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19>>
1. 특별한 담화
1995년 8월 15일,
하얀 눈썹에,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일본 총리가 전 세계 앞에서 사죄의 뜻을 밝힌다. 일본의 역대 어느 총리 어느 정치인한테서도 듣기 어려웠던,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담긴 담화,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무라야마 담화 중 일부)
당시 이미 70살, 전쟁에 끌려갔었고, 권력욕은 없었던 노 정치인은, 자신에게 총리라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지위가 주어진 건 과거사를 제대로 해결하라는 천명으로 받아들였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그는 역사적 사명을 느끼고 있었고 총리 자리를 그 기회로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발표한 이 무거운 담화가 이후 역사에서 얼마나 강력한 무게감을 발휘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지금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다.
무라야마 담화 두해 전인 1993년엔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한 그 유명한 고노담화가 발표됐다. 1993년의 고노담화와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묶어, 일본의 ‘반성의 증거’로 판단하고 그 훼손을 막으려 우리 정부가 그토록 단호하고 간절하게 요구하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회당 출신으로 1994년 총리가 된 인물이다. 당시는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립정권을 이뤘고, 복잡한 정치적 역관계 속에 소수 정당인 사회당에서 총리가 나왔다. 사회당, 지금의 사민당은 정책으로만 보자면 공산당과 함께 자민당 아베 정권의 가장 강력한 반대 진영으로, 지금으로서는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은 거의 몽상 수준이다.
그만큼 1990년대 중반 일본 정치는 다이내믹하고 복잡한 환경이었고(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진지한 성찰이 담긴 담화가 나올 수 있었다. 요컨대,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사를 진심으로 반성하려는 일본 내 흐름이 반영되고 집결돼 특정한 환경에서 마침내 열매를 맺고 흔들 수 없는 그 무엇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이후 고이즈미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 정권과 무관하게 역대 총리의 담화로 핵심 가치가 전수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2. 존경 그리고 비난
그런데,,, 무라야마 총리가, 담화와 함께 진행한 아시아여성기금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판단이 180도 달라진다. 1995년 7월 무라야마 정권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이른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든다.
한국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지금까지 뜨거운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돼 왔다.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일본 정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얕은 꼼수’라는 한마디로 모아진다. 입법을 통한 정부차원의 배상이 아니라 민간기금 형태로 보상을 추진한 것은, 반성의 주체에 정부를 놓지 않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은 이 기금을 통한 해결을 계속 진행했지만, 받아들이는 우리 쪽의 거부로 (약 30%의 할머니가 이 기금을 수령한 것으로 일본 측은 밝히고 있다) 이 해결방법은 실패로 귀결됐고, 지금까지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실하지 못한 태도의 상징으로 규정돼 왔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식민지 지배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반성한 무라야마 총리가(혹은 그 정권이) 식민지 지배의 핵심 죄악 중 하나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서는 꼼수를 부렸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같은 시기에, 아니 동시에 진솔한 반성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 꼼수를 부리는 게 가능한 것일까?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 정치가들은 원래 이렇게 술수와 기만에 능하다고 봐야 하나? 만약 그렇다면 무라야마 담화조차도 그 가치를 평가절하했어야 하지 않을까? 또 만약 교묘한 이중 전술이 있었다면 그 부분을 명백히 파헤치는 게 우리의 책무 아니었을까?
이런 파악과 분석과 설명 없이 무라야마 담화와 아시아 여성기금을 판단해왔기 때문에 우리 인식 속의 무라야마는 종잡을 수 없는 좌충우돌의 인물이 돼버렸다.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훌륭했던 무라야마 총리가 아시아여성기금에서는 아주 괘씸한 인물이 되는 극과 극의 혼란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지난 20년 이상 계속돼왔다.
혹시 무라야마 총리 스스로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할 때는 자신들의 올바른 의지가 반영됐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은 우파의 반발로 민간기금이라는 이상한 형태가 됐다고 고백했다면 이 불일치가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는 아시아여성기금을 불가피한 현실적인 그리고 나름대로 타당한 해법으로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성공적인 결말을 짓지 못한데 대해 지속적으로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그의 아쉬움은, 그의 해결책은, 그의 비전은, 그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3.. 무라야마를 통해 우리를 본다
우리의 채점 기준에 따라서 좋은 인물과 나쁜 인물로 왔다 갔다 하는 무라야마 전 총리의 두 얼굴이 급기야 충돌하는 장면이 2014년 2월 연출됐다. 당시 정의당 초청으로 무라야마 전 총리는 한국을 방문했다. 아베 정권 등장 이후, 아베 총리와 대비되는 양심의 인물로 올바른 반성의 상징으로 초청된 것이다. 당연히 그의 행보는 주목받았고 또 당연히 뜨거운 환대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는 한 칼럼을 발표한다. 제목은 “무라야마 전 총리의 환영 열기가 아프다” 칼럼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이 아닌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민간 위로 기금으로 매듭지으려 했던 그의 시책에 대해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으며, 여성인권운동사에도 큰 오명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환대가 벌어지고 다른 한쪽에선 오명을 남긴 인물이라고 맹비난하는 이 곤혹스러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베 정권한테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라고 반성의 진정성으로 무라야마를 인용하면서, 위안부 문제에서는 일본 정부 최악의 잔꾀로 무라야마를 인용하는, 이런 중층적인 사고가 우리 사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돼 왔다는데 주목하고자 한다.
즉, 무라야마 총리는 우리에게 이중적인 인물인데, 정작 ‘왜’인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점이 참으로 신기하다. 그냥 무라야마라는 인물, 무라야마 정권이 그렇게 반성도 했다가 꼼수도 냈다고 생각할 뿐이다. 무라야마는 일본 반성의 토대를 만든 인물인가? 아니면 꼼수의 원조인가?
그는 그냥 가만히 서 있는데 우리가 앞과 뒤로 돌아가며 좋은 사람, 아니 나쁜 사람, 이렇게 번갈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무라야마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양심의 인물이거나 혹은 꼼수의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안이하고 피상적인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24년 전 무라야마 정권의 건강함이 어디서, 왜 왔으며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천착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아베 정권이 어디서, 왜 왔으며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따져보지 않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우리는 분노는 해왔으나 정작 ‘왜’라는 질문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일본과 일본인들을 현상으로만 바라보고 그 현상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일본과 거대한 대결을 이겨내려면
그들이 왜 이러는지 그들의 이면과 맥락과 복잡함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읽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