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재택근무, 뜻밖의 이득
지근거리 : 지극히 가까운 거리
여기서 '지극히'는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할까.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실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혹은 도보로 10분 이내?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아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여 나는 내 기준에서 아이와 '지근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재택근무가 허락되는 회사와 보직
도보로 등하원 가능한 위치의 어린이집에 당첨!
복직한 2021년 2월 1일부터 현재 9월 28일까지 사무실로 출근한 날짜는 고작 46일. 코로나가 잠깐 잠잠해졌던 5-6월에 그나마 자주 사무실로 출근했고 회사에 확진자가 발생한 8월에는 전일 재택근무를 했었다. 복직 이후에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삶에 비교적 순탄하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재택근무' 덕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일하는 엄마들이 흔히 겪는 '분리불안'을 경험하지 않았으니깐.
2012년 일을 시작했다.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 두 달간 '가족돌봄휴직제도'를 사용한 것 외에는 일하기를 쉬지 않았었다. 만 9년 근무를 채워가기 직전 나는 출산휴가에 돌입했다. 기분이 묘했다. 회사 인사 시스템 상에서 '대기' 인원풀로 넘어가는 걸 보며 나에게도 올 것이 왔다라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쉬어감은 물론 잠깐이었다. 출산 예정일을 3주 앞둔 휴가였다. 잠깐의 휴가를 끝으로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필요로 하는 반려인간을 맞이했다. 나의 모든 생활패턴은 무조건적으로 아이에게 맞춰졌다. 책 읽는 시간, 생각하는 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상시간, 밥 먹는 시간, 수면 시간,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도 아이의 협조가 없으면 얻어낼 수 없는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산후조리원을 벗어나 집에 온 순간부터 우리 집에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한 작은 사람과 24시간을 통으로 붙어 지내는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많은 맞벌이 가정이 출산 직후에는 엄마의 육아휴직 사용을 당연시 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다소 분개하는 부분이었다. '왜 여자만!!!??'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모유수유'라는 육아패턴에서 기인한 문화라는 걸 출산 이후 깨달았다. 일단 모유수유를 한다면, 두시간 간격으로 가슴을 내어주기 위해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분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모두가 그 질문을 했다. 잠자는 동안에도 그런것이냐고. 그렇다. 새벽에도 칼같이 그 텀을 지켜서 일어난다. 통잠의 기적이 찾아오는 생후 150일 정도 전까지...! 먹는 사이의 시간 텀은 서서히 늘어나지만, 적어도 200일까지는 3시간 혹은 4시간에 한번은 먹을 것을 찾는 아이 옆에 꼼짝 없이 식량을 내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빠 가슴에서는 애석하게도 우유가 나오지 않으니 그건 당연히 엄마의 몫이 된다. 물론 모유수유를 매우 짧게 하는 케이스가 있으나(나처럼), 그런 케이스가 드물다보니 거의 모든 맞벌이 가정에서 출산 직후 육아휴직은 엄마가 쓰게끔 세팅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모유수유를 길게하는 힘든 삶은 스킵하게 되었다. 나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나의 몸이 3주간의 수유만을 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상관없이 나는 예정되어 있던 6개월의 육아휴직을 그대로 소진했다. 오로지 우리 둘뿐인 나날이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먹-놀-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생아와 영아의 가장 이상적인 생활패턴을 일컫는 용어인데, 말 그대로 배부르게 '먹고', 기분 좋게 '놀고', 푹 '자는' 패턴이다. 그러고 깨어나면 다시 먹고 놀고 자고를 반복한다. 그것을 네 번 하면 하루가 끝나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4번의 '먹-놀-잠' 동안 형성되는 아기와 엄마 사이의 유대와 애정은 정말 말 그대로 '그들만의 세상' 급이다. 내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작은 생명체와 24시간을 붙어있는데, 그 생명체가 심지어 너무 귀여운데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웃어주면 따라 웃고 조금만 장난을 치면 꺄르르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 들어본 적 없는 티 없는 육성 웃음을 들으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런 아이를 두고 갑자기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24시간을 옆에 달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덩그러니 집에 남아있고 갑자기 나 혼자 세상 밖에 나가는 것이다. 엄마들은 우스갯소리로 분리불안을 아이가 겪는게 아니라 '내가' 겪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무슨 말인지 백번 이해한다. 삼시세끼를 함께 하고, 화장실 갈 때도 문을 열고 함께하기도 했는데 갑자기 나만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눈 앞에 아이가 보이지 않다니. 너무 불안한 것이다.
내가, 오롯이 내가, 모든 것을 다 케어하고 다 책임졌었는데 그 수많은 듀티들을 하루 아침에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는 것이다. 나의 아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난데, 그 막중한 듀티를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니 사소한 것까지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다른사람이 운 좋게도 아이의 친할머니였지만, 처음부터 가족이 아닌 완전한 타인에게 아이를 맡겼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난다.
그러나 내가 복직하는 시점에 세상엔 재택근무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업문화가 좋아지고 일하는 방식에 대한 시도가 다양해져 재택근무가 도입되는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비상사태로 인해 얼떨결에 재택근무라는 걸 울며 겨자먹기로 도입하고 있었다. 변화가 급하면 잡음이 많다고, 근로자도, 기업도, 정부도, 학교도 이 상황에 쫓기듯이 적응하며 이 곳 저 곳에서 터져나오는 잡옴들을 급하게 막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라고.
복직 후 나의 스케쥴은 이러했다.
07:30 ~ 08:55 - 아이 기상 & 아침밥 먹이고 놀기 & 출근 준비
08:55 ~ 09:00 - 컴퓨터 세팅하고 출근!!!
09:00 ~ 12:00 - 오전 근무
12:00 ~ 12:40 - 아이 & 시어머님과 함께 점심 (가끔씩 남편도 함께)
12:40 ~ 13:00 - 커피 셔틀 & 산책
13:00 ~ 18:00 - 오후 근무
18:00~ - 거실로 퇴근!!!!
근무하는 동안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와 아이가 노는 소리, 아이가 우는 소리, 할머니의 달래는 소리, 목욕하는 소리.
근무 시간 중간 중간 화장실을 갈 때면 난 꼭 아이를 보러 갔다. 기껏해야 3분 정도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동안에는 뽀뽀도 열번은 할 수 있고, 둥가둥가도 해 줄수 있다. 그러면 찾아오려던 스트레스도 아이의 환한 기운을 못 이기고 '그게 뭐가 대수냐,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라는 생각과 함께 흐려지곤 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지금도 생활은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
시어머님이 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하원도우미를 고용했고 나는 여전히 같은 방에서 재택근무를 성실히 하고 있다. 하원도우미 선생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3시부터 6시까지 거실에서 노는 소리를 듣는다. 첫 날에는 아이 울음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한 달여가 지난 지금은 아이가 울어도 하원도우미 선생님이 금방 달래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동요하지 않는다. 별 거 아닌 일에 서러워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울고 있을 귀여운 모습을 잠깐 상상하며 손가락으로는 타자를 치고 마우스휠을 돌리며 열심히 일을 한다.
이렇게 나는 지근거리에 아이가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가끔 아이 컨디션이 맘같지 않은 날에도 방문만 열고 나가면 얼마든지 아이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지근거리'.
아이들은 태어난 지 12개월이 지나면, 뱃 속에 있는 동안 엄마에게서 받았던 면역력을 다 써버린다고 한다. 그러고 다시 자기 몸에서 스스로 면역력을 키워나간다. 그래서 12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가장 많이 아픈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이 시기에 직장을 그만둔다. 아픈 아이를 떼어놓고 꾸역꾸역 사무실로 출근했지만, 마음이 같이 출근하지 못해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 어린 아이의 아픔을 외면하고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많은 엄마들이 '기회'를 잃어가던 그 시절에도, '재택근무'라는 좋은 제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었을까 싶다. 그 시간동안 아이를 직접 보살피진 못하더라도, 지근거리에 있다는 안도감이면 많은 위안이 되었을텐데.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큰 위기 상황 없이 직장인의 삶에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건, 8할은 '재택근무'의 힘이었다.
아이의 눈을 보며 밥을 먹여주고,
문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꺄르르대는 웃음소리를 듣고,
출퇴근 길의 인파에 부대끼지 않고 문만 열면 나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한 달음에 갈 수 있는 근무환경.
이런 근무환경이 아니었다면 흔히들 말하는 '엄마의 분리불안'이 발동되지 않았을까.
코로나가 종결되고 나면,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지언정 이제는 그렇게 불안하진 않다.
아무것도 못 하던 아이는 이제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빌렸던 다른 누군가와 아이가 형성한 유대감도 나날이 두터워 지고 있으니 안심이다. 그렇게 나의 심리적인 '지근거리'는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엄마, 아빠 말고도 바깥 세상에 좋은 어른들이 존재한다는 사회의 좋은 면을 체득하며 그 어른들에게서 아이는 잘 커나가고 있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하원도우미 선생님이 퇴근하시는 저녁 6시,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의 사회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만나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짧고 찐하게 매일 확인한다. 마음을 다해서 놀아주고, 별 거 아닌 일로 같이 웃으며 마음 속 유대를 최대한 두껍게 두껍게 엮어내고 있다.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도 우리는 늘 이어져 있고, 그 거리가 '지근거리'라고 느끼게 만들어 줄 우리 사이의 실을 길게 늘어뜨리기 위해서.
아이가 커 갈수록 내 마음속 지근거리를 더욱 늘려가야 할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있어도, 직장에 있어도, 언젠가 자기 가정에 있어도 나와 '가까이에'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우리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게 나와 남편에게 남은 평생의 과제가 아닐까.
물리적으로 멀어도, 마음은 '지극히 가까이에' 있다는 안정감. 그게 진짜 '가족'이니깐. 아, 정말 어렵다!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