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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Feb 08. 2022

체념과 수용 사이에서


3주만에 정신과에 다녀왔다. 예약은 2시 30분.

눈은 아침 8시쯤 뜬 것 같은데 침대에서 몸을 빼내기까지 세시간이 걸렸다.

월 초에 등록했던 학원은 첫 수업 이후에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3주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보통은 1~2주에 한번씩 가던 정신과를 해외 출국이 아닌데도 이렇게 오랜만에 간 적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적당한 거리의 친절과 인자함을 보여주셨다. 정신과에 가면서 이제 약을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과 다르게 감정을 자극하는 사건들이 크게 없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나 스스로의 감정을 인식하고 분리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확실해졌기때문에 감정에 매몰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나는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3주전에도 있었던 무기력함이 여전히 있지만 뭐 당장 먹고 사는데 지장 없고 학원 안나가도 뭐 크게 상관없으니까 역시 신경 안쓴다고. 그냥 내가 열심히 살아야하는 강박이 있는 사람인가봐요. (그러자 선생님은 '본인이 베짱이 성격이라면서요' 라고 했다. 맞다. 나는 똑똑한 게으름뱅이다.)


설날에 엄마도 잘 만나고 왔다. 엄마를 만나기 전 코로나 검사를 하여 음성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보호자 교대가 예전처럼 자유롭지가 않아서 우리는 몸은 차갑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병원 1층 로비 구석에서 엄마를 하루에 15분 정도 만났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온몸을 담요로 덮은채 겨우 만나야 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따뜻한 설날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 유독 추웠던 날에 아빠는 평소보다 더 일찍 엄마와 함께 병실로 돌아가시려고 했고 나는 그런 엄마의 손을 붙잡고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라고 칭얼거렸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언니는 병원을 나서며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엄마를 슬프게 만들어'라고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언니와 내가 감정을 대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고 나는 슬픔도 사랑이라면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엄마를 늘 보고싶어하는지 아끼는지 이렇게라도 알리고 싶었으니까. 이런 감정들에 대처하는 나를 보면서 무던해졌구나 스스로 느꼈다.


상담이 끝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선생님은 요즘은 악몽을 안꾸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최근에 꾼 외할머니의 꿈이 떠올랐다. 꿈이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지 않고 느낌으로만 느껴지는 데 이 꿈은 정말 너무 선명해서 꿈 안에서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다른 건 모두 잊어버렸고 할머니가 서계셨다. 마치 다크나이트의 하비덴트처럼 얼굴 반쪽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물론 그정도로 징그럽진 않았지만 할머니 얼굴색이 푸른 괴물의 색인게 너무 마주보기 힘들었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요"

할머니는 12월 말에 돌아가셨다. 나와 엄마는 11월 중순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하다가 2월 초에야 겨우 만났다. 우리 가족은 엄마에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계시는데 그것에 대한 마음이 엄청난 무게로 계속해서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담담하다고 느꼈던 마음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목구멍이 컥하고 막히는 느낌에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한번 눈물이 터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금 말랑해진 느낌이 들었는지 이런 저런 말들이 더 나왔는데 그 문장의 끝부분은 대부분 이랬다. 


"언젠간 다 지나가고 과거가 될 일이잖아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요."

나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결국은 지나갈거라고 그러니 아파도 뭐 괜찮다고 언젠간 나아진다고.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수용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셨다. 지금 내가 느끼고 표현해내는 감정들이 체념이나 포기일 수도 있지만 수용하는 단계에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고 그 떠나는 과정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나처럼 다소 더 어려운 마음을 겪을 수도 있게 되는데 선생님은 그걸 애도의 기간을 가진다고 표현해주셨다. 그저 나의 애도의 기간이 유독 잔인하고 길고 슬픈것이라고 했다. 그 애도의 기간에서 감정을 맞이하고, 경험하고, 표현하고, 받아들이고 이런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우는 일이 참 없다 생각했는데 진료를 끝내고 수납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울었다.

"이제는 약을 더 줄여도 될 것 같아요." 나는 울었지만 수용의 단계를 거치면서 나의 슬픔은 조금 무뎌지고 있기 때문인가보다. 그 슬픔의 칼날이 내 마음을 찌르기에는 예전만큼 뾰족하지 않은가보다.

약봉투를 가방에 넣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 싫어 무작정 걸었다. 

걷다보니 한강이 나왔다. 반짝이는 강을 보는데 위험 경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 구간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급속하게 바뀌니 들어가지 말라고 써있었다. 산책로 바로 옆이라 마치 야트막할 것 같아 보이고 참 잔잔해보이는데 여기에 들어가면 어떻게 휩쓸려갈지 모른다고 하는게 마치 삶처럼 느껴졌다. 


인생에 대한 많은 문장들이 있지만 특히나 찰리 채플린의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파도도 치지 않아 잔잔해보이는 이 강물도 예측할 수 없이 깊고 빠른 것처럼 내 인생을 뒤에서부터 쭉 돌아본다면 분명 이 순간도 나에게 엄청난 깊이와 배움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그저 순간을 겪어내는 순간이 고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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