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부터는 오전에 수영도 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다녔다. 남편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후다닥 청소를 해놓고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전에 수영장을 찾는 사람은 주로 가정주부다. 직장 다닐 때 새벽반 수영강습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남녀 비율이 반반정도였는데 낮에는 모두가 여자였다.
은행 다닐 때도 대부분 여직원뿐이었지만 이렇게 여자로만 그것도 주부로만 모이는 모임은 처음이었다. 여자 특유의 모임답게 시기와 질투와 수다도 난무했지만 수영이 끝나면 각자 싸 온 먹거리로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어디 그뿐인가? 할 일 없는 주부들은 수영장을 나와서는 맛집도 찾아다니고 쇼핑도 하다 보면 저녁때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즐거움이었다. 계속 같이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점심때가 되면 나는 가게로 돌아가야 했다. 어떤 때는 그 때문에 가게를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남편이 삼성에 근무하고 있어 물놀이 동산 티켓을 무료로 얻었을 때, 수영장 사람들을 몽땅 데리고 자동차 몇 대로 나누어 멀리 용인까지 갔다. 수영 모자에 원피스 수영복까지 입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놀이동산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거의 젊은 커플인 데다 비키니 수영복에 래시가드를 입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마치 서울 구경 나온 시골 아줌마 같이 보이지 않았을까?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카페를 할 때부터다. 그저 가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가족 이야기를 카페에 올리면 친구들은 칭찬을 하며 작가로 나서 보라고까지 했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그 후 시간만 나면 자판을 두드렸고 그때부터 조금씩 글 쓰는 재미에 빠지게 되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가게에 붙일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캘리그래피 강의도 들었다. 미대에 다니던 딸도 있으니 물감이나 도구는 충분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스티로폼으로 다양한 모형물까지 만들다 보니 온 집안이 마치 유치원 같았다.
재봉이나 퀼트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 집 장롱에는 그때 만든 손지갑부터 상보, 아기이불까지 없는 게 없다. 새벽 6시,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딸들이 일어나기 전까지 다시 잠을 자기도 어정쩡했다. 꼭두새벽에 주방 장갑이며 가위집 등 소품을 만드느라 재봉틀을 돌렸고 그렇게 만든 것들은 동창들 모임에서 나누어 주었다. 빵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었다.
재봉 강사는 독특했다. 자기가 칠판 가득 설명을 써놓으면 그것을 우리가 옮겨 적어야 하는데 휴대폰으로 찍어가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간편한 휴대폰을 두고도 메모장에 일일이 옮겨 적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재봉틀을 설명할 때도
“자 여기 여기에 실을 꿰어 이렇게 박으면 돼요”
여자들 특히 나는 기계치다. 기계 앞에만 서면 늘 멍해진다. 또 옷의 앞 뒷장을 거꾸로 붙이기도 하고 재단을 반대로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도대체 그 머리로 어떻게 학교를 졸업했을까?”
칼날 같은 말들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어느 날인가 강사가 실수를 했다. 때를 놓칠세라
“어머 선생님은 어떻게 학교를 졸업하셨을까요?”
그녀는 길길이 뛰었고 나는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나와 강사의 소양에 대해 항의를 하고는 수업을 그만두었다. 아마 무척이나 욕을 했을 것이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몇 번이나 수모를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고를 친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없는 시간 쪼개서 살던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이 나이가 되어도 어디선가 무엇을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 문제는 벌려놓은 많은 취미생활 때문에 창고에 별의별 재료와 도구가 한가득 쌓여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