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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Nov 09. 2019

일본 지폐 얼굴에 우리는 왜 분노하나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21>>



지폐의 도안은 어떤 의미에서 그 나라의 상징이고, 그래서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2009년 여성(신사임당)이 5만 원권의 얼굴로 등장했을 때, 위인 기준에 드디어(?) 여성이 들어갔는가 하고 각별하게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이 이황 세종대왕 신사임당까지.. 주로 ‘학문’적 인물들이 대한민국 지폐를 장식하는 것에서, 좋든 싫든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보게 되고 현재 우리의 가치 기준을 파악하게 된다.


일본이 2024년 화폐 얼굴을 교체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만 엔짜리의 인물 때문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모델인 2024년 발행 예정 일본 만 엔권


시부사와 에이이치 라는 사람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 사람은 수백 개의 주식회사를 만들거나 만드는데 간여했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기업에 있다고 ‘먼저’ 깨닫고 죽을 때까지 기업을 늘리는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창의적이고 집요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기업들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니 일본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일제의 강제 병합 전부터 일본 화폐의 조선 유통을 도모한 경제 침탈자라는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나왔다. 더 나아가 화폐 교체에서도 일본은 결코 한국을 배려하지 않는구나,,, 질타가 이어졌다.


이번 평행선도 늘 그렇듯 서로를 백안시하면서 또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과거 화폐의 얼굴을 살펴보면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훨씬 넘어서는 난감함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 화폐가 위조에 취약하자 1881년에 새로운 화폐를 만들었다.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화폐 얼굴은 누구였을까?

진구황후라는 사람이다.

진구황후를 얼굴로 한 1881년 일본 지폐


이 사람은 고대 일본에서 삼한정벌, 즉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인물로 팽창기 일본이 추앙한 여성이다. 문제는 삼한정벌의 허구성 이전에 이 사람이 과연 실재 인물인지 아닌지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대외팽창의 열망에 사로잡힌 일본은 당연히 실존인물이라고 과대 포장하는데 열을 쏟았다. 당시 일본이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진구황후를 그려 넣은 지폐로 모든 설명이 끝난 셈이다.


급기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직후 일본은 1911년에 조선은행권, 즉 조선에서 유통하는 지폐를 발행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원 10원 100원 등 모든 지폐에 똑같은 얼굴이 그려졌고 식민지 시기 내내 바뀌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인가 저 할아버지는?

다케노우치노 스쿠네를 새겨 넣은 식민지 시대 조선화폐


다케노우치노 스쿠네 라는 사람? 사람이라고 하기는 뭐한 게 무려 다섯 천황을 모시며 3백 년 가까이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물이 조선 화폐의 얼굴로 독보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얘기한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을 보좌한 부하라는 그들의 전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본 화폐는 삼한정벌을 했다는 진구황후를, 조선 화폐에는 그 정벌을 도왔다는 충실한 부하를 그려 넣은 것이다.


1945년 일본은 망했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당연히 저 가공의 침략자들이 패전 일본에서 감히 화폐의 얼굴로 나서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후 일본 지폐는 ‘정말로’ 실재했던 인물들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 실존 인물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시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국력이 성장하고 아시아 이곳저곳으로 팽창하던 시대를 빛낸(?) 인물들이다.


그래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천 엔짜리를 장식했고, 조선 멸시의 원점을 제공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우리는 만 엔짜리에서 마주하고 있다.

1980년대 발행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새겨진 천 엔권


그리고 이번엔 메이지 시대에 자본주의를 만든 그들의 위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등장한 것이다. 다음에는 또 누구일까...


진구황후와 다케노우치노 스쿠네 같은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근대화 역사를 거듭거듭 강조할 테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처를 건드리게 될 것이다. 일본의 그 '잘난' 과거가 곧 한반도 침탈의 역사였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침략 역사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우리는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감성을 장착하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차라리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AKB48 같은 21세기 아이돌이 화폐에 등장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몽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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