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하고 질척거리며 지난했던 완독의 기록
오디오북의 기억을 소환하자면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깨 교보문고 원서 코너 한 켠에 CD나 테이프를 팔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장욕에 눈멀어 <Don't Sweat the Small Stuff> , <Bridget Jones's Diary>, <Chicken Soup for the Soul> 등 한창 유행하던 베셀을 사서 완독을 시도했지만 귀에 영 들어오지 않아 가끔씩 브금 정도로 활용하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흥미를 잃고 방구석 어딘가로 처박혀버린 장물이 되었다.
너무나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라 넘쳐나는 정보 홍수에 낙오될 게 항상 걱정 아닌 걱정인지라 뭐라도 계속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뭘 하든 팟캐스트든 라디오든 영상이든 브금으로 항상 틀어놓는 게 습관이 되었다. 보스턴 공공도서관 회원증 만들고 Libby로 오디오북 세계에 본격 입문.
유료로 막혀 있던 유명 책들도 웬만해선 전부 액세스가 가능해지고 나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게거품을 물고 폭풍 대출 시작. 다 듣지도 못하면서 책탐에 눈이 멀어 대출과 예약과 반납을 하루에도 몇 번을 거듭하지만 한 권을 다 진득하게 읽(듣)는 게 어찌나 어려운지 몇 챕터 듣다 칩어치우는 게 다반사.
일단 성우 목소리에서 완독의 성패가 좌우된다. 한 권을 다 듣지 않아도 초입부에서 성우의 목소리 톤이나 전달력만 보고도 완독의 각이 보이는 촉이 온다. 일단 아메리칸이 아닌 액센트면 탈락. 미국식 영어교육이 지상 최고라고 세뇌당한 세대로서 넘들 다 posh 하다는 영국 액센트를 선호하지 않는 바, 버터리한 미국 액센트여야 한다. 제일 몰입도가 좋은 건 저자가 직접 읽는 경우. 이때 저자가 셀럽이면 더더욱 전달력이 뛰어나서 완독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문학도 작품 나름이겠으나 비유적 표현 및 시적 허용 같은 게 많아 시사나 문화정보 관련 팟캐스트보다 한층 고도의 집중과 몰입을 요구한다. 또, 호흡이 짧은 팟캐스트와 달리 비교적 방대한 볼륨의 서사 중심이기 때문에 조금만 멍을 때려도 서사의 맥을 놓치고 만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육지책으로 논픽션을 위주로 빌려도 봤지만 여전히 완독률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날씨가 풀려 1일 산책 3시간을 하면서 산책 한 바퀴에 오디오북 1시간, 뭐 이런 식으로도 완독을 고무하는 방책을 강구해보았으나 이것도 며칠 안 가 실패! 그냥 오디오북이 문제가 아니라 내 집중력과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는 걸로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꾸역꾸역 다 읽은 몇 권이 있어 이건 부득불 전리품처럼 생색을 내고 싶어 몇 자 적어본다.
1.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Little_Fires_Everywhere/GI-RDwAAQBAJ?hl=en&gbpv=0
나름 주목받는 작가. 이건 대체 왜! 유명한가 궁금해서 확인 차 읽었다. 다행히 문법적 장벽이 낮아 어렵지 않게 읽었다만 대관절 이게 왜 베셀인지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던 책. 원어민이 아니라서 문학적 흥취를 못 느끼는 태생적 한계인 가도 의심해봤지만, 그래도 영어 공부 좀 하고 영문을 전공했던 야매적 시각에서 감히 평하자면 정말 평이한 언어 미적 수준의 범작. 그렇다면 플롯이 기상천외하냐. 그것도 아님. 매우 진부한 소재와 뻔한 전개. 그럼에도 리즈 위더스푼이 판권을 사서 훌루에서 드라마를 만들었다. 이런 거보면 베셀도 결국 운기칠삼.
2.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The_Stranger_in_the_Woods/d1RcDAAAQBAJ?hl=en&gbpv=0
나의 오래된 로망 중 하나는 은둔자의 삶.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정도는 속세를 떠나 인적이 끊긴 곳에서 은둔하며 살고 싶다는 게 오랜 바람. (그렇지만 와이파이는 당연히 연결되고 택배도 받을 수 있는 문명의 자장 안에서)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가 없고, 설령 옮긴다 한들 해낼 자신이 없어 그저 공상 속에 머무르는 한낱 미몽이지만 이걸 실천에 옮긴 용자가 현실 세계에 있다. Christopher Knight은 20살에 홀연 세상과 절연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관광객 절도와 빈집털이 등의 소소한? 범죄 행각에 의존하며 30년을 연명하다 이내 꼬리가 밟혀 수인이 되었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나이트는 평범한 부랑자가 아니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본인의 심박으로 나름의 인생철학대로 문예와 자연을 즐길 줄 아는 내공 백 단의 독고다이. 나의 판타지를 실천하사 대리만족의 기쁨을 주신 선각자에게 리스펙트.
3.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Why_Not_Me/co1oBAAAQBAJ?hl=en&gbpv=0
이 언니가 손대는 거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고 본다. 민디 케일링이 직접 읽어주니 더욱 맛깔스럽고 귀에 찰싹 들러붙는 유머러스한 에세이. 듣고 나면 남는 건 없고 그냥 언니가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완소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칠아웃한 시간. 명랑유쾌한 언니 목소리만으로도 기부니가 좋아진다.
4.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Yes_Please/5upzAwAAQBAJ?hl=en&gbpv=0
민디 케일링 못지않게 이 언니도 애정한다. 민디 케일링과는 또 다른 병맛. 에이미 팔러가 좀 더 수위가 높고 약간 더 미친 거 같다. 이것도 언니가 직접 읽어주니 몰입도 배가. 그냥 몽땅 자기 살아온 얘기. 자뻑이 흘러넘쳐도 재수가 없기는커녕 영 밉지가 않으니, 이렇게 뼛속까지 매력적인 또라이어야 스크린을 장악하는 코미디언으로 롱런하는구나를 실감하게 해주는 코믹 후일담.
5.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Hillbilly_Elegy.html?id=bKmpCgAAQBAJ
사실 이런 류의 자기계발 지향적 성공담은 이젠 물리디 물려서 웬만해선 노썡유지만 읽을 이것도 호기심 차 읽어봤다. 한동안 국내 베셀 순위권에 꽤 오랫동안 상주해있길래 대체 뭐가 또 대중을 사로잡았나 싶어 나도 한번 읽어봤는데 역시 특별한 건 없었다.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이동성이 급격히 고사되는 시대에서 이젠 판타지처럼 들리는 개천에서 용 난 이야기. 그럼에도 속도감 있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필력도 한몫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6.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Are_You_There_God_It_s_Me_Margaret.html?id=PVSYMtZcpWgC
영어 독후 콘텐츠를 비투지로 공급하던 회사를 다닐 적에 어느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이른바 "불온도서"를 퇴출하라는 압박을 했던 적이 있었다. 덕분에 회사가 한동안 꽤나 시끄러웠고 지적받은 대목이 과연 불온한 지를 가려내기 위해 콘텐츠 검수까지 해야 하던 촌극이 발생했다. 아니 그렇게 치면 성경이며 고전이며 성/폭력/살인/범죄 등등 죄다 불온 콘텐츠 일색인데 intellectual freedom의 각도에서 보자면 상당히 웃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불온 서적을 못 읽게 하면 불온 콘텐츠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손바닥을 하늘을 가리겠다는 궤변.
주디 블룸은 미국 YA 문학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입지적인 작가이고, 여러 저작 중에 Fudge 시리즈만 읽어봐서 가타부타 총평을 하긴 어렵지만 어린이 눈높이에서 위트 터지는 필력은 익히 알던 바. 불온서적 중에 주디 블룸의 이 책도 끼어 있어 당시 상당히 의아했는데, 오디오북으로 완독 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자 하니 마가렛은 하느님께 별별 요구를 다 한다. 생리를 빨리 시작하게 해달라고 하고, 가슴이 더 커지게 해 달라고 하고...2차 성징이 시작되는 사춘기 소녀의 눈높이에서 현실 세계에서 익히 할법한 고민을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풀어냈다는 데서 작품적 가치가 있겠지만 셰익스피어도 불온서적이라 치부하는 학부모라면 이런 책은 당연히 내 새끼가 읽으면 곤란한 퇴폐 소설이었겠지.
7.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The_Editor/C9GLDwAAQBAJ?hl=en&gbpv=1&printsec=frontcover
9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재키 오나시스가 신예 게이 작가의 편집자로 등장하는 허무맹랑한 소설. 출판계 얘기고 편집자가 주인공이니 뭐 이건 시작부터 폭풍취저. 아마존 리뷰 평점도 꽤나 높은 편이라 호기심에 듣기 시작해서 중간에 막간의 외도?도 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한 권을 뚝딱 마쳤다. 도저한 문학적 깊이 따윈 찾아볼 수 없지만 문장도 쉬운 편이고 흡입력이 뛰어나서 기분 전환용으로 읽기에 딱 좋은 소설. 남자 성우가 재키 오나시스의 대사를 어설프지만 대략 여성이라고 봐줄 만한 하이톤으로 처내는 게 포인트 아닌 포인트. 그리고 시대의 키워드가 될지 어찌 알고 quarantine을 선점한 혜안.
8.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White_Fragility/ZfQ3DwAAQBAJ?hl=en&gbpv=1&printsec=frontcover
최근 BLM 물결과 맞물려 인종 차별 이슈가 대두된 가운데 현 시국의 의제가 백분 반영된 베셀. BLM의 방향성보다는 그 기저에 깔린 위선과 모순에 질려 BLM을 테마로 한 모든 큐레이션은 의식적으로 기피했지만, 읽고 나선 나의 편협함을 반성하게 만들었던 책. 대출 창고가 바닥이 나서 더 이상 볼 만한 게 없다고 느껴질 즈음 그냥 찔러나 볼까 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와 안 읽었으면 나만 손해 볼 뻔.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기도 짧거니와 매끄러운 문장 구조와 전개. 그리고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메시지로 인종차별이 단순한 이분법적인 선과 악으로 규정되는 특수 영역이 아님을 일깨운다. 일반 대중의 일상과 유리된 폭력적 시선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깊숙이 내장된 차별과 편견이고 우리 모두가 답습해온 병리적 행태임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