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미의 세상 Sep 30. 2024

한 집안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남편은 둘째 아들이고 아래로 시누이만 넷이다. 결혼 초부터 계속 일을 해왔기 때문에 저녁 늦게 지내는 제사까지는 가지 못해도 설과 추석 그리고 부모님 생신만큼은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려고 미용실에 갔을 때다. 사람들은 한참 시댁 흉을 보고 있었다. 원장은 마치 무용담 늘어놓듯 드라이기를 한껏 쳐들어 올리며

“내가 시댁에 가서 사골 국물 두어 번 엎어버렸잖아. 우리 어머님 그 뒤로 부엌 근처에는 오지 말고 거실에서 파나 다듬으라던데”     

한 술 더 뜬 그녀의 남편은 

“아니 울 색시에게 지저분한 파를 다듬게 해요?” 

라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이제는 시댁에 가면 과일이나 깎는다나 뭐라나. 내참.  

나는 성격 상 그렇게 꾀를 내지도 못하거니와 나를 그토록 귀하게 여겨주는 남편도 없다.

      

명절이 다가오면 일주일 전부터 장을 보고 틈틈이 음식 준비를 해서 명절 전 날 시댁에 내려가, 온종일 음식을 만들어 놓고 밤늦게 홀로 서울에 왔다. 명절이면 롤케이크나 전병 등의 선물세트를 사가는 손님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까짓 하루 매상’하며 통 크게 무시해도 되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그리 억척을 떨었다. 애써 만들어 간 음식은 먹어 보지도 못했고 명절날 혼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추석 정상 영업’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며 왈칵 서러움이 북받치더니 가슴속으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근처 편의점에서 들어가 좋아하는 콜라 한 병 사서 양껏 들이키며 천천히 가슴을 토닥여 준다.

“수고했어, 열심히 살았어. 남편이나 자식이 몰라주면 어때!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시부모님의 생신잔치는 1박 2일 동안 이뤄졌다. 거창하게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녁에 모여 편안하게 술이라도 한 잔 하려면 자고 가야 했다. 그때 마련한 이불들이 아직도 장롱에 한 가득이다. 며칠 전 묵은 살림을 좀 버릴까 하고 꺼냈다가 혹시나 하며 도로 집어넣었다. 

    

다행히 아들이 둘이라 번갈아가며 생신 상을 차렸다. 그러다 시아주버님이 사업에 실패한 후로는 온통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게 미안했던지 시누이들은 자기네 집에서도 생신 상을 차리겠다더니 겨우 한 바퀴 정도 돌아갔을까?

“우리 애 시험이라 안 돼.”

기말고사도 아니고 중간고사 때문에 안 된다고? 난 수능을 앞둔 큰딸도 데리고 내려가 명절 음식을 만들게 했는데.....     

 

직장 다니느라 친정 엄마와 함께 살 때도, 가게를 하느라 바쁠 때에도 생신이면 꼬박꼬박 우리 집에서 생신상을 차려드렸다. 음식을 마련해 놓고 식사시간에는 가게로 나가야 했지만 구차하게 이런저런 핑계를 댄 적이 없다. 

     

온 가족이 모이면 스무 명도 넘는다.  다들 돌아가고 나면 음식물로 가득 찼던 냉장고는 텅 비었지만 내 가슴은 뿌듯했다. 그렇게 살아온 나를 시댁식구들은 고맙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큰 소리를 치고 산다.    

 

종갓집인 우리 시댁은 늘 시끌벅적하게 음식을 마련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몇 년 전 시부모님께서 큰집 장손에게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주자 큰 며느리는 걱정 말라며 제사를 서울로 가져왔다. 물론 그때도 전이며 산적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딸이 둘이나 있는 내가 준비했다.      

그렇게 두세 번 치르더니 코로나가 터졌고 이제는 아예 제사를 없애버렸다. 

“교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명절 차례라도 지내야 하는 것 아냐?”

하지만 모든 게 없어졌다. 시누이 중 하나는 제사 없앤 것 아주 잘했다며 박수까지 친다. 나는 꼰대인가 보다. 편하기는커녕 마음이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온 가족 모여 북적이는 게 명절인데.  

   

지난해 설날에는 이런저런 음식을 마련해서 동트기 전에  시댁에 내려갔다. 당뇨가 있어 식사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배고파하시는 아버님을 보며 형님네가 언제나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겨우 와서는

“우리 애가 일어나지 않아서요. 에고 차는 왜 이렇게 막힌 데요? 

 아니 동서, 음식을 이렇게 만들어 온 거야? 나가서 사 먹을까 했는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명절날 부모님 모시고 아침부터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겠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성묘 갈 때 가져가라고 일부러 음식을 따로 마련해 갔는데 굳이 필요 없다며 사과와 배 그리고 포만 가져가는 아주버님도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형님이 만들어 오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들고 가는 것조차 귀찮아서?  

   

추석이 코앞이다. 몇 달 전 시어머님께서 요양원에 들어가시고부터는 가장 큰 걱정은 병원비가 아니라 시아버님의 식사다. 일흔 넘은 아들이 차려주는 밥상이 오죽하랴? 며느리인 나로서는 그저 지옥이다. 아흔여섯의 나이에도 여주시의 행사에 자주 나가시고 어머님 면회도 다니시다 보니 서울로는 오지 않으시겠단다.      

“아버님 이번 추석에는 저희 집에 오세요.” 

큰 아들 눈치가 보였는지 바로 확답을 못하시고는

“그래 봐서.....”  

  

오늘 저녁 우리 집으로 오셨다. 이틀 전부터 음식 장만을 했다. 남들은 북어며 약과며 차례 지낼 재료를 사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 재료만 샀다.

“이왕이면 어머님도 같이 오시면 좋을 텐데.”

거동이 불편하신 데다 요양병원에서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억지로 모셔왔다가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지난해 휴가 때 동해안에 모시고 갔다가 조개구이 잘못 드시고 돌아가실 뻔한 기억이 떠오르자 그저 입을 다물었다.  

   

작년만 해도 밥 한 그릇 후딱 비우시고 술도 서너 잔씩 드시던 아버님은 전과 달리 식사량도 부쩍 줄어드신 데다 요즘은 귀도 잘 안 들리시는 것 같다. 잔뜩 굽은 허리에 입까지 벌리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계신 모습을 보니 매서운 칼바람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저려온다. 내가 추운 날 가게에 있을 때 늘 걱정스럽게 전화를 하셨는데....

병원에 계신 어머님 보다 나이 든 아들과 함께 사시는 아버님이 더 걱정이다. 

    

추석이 지나고 나면 곧 아버님 생신이다. 몇 년 전부터는 가족 회비를 걷어 식당에 가서 밥 한 끼 먹고 오는 것으로 퉁치고 있다. 시할아버지 생신 때 친구 분들을 초대하시고는 우리 두 며느리를 불러다 꼼꼼히 메뉴까지 살펴보시던 아버님으로서는 엄청 서운하실 게다.   

   

내내 같이 살았으면 아마 미움만 쌓였을지 모르지만 가끔 만나고 따뜻한 말씀만 해주시는 시부모님이 싫을 리가 없다.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이보다 더 잘해 드렸을까?     

친구들은 

“너는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산다.”

“그렇게 보여?”

큰돈은 아니지만 국민연금이 나오고부터는 고생하며 살아온 지난 30 년을 보상하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산다. 

“나, 이 정도의 상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종교도 인연 따라가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