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벽
요새 자꾸 그림을 망친다.
평소에는 열 장을 그리면 두 장 정도 망친다고 하면, 요새는 열 장을 그리면 두 장만 마음에 들 정도로 망치는 일이 잦다.
여덟 시간 아홉 시간씩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는데, 망친 그림만 잔뜩 그리고 오는 길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다. 망치는 이유라도 알면 좋겠는데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공부를 할 때는 기분이 안 좋거나 감정이 격앙될 경우에는 집중이 잘 안되곤 했다. 그렇지만 그림의 경우는 오히려 격하게 슬프거나 화나면 감정이 풍부해져서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꼭 감정상태 때문에 망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연습량도 절대 적지는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용하는 물감, 종이, 붓, 기술 다 똑같은데 왜 갑자기 이렇게 빈번하게 그림을 망치는 건지 알고 싶다.
대체 그림은 어떻게 느는 걸까. 그리고 그림은 대체 왜 망치는 걸까. 십 년, 이십 년 후 지금보다 훨씬 숙련된 작가가 되어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게 될까.
왜 그림을 자꾸 망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친 이후에 하는 행동은 정해져 있다. 바로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바탕을 덧칠하는 일이다.
위의 두 그림은 보이는 파란색 물감 아래에 원래 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 작업실에서 망친 그림들을 모아다가 전부 위에 물감을 덧칠했는데, 그렇게 칠한 열몇 장 중 작은 두 장의 그림이다.
이 두 그림은 원래 그림의 실루엣이 아주 살짝 비치게끔 덧칠을 했는데, 이런 바탕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면 묘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덧칠하고 위에 또 그려도 또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면 또 덧칠을 한다.
나는 워낙 그림을 망치는 걸 싫어하고 두려워해서 어느 시점부터 큰 화면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게 버릇이 들었다. 작으면 망치더라도 금방 덮고 수정할 수 있지만, 큰 화면을 수정하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생 때는 80호, 100호짜리 캔버스에도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지금은 크게 그려봤자 20호, 30호 캔버스가 최대 크기다. 공간을 채우고 압도하는 것은 크기이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가도 망칠까 봐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망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계속 망치는 것도 일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망쳐도 덮으면 될 일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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