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을 만난 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놀랄만큼 똑같은 교수님에 비해 나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결혼은 했니? 일은 하니? 요새 뭐하니?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방송작가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작년기준) 19년차라고 하자 교수님은 아득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ㅡ 아이고. 험한 데서 꽤 오래 버텼구나. 그 말이 마법주문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거쳐온 나날을 지나 시작했던 지점까지. 액자 바깥으로 빠져나와 내가 있는 곳을 보았다, 이게 험한가.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 어디라고 안 험난할까.
다만 대학시절의 나까지 내려가보니 그때의 계획과 지금은 꽤 차이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세운 계획에 따르면 10년정도 작가를 하고, 30대 초반 쯤 어느 정도 세상을 알게 되면 (* 그때는 그럴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다음, 대학원에서 못 다한 공부를 하고 육아와 드라마 쓰기를 병행하며 살 줄 알았다. 당시 남자 친구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그 애는 이런 말을 했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학생 끝나고 사회에 나오면
너 오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환영하며 받아 줄 사람도 없어. 네가 필요 없는 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버텨야 해.
그게 사회란 거야.
냉정한 녀석. 응원은 못 할 망정 후추를 뿌리고있네 했지만 조목조목 맞는 말이었다. 공채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 프리랜서 작가의 입문이란 탑승권 없이 기차에 뛰어서 올라타는 기분이었으니까. 타는 것도 쉽지않지만 죽기 살기로 뛰어서 탄다해도 버티기 쉽지 않은 생존의 나날. 일 할 때는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빠서, 일하지 않을 때는 돈이 없고 앞날이 막막해서. 오래 앉을 수 있고, 뷰가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의자뺏기처럼 눈치싸움을 하거나 경쟁을 해야 하고, 천재지변 같은 게 불시에 쏟아지는(이를테면 갑작스런 방송 폐지 같은) 그래도 어쩌랴, 기차에서 내릴 수 없으면 이쪽으로 더 밀지 마! 하며 팔꿈치에 각 세우고 버티는 수 밖에.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몸도 마음도 털렸지만 어느 새부터 버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버티지 않고 도망가는 게 책임감 없는 행동 같았다. 그런 나의 안정적인 삶은 거리가 멀었다. 잠깐 남의 의자에 앉았다가, 빽 좋은 사람이 오면 비켜주고, 맨 바닥, 짐칸으로 비켜났다가 의자에 다시 앉기를 반복하며 버티는 동안 기차는 크고 넓어졌다. 공중파 3개 뿐이던 방송국은 케이블이니, 종편이니 기차의 칸도 량도 늘어났고 타는 사람들도 우후죽순 늘어났다. 견고한 벽이라고 믿던 것이 무너지면서 세계가 흔들렸다.
5년, 10년, 15년. 밑창 얕은 운동화를 신었던 내 발에 굽높은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소위 연차가 올라가자 전속력으로 뛰기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위태로운 상황에도 발바닥에 힘주고 버텨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요즘의 나는 과거의 나를 남처럼 다시 보았다.
아득바득 혼자 버텨왔다고 생각했던 독기어린 얼굴에서 줌아웃해 보면 프레임 밖에 날 지탱해 준 이들이 있었다.
그걸 깨닫자 갑자기 확 낯이 부끄러워졌다.
혼자 그 길을 걸어 온 게 아니야. 조언이었건 욕이었건, 칭찬이건 미움이었건, 그 때의 널 지금으로 만든 게 뭔지 잊으면 안돼, 하고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휘발된다. 아마 내게 소중한 기억들 중 많은 것이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기록해 두기로 했다.
더 많은 것이 잊혀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