼해서 어버이날 챙긴 것이 두 번이야! 세 번이야? 꼴랑 이번 처음 챙기고는 한다는 소리가? 뒤에서 싱긋이 웃으며 눈짓하는 사위가 없었다면 그냥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이상한 장모로 보일까 싶어 애써 입을 다물었지만 온몸이 싸늘해지며 힘이 빠졌다.


나는 왜 나만 바라보는 큰 딸은 외면하고 작은 딸만 이토록 바라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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