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수년 전, 회사원 시절 사내 영상제작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매년 3월이 되면 고정적으로 제작하는 콘텐츠가 있었으니 바로 직원의 초등 입학 자녀가 사장님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 영상이었다. 사장님이 입학 축하 편지와 선물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가족친화기업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이벤트였고, 8살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많은 직원들이 영상을 보며 힐링이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회사 최고 권위자에게 눈도장을 찍는 기회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경쟁이 펼쳐지기도 했다. 직원들이 찍어 보내는 영상에는 갈수록 정성이 더해졌다. 최신 아이돌 댄스를 선보이거나 사장님과 똑 닮은 초상화를 그려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그것들을 수합해 보기 좋게 편집하고 사내 홈페이지에 게시할 때면 나 또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해,
특이한 영상을 받고 갸우뚱했다.
화면 속에는 자녀가 없었고, 엄마인 직원 본인만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00 이가 너무 부끄러워해서...
제가 대신 찍었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내 아이가 7살이 되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가야 한다.
그전까지 과연 나아질까?
머릿속이 하얘진다.
초등학교 도움반을 검색하며 잠을 뒤척이다 문득 예전 그 영상이 떠올랐다.
정말... 단지 아이가 수줍어해서였을까?
어쩌면... 혹시...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말하기 힘든 어떠한 장애를 가진 아이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목구멍 깊숙이 뜨거움이 올라온다.
그 직원에게는 얼마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까.
내 아이의 어려움을 전 직원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남몰래 쓴 눈물을 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알았다.
세상에는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는 아이들이 있음을.
8살이 되어도 자연스럽게 말하기 힘든 아이가 있으며, 사람은 물론 카메라와 조차 눈 맞추기 어려운 아이도 있고, 약속된 시나리오대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아이를 키워내야만 하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님에도 혹여나 내 탓일까 자책하는 엄마가 있다는 것을. 그게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내가 아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지 출처 https://medium.com/@kenhensley/icebergs-and-spiritual-growth-1a92a490483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