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일곱 쪽에 담긴 큰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열다섯, 열여섯 즈음인 걸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접한 그의 작품인 <향수>를 읽었을 때는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를 읽은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의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세계관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쥐스킨트가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도 기피하며 은둔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어쨌든, 주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던 내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더불어 외국 소설에 에 재미를 붙이게 해 준 작가다. <향수>가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들은 쥐스킨트를 <향수>의 작가로 많이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 7페이지 분량의 <깊이에의 강요>다.
무려 10년 전에 읽은 단편이지만 제목과 내용을 잊을 수 없어 내 마음 한편 어딘가에 항상 꽂혀있던 이야기다. 창작과 관련된 책들을 생각하다 불현듯 다시 읽고 싶어졌고, 10년 만에 다시 펼쳐보았다.
<깊이에의 강요>는 평론가의 '깊이가 없다'는 평을 듣고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 화가의 이야기다. 고작 7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전하는 바는 무섭고 깊다. 약 10년 전에 읽었을 때도 끔찍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 후 진짜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된 지금 읽으니 더 끔찍한 내용이다.
출중한 실력을 가진 한 화가의 전시회에 한 평론가가 악의적인 의도는 없이 그녀의 작품에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론을 한다. 그녀도 처음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린다. 해당 비평은 결국 정론이 되어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마다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부족하다고 웅성댄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도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녀는 그려둔 그림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그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없이 집 안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그것들을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돈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부 구멍 내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열린책들)
어쩔 수 없이 작가에 감정을 이입하고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고 한참이 지나서까지도 답답한 기분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해석의 몫은 수용자에게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풀어놓은 생각과 이야기들은 작가 외에는 아무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위 있는 평론가의 말은 모두 흡수하면서 정작 작가의 생각과 의도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어떤 면에서 내게 이 작품은 사람을 죽여 향수를 만드는 <향수>보다 더 읽기 힘들었다. <향수>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읽을 수 있었지만, <깊이에의 강요> 속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례들은 주변에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객관적으로 깊이 있는 작품과 깊이가 없는 작품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걸어 예술을 한다. 그 마음과 예술을 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부터 이미 깊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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