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랑해요
연말이다. 언제부터 연말이 설레지 않기 시작했던가.
20대의 연말은 대부분 해외에서 보냈다. 대만에서 친구들과 단체로 클럽에 가기도 하고 불꽃놀이를 보면서 밤을 새고 길을 걷기도 했다. 때로는 영국의 친구 가족들과 함께 전통식 크리스마스 식사를 즐기기도 했고 뉴욕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서 홀로 여행자 기분을 잔뜩 내기도 했다. 상하이의 호텔 고층 라운지에서 샴페인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내가 하는 거라곤 집에 콕 박혀서 이렇게 타이핑이나 치고 앉아있다. 아니 이 삶이 나쁘다는건 아니다. 따뜻한 집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누리는 여유. 가끔은 근처에 살고있는 언니와 밥도 먹는다. (이번 크리스마스 저녁도 함께하기로 했다.)
몇 주간 엄마 병원에 찾질 않았다.
위드코로나가 시작되어 내가 너무 많이 놀러다녔다는 핑계로 병원에는 좀 조심해야할 것 같으니 연말에 두문불출하다가 찾아뵙겠다고. 홀로 그리 생각했다.
고작 시애틀과 하와이를 다녀온 직후에 엄마를 보러 잠깐 다녀온거. 그게 다였다.
그러다 연말연시가 되니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졌다.
크리스마스 같은 건 전혀 챙기지도 않는 집인데 어째 연말 분위기이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그 누구 하나도 쓸쓸하지 않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빠에게 전활 걸었다.
"아빠! 엄마 병원 가셨어요?"
["엄마 병원에 확진자 발생하여 아무도 못간다. 12월 31일까지는 아예 폐쇄"]
"엄마는 괜찮아요?"
["응"]
"음성 나왔어요?"
["응"]
혹여나 잘 우는 막내딸 혼자서 질질 짜고 있을까봐 작게 줄여서 말하시는건 아닐까 했는데 감사하게도 엄마는 확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나니 혼자 있을 엄마 걱정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병상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움직임도 하지 못하고 눈만 그저 깜박거리고 약간의 손 움직임으로 본인의 의사표현을 하고 있는 엄마.
아무도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엄마는 얼마나 외로울까.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제가 영상 편지 보내면 간병사님께 전달해주실 수 있어요?]
[하지마]
[왜요?]
아빠의 말로는 간병사님의 갑질이 도를 지나치고 있다고 했다. 엄마의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우리도 간병사를 고용하고 바꾸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우리 엄마처럼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본인 의지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환자들에게는 간병사분들은 절대 갑같은 존재인거다. 24시간 같이 있는 건 그분들이니 우리가 그 분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해달라는대로 다 해줘야 그래야 우리엄마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을거라는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고작 영상편지 하나 못 전달할 정도라니.
물론 우리 아버지가 보수적인 경상도 양반이라 싫은 소리나 부탁 같은 걸 못해서 그럴 확률도 매우 크지만 울컥해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다.
"아빠! 아침 드셨어요?"
["먹었다"]
"뭐 드셨어요?"
["뭐 밥에 반찬가게에서 사놓 반찬들 뭐 먹었다"]
그 아빠에 그 딸이라고 나도 혼자 있으면 잘 안챙겨 먹는데 그 큰 집에 덩그라니 홀로 있을 아빠가 뭘 제대로 챙겨먹을거란 믿음이라곤 1도 없었다. 뭘 드셨냐는 말에 얼버무리는 모양이 분명 어제 맥주 마시다가 주무셔서 좀 전에 일어나신 느낌이었다.
아빠에게 조잘조잘 근황을 물었다. 나는 아빠의 베스트 프렌드 막내딸이니까. 아빠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한가지 달라진게 있다면 말 끝에서 한숨이 느껴진다.
체념한 사람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어쩌겠니. 그럴수 밖에 없지. 그런 체념. 너무 많은 노력을 하고 많은 기다림을 했고 많은 투자를 했지만 결국 변화하지 않는 현실을 지독하게 알아버린 사람의 풀죽은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는 그렇게 느껴졌다.
"병원 상황은 어떤거예요?"
생각보다 병원 상황은 심각했다.
엄마가 계시는 재활병원은 장기로 입원해있는 노인분들이 많은 병원이다. 그리고 개인 간병인들이나 보호자가 직접 간병을 하기에 출입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물론 까다롭게 체크한다고 하여도 직원이 없는 주말같은 경우엔 대학 병원들에 비해 좀 더 자유로운 편.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원래 쓰시던 병실에 3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창문 옆에서 바람도 살살 들어오던 간호사실에서 가깝던 병실이었는데 그 당시 엄마를 돌봐주시던 간병사님이 대뜸 자꾸 병실을 옮겨달라고 하셨다. (아마도 다른 간병사와의 기싸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병실을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추석 보너스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돈에 대해 푸념을 하며 그 분은 그만두신다고 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간병사분이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럼에도 그분 덕분에 엄마는 코로나 확진자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4인실 병실인 그 곳에 3인이 확진이 되었는데 맞은 편 병상에 계시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던 분은 코로나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했다.
갑자기 죽음이 눈앞에 턱하고 다가온 느낌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쩌지?
솔직히 말하건데 나는 엄마가 너무 오래 사시지 않았으면 했다. 엄마 병은 나을 수 없고 그렇게 외롭고 고독함을 견디다가 천천히 건전지가 떨어진 시계처럼 시침이, 분침이 그리고 초침이 멈추어 고장나버리는 그런 병이다. 그런데 얼마전까지도 뵜던 분이 심지어 엄마보다 훨씬 건강하셨던 분이 코로나로 인해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두려움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 다음 주에 내려갈게요. 연말 같이 보내요"
["그러자"]
"아빠 사랑해요"
["그래"]
아빠와 전화를 끊고 입술을 깨물고 꺽꺽 거리며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슬펐다. 코로나가 코 앞에 다가온 것 보다 엄마가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고독할까.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이 치솟았다.
나는 왜 위드코로나라고 놀러만 다녔지? 위드코로나가 되었으면 엄마랑 좀 더 붙어있을걸. 이제 엄마를 다신 못 보면 어떡해.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다 울음을 멈췄다. 어쩌면 이 슬픔에 이골이 났나보다. 그간 있었던 위급한 순간들, 차마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절망적인 장면들에서 수없이 슬픔을 겪었기에 전화로 전해오는 소식으로 그려지는 모습에는 더이상 울음이 나지도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엄마는 못봐도 아빠는 볼 수 있으니까 아빠랑 시간 보내면서 행복한 연말 보내는 것.
이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인내심이며 지구력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째 요즘은 기다리는 방법을 조금씩 스스로 훈련하고 있으니 이 기다림의 마음을 엄마에게도 쓸 때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엄마를 다시 만날 날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 그동안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웃을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하하하 웃어버리는거다. 슬플때 슬프더라도 그 슬픔 때문에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눈물에 잠식되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는 건 참 괴롭다.
특히나 연락도 닿을 수 없어 그 사람이 어떠한 상황을 겪고 있는지 어떠한 마음 상태인지를 모를 때는 미쳐버릴 것 같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가 다시 만날 날을, 다시 손을 맞잡고, 다시 포옹을 하고, 다시 함께 웃을 날을 기다리는 것 뿐.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이 막연한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저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 한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으니 그 과정에 너무 아파하고 자책하고 슬퍼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