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건국 설화, 금척설화, 마이산 탑사
전라북도에 가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관한 건국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많다. 상이암, 뜬봉샘에 이어 진안 마이산 탑사 너머 은수사에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금척(금으로 된 자)을 받았다고 한다.
금척이란 왕권의 지배적인 권위와 통치의 정당성을 상징한다. '자'는 한자문화권에서 지배와 통치의 상징물인데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구전설화에서도 '자'는 치병과 치유의 생명력을 지닌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창조와 재생의 중심이며 우주 생명력과 기원의 힘이 처음 들어가고 나오는 '우주의 중심'을 뜻한다.
신라 때 조성된 경주시의 금척원은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창업 이후 이성계의 왕권획득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상징물이 되었고 조선시대 문헌인 '태조실록' '삼봉집' '용비어천가''대동운부군옥'등에 실려있다.
마이산은 진안에 있는 전북 도립공원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은 마치 말 한 마리가 숲에 숨어 있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까꿍'하고 일어서지는 않을까?
주차장에서 마이산 탑사까지는 자동차 출입이 금지되어 걸어가야만 한다. 주말이라 꽤 붐비는 입구에는 여늬 관광지처럼 다양한 토속품과 칡즙, 유과 등 먹거리를 팔고 있다. 잠시 걷다 만난 곳은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인 '금당사'다. 의자왕 10년에 창건되었다는 절은 처음에는 자연 동굴을 법당으로 삼았기에 '금동사' '혈암사'로 부르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숙종 1년에 재건하여 '금당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나타난 탑영 저수지 너머 두 마이봉이 살짝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수지 옆길을 지나 큰 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린 산책길은 풀향을 맘껏 내뿜고 있는 데다 그늘이 드리워져 더운 여름이라도 걷기 힘들지 않았다. 많은 돌탑이 있는 체험장에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즐겁게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이곳이 타포니 (풍화작용에 의해 바위 내부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여 내부가 팽창되어 밖에 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내는 형상) 지형이라는 지리공부도 할 수 있겠다.
드디어 탑사에 도착했다. 암마이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맞닿은 곳에 자리한 탑사에는 크고 작은 돌탑이 가득하다. 일자 또는 둥글게 쌓아 올린 탑을 자세히 보면 잘 다듬은 듯한 가지각색의 돌이 한데 모여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산 골짜기에 있어 바람도 어지간히 불어왔으련만 접착제나 시멘트 등 부재료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80여 개나 되는 탑들은 어떻게 저리도 굳건하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신기하기만 하다.
마이산은 독특하게 역암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옛날 홍수로 돌과 자갈이 휩쓸려 가다 일정한 방향으로 누운 채 굳어 버렸다. 돌탑에서 보았던 둥근 돌멩이들은 아마도 이 역암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절벽 위 벌집 모양으로 움푹움푹 파인 것을 타포니라 한다. 보통 풍화 작용은 바위의 표면에서 시작되지만 마이산의 역암층은 오랫동안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과 역암의 무른 부분이 먼저 팽창하여 밖에 있는 돌들을 밀어 냄으로써 커다란 구멍을 냈고 그 구멍은 지금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곳에 처음 탑을 쌓은 사람은 조선 후기 임실에 살던 이갑용 처사로 25세에 입산하여 은수사에 머물며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련을 하다가 사람들의 죄를 구제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30년 동안이나 돌탑을 쌓았다. 강진에도 이처럼 돌탑이 많은 옴천사가 있는데 그곳은 정암스님이 20년 동안 대한민국의 평화를 염원하고 국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며 쌓은 곳이다. 애절한 두 분의 염원 덕분에 우리가 지금 평온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섬진강 발원지라고 되어있는 우물은 이 처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우물이다. 용궁 주위에는 줄사철나무가 한창이다.
울퉁불퉁한 벽면에 말라죽은 듯 보이는 나무는 능소화다. 임금의 사랑을 잃고도 내내 임금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담장 밑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화가 죽은 뒤 핀 다홍색의 능소화가 이 황량한 벽면을 가득 채운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미륵존불과 법당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탑사에서 가장 큰 두 개의 둥근 탑을 볼 수 있는데 부부탑인 천지탑이다. 탑사의 하이라이트로 오행을 뜻하는 다섯 개 탑의 호위를 받고 있다.
탑사 너머에 오늘의 목적지인 은수사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금척을 받는 꿈을 꾸고 기도를 드렸던 장소다. 기도 중에 마신 샘물이 은같이 맑았다 하여 절 이름이 '은수사'다. 절 옆에는 상이암처럼 청실배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태극 전에는 몽금척수수도가 모셔져 있다.
금척을 소재로 정도전은 가사와 악보를 만들고 국가의례나 경사 때 춤과 노래를 공연하였다고 하여 진안군에서는 군민의 날이나 국가의 중요행사에 이 금척무를 공연하고 있다. 조선 왕실의 어좌 뒤에 필수적으로 모셨던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인 일월오봉도는 마이산이 배경이라고 한다.
은수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태조 이성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난세에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하며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의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설화는 이곳 은수사 외에도 상이암과 뜬봉샘 등에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이성계가 성수산에 기도를 드리러 가면서 쉬어간 마을은 '왕방리'요, 이성계가 아침에 머물렀다는 마을은 '조치마을'이고, 이성계가 황산에서 여기까지 몇 리나 되겠나?라고 묻자 수천이라 해서 붙여졌다는 '수철리'와 가는 길에 진을 쳤다는 '관기리'까지 있다.
국호를 조선으로, 도읍도 한양으로 천도하며 경복궁을 건설한 태조는 행복했을까?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집안의 도움으로 개국에는 성공했지만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을 잃자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는 고향인 함흥에 가서 살았다. 또다시 왕자의 난으로 3대의 왕이 된 태종도 원경왕후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민 씨 집안 역시 외척 숙청의 과정에서 멸문의 화를 당해야 했다. 이토록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해 준 덕분에 세종대왕은 오로지 정치에 힘을 쏟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다사다난했던 조선은 그렇게 500년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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