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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Oct 10. 2019

1945년 점령자 미군, 일본을 '재교육'하다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20>>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한 일본은 말 그대로 조건을 따질 입장이 결코 아니었다.     


머리를 조아린 채, 미국이 규정한 ‘일본의 잘못’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받아들이고 “바로 시정”할 자세로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든 반성할 준비가 돼 있는 일본에게 미국이 무섭게 꾸짖은 요점은 매우 명확했다. 점령군 미군이 아예 일본 국민을 상대로 공식적인 교육을 진행함으로써, 일본의 잘못은 이런 것이라고 만천하에 선포했기 때문이다.     


연합군 사령부 즉 GHQ는 주도면밀했고 상징성에 대단한 신경을 쏟았다. 일본이 미국에 전쟁을 시작한 날, 그러니까 진주만을 기습 공습한 날에 맞춰 ‘일본 국민 정신 교육’에 돌입했다.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 진주 미군들 (출처 :YAHOOJAPAN)


GHQ는 1945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 4주년을 기해 일본 각 신문사에 ‘태평양전쟁사’를 매일 연재하도록 지시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대해서 불과 몇 달 전까지와는 180도 정반대인 해석을 ‘공인된 설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방송도 동원됐다. 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이튿날인 12월 9일부터 NHK 라디오를 통해 “진상은 이것이다”라는 제목의 교육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 매주 일요일 밤 8시, 당시 최고의 골든타임에 한 편당 30분씩 10회에 걸쳐 교육 방송을 내보냈다. “진상은 이것이다”는 신문에 연재된 ‘태평양전쟁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 두 교육은 같은 내용의 활자판과 방송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의 상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주겠다고 나선 것이니 눈으로 귀로 동시에 강도 높게 세뇌 작업을 벌였다고나 할까? 일본인들은 절대자의 질책에 ‘그래 우리의 잘못은 이것이야’라고 하여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제목은 ‘태평양전쟁사’지만 1941년 미국과 전쟁을 넘어  ‘잘못된 과거사’의 시작과 끝에 대한 유권해석임에 주목해야 한다. ‘침략국가 일본이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잘못을 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처참한 종말을 맞았다’고 반성의 시기를 명쾌하게 정리한 교과서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 자료에 우리에 관한 내용도 들어있을까. 일제가 조선에 가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추궁도 포함돼 있을까?    


교육은 1928년 만주 군벌 장쭤린이 열차 폭발로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장쭤린 폭사는 1931년 만주사변, 즉 일제의 만주침략의 사전 작업이라고 역사적 의미가 부여된 사건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신교육은, 만주사변부터 기술하고 있고, 다시 말해 만주사변부터가 일제 침략 역사다, 즉 일본의 잘못된 길이 시작됐다는 관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만주침략에 나선 일본군 (출처 :아사히신문)


미군정은 태평양전쟁사의 부제를 아예 ‘만주사변부터 무조건 항복까지’로 달아 1931년부터 1945년까지 그 15년 간이 일본의 ‘일탈기’ 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미국의 가르침을 100퍼센트 불만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일본에게, 미국은 ‘자 여기부터’라고 1931년 위에 기준 말뚝을 확실히 박아줬다.

    

하여튼 식민지 보유 국가라는 ‘같은 입장’, 그리고 1945년의 상식으로는 미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 자체를 ‘죄악’으로 문제 삼기란 몹시 '비현실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꾸지람은 미국의 교육 커리큘럼에서 빠져있었던 게 현실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뭐든지 반성하고 잘못했다고 할 준비가 돼 있는데, 목줄을 쥐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준 미국이 1931년부터가 잘못이라고 선을 그어 줬다. 1910년, 조선 병합, 식민지 지배 같은 '과거사'는 일본인들에게 참회와 속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이마저도 미국의 일방적 강요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이런 세력은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른 일본인들의 상식은, ‘파멸로 끝난 우리들의 비극은 만주 침략부터’라고 자연스레 형성돼왔다. 조선 식민지배는 그들의 반성 밖에 놓였고, 이에 대해선 힘과 권위를 가진 추궁도 받지 않았다.    


해방 후 우리가 마주한 국제질서란 실은 이런 것이었다. 일본이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 조인을 한 것은 1945년 9월 2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9월 2일을 승전일로 기념하고 있다. 중국은 그 이튿날 대규모 공식 행사를 가졌기 때문에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나아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미군정 시기 맥아더 사령관과 히로히토 일왕(YAHOO JAPAN)


가만히 생각해보면, 8월 15일은 일본과 우리에게만 기념되고 있다. 일본은 ‘종전일’이라고 패전이란 말 대신에 교묘한 용어로 기억하고 있고, 우리는 광복절이다. 기념하는 날짜만으로 볼 때는 연합국이 한 묶음이고, 일본, 한국이 묶인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과 싸운 연합국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 즉 승자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세상에 공식적으로 인정한 날을 기념하지만, 우리와 일본은 일본제국이 이제 끝이라고 스스로 선언한 데 맞춰졌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차이는 중대한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우리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 말이다.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날이 아니라 일본이 “나 졌어요”라고 스스로 포기한 날이 특별한 날이 되는 이 차이는, 전승국들의 잔치에서 정작 온갖 고통을 당해온 피해자 한국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기구함을 예고하고 있다.


‘반성 없는 일본’이란 의외로 복잡하고 뿌리 깊고 그래서 우리에겐 쉽지 않은 벽이다. 뻔뻔한 일본 뒤에는 식민지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는 강대국의 논리가 수십 년간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꽤 강력한 발언력을 가진 국가가 돼, 이 엄청난 벽이 잘못된 것이라고 계속 두드리고 있다.     


실은 1945년부터 했어야 하는 두드림이지만, 국제사회의 오랜 무관심을 뚫고 이제 드디어 매우 세게 두드리고 있고 상대는 느닷없는 두드림이라고 맞서고 있는 게 지금 한일 대치의 이면이자 본질이다.


광복 74년,  과연 국제사회는 이 두드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벽은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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