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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Oct 28. 2020

밀턴 에브리(Milton Avery)

훔치고 싶은 그림

너무 좋아서 훔치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걸까.

좋아하는 작가들을 나열하라면 끝도 없지만, 요새 가장 빠져있는 작가는 밀턴 에브리(Milton Avery)다.

미국을 대표하는 야수파 작가인 그는 마크 로스코의 스승이자 친구로도 알려져 있다.

유년시절부터 그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885년에 태어난 에브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가족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로 미대를 다녔다. 그림은 고된 그의 삶의 빛이었다.


오늘날 거래되는 그의 작품값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는 살아생전에는 거의 작품을 팔지 못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마주해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79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에브리는 특히 주로 그의 아내 샐리, 딸 마치, 그리고 집 근처 풍경들을 그렸다. 인물과 풍경을 추상적인 면으로 치환한 후 각 면을 오묘한 색들로 채웠다.


지금 재평가된 것과는 사뭇 다르게, 그는 오십 세가 될 때까지 예술계에서 그리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힘든 시기에 힘이 되어준 것은 바로 그의 아내 샐리였다. 본인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샐리는 남편이 마음 편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삽화 작업을 하며 돈을 벌어 남편을 지원했고, 남편의 꿈을 응원했다.


에브리는 이에 힘입어 매일매일 페인팅을 했다고 한다. 결국, 1935년 호안 미로, 마티스 같은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한 갤러리와 계약이 되었고, 에브리는 이로 인해 당분간은 경제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그는 다시 그림을 팔지 못하기 시작했고, 고질적인 병까지 그를 괴롭혔다. 이에 대한 에브리의 대처방식은 놀랍게도 더 쉼 없이 일하는 것이었다. 에브리는 생전에 자신을 구두장인에 비유했다. 기분과 감정에 상관없이 밤낮 할 것 없이 매일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구두장인.

내가 에브리의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점 중 한 가지는 난색과 한색이 묘한 긴장감을 이루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색 그대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선에 담기는 색들을 사용하는데, 그의 이 세상 안목이 아닌 듯한 색들의 선택은 그의 그림을 거의 환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비현실적인 색들을 사용하는 부분은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마티스의 색들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은은한 색들이 더 지배적이라 내 취향에는 이 편이 더 좋기도 하다.


한 가지 더 강하게 다가오는 점은, 에브리의 그림들에는 군더더기가 모두 빠지고 본질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선 몇 개로 면이 나뉘면서 하늘과 땅이 구분되고, 바다와 모래사장이 갈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보다 보면 표현 방식보다는, 오직 그림 자체가 주는 감정과 분위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밀튼 에브리는 비교적 최근 알게 된 작가인데,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깊이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누군가의 작품세계를 가져올 수 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그림들을 그대로 훔쳐오고 싶을 정도로 좋다. 원화는 가질 수 없지만 화집이라도 가지고 싶어서, 아마존에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수요가 없는 건지 모두 절판된 상황이었다. 결국, 컴퓨터로 사진을 뽑아 직접 화집을 만들고 작업실에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두었다.


나보다 약 10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이의 삶과 작업에 이렇게까지 공명할 수 있다니. 마주쳐본 적도, 말해본 적도 없지만 밀턴 에브리의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먼저 가 본 이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다. 앞으로 수많은 작가들을 더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겠지만, 내 마음속 밀턴 에브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뒤바뀔 가능성은 희박하게 느껴진다.


인스타그램: @byjeanc

https://www.instagram.com/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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