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듯 역동적인 육아의 기쁨과 시야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이 롤러코스터만 타고 사냐?
회전목마도 타고 다람쥐 통도 타는 거지.
사회생활 이후 내가 만난 두 번째 팀장님이 나에게 '부모가 되는 것'에 관해 저렇게 이야기했었다. 사실 팀장님 몇 세시냐고 물어본 적이 없어 여전히 그의 나이는 잘 모르나, 어찌 됐든 팀장님은 노총각의 시절을 보낸 뒤늦은 나이에 아빠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늦게 낳아보고 느낀 건데.." 라며 물꼬를 튼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대화였으니깐. 화려한 싱글에 비해 포기해야 할 재미가 너무 많아 보였다. 어린 나이의 나는, '놀이공원은 그래도 스릴이지'라고 속으로는 생각했었지만,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어 마음 한 켠의 아쉬움과 속상함을 저렇게라도 달래 보려는 것 같은 팀장님의 논조에 동의해드렸다.
'용돈'으로 에버랜드나 롯데월드에 가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다 해 봤을 고민이다. BIG3 티켓을 끊을 것인지, 자유이용권을 끊어서 이것저것 다 타다 올 것인지. 물론! 자유이용권을 끊어서 BIG3 티켓으로 이용하는 롤러코스터나 티익스프레스 자이로드롭 등만 타는 옵션도 있기는 하다.
나의 팀장님이 비유한 화려한 싱글과 부모로 사는 삶의 차이는 그런 것이었나 보다. 스릴 가득하고 짜릿한 놀이기구만 타는 것이 놀이공원 방문의 목적이었던 패턴은 잠깐 접고 가끔은 회전목마도 타고 다람쥐통도 타고 잔잔한 기구들을 타며 다른 재미를 찾아가는 것. 실제로 아이가 생기고나면 놀이공원에 간다한들 자이로드롭이 웬 말인가, 회전목마랑 범퍼카만 타게 될 것이다. 그런다한들, 꺄르르 대는 아이를 보며 부모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마음에 담아둔 적도 없던 그 멘트는 -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내 나이는 25살, 정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 집에 갇혀서 하고 싶은 것의 리스트가 늘어나던 어느 날에 문득 떠올랐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곳에 가고 싶다. 클럽이든 밤과 음악사이든 노래방이든 재즈클럽이든.
불판이나 숯이 있는 곳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다.
퇴근 후에 거나하게 술을 마셔보고 싶다. 왁자지껄!
남편과 심야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
퇴근길에 번개로 남편과 반주를 하고 싶다.
저런 생각을 했던 건 아기가 200일이 안 되던 시점이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 혼자서 이리저리 바쁘지만,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그렇게 지루해 보일 수 없는 일상일 것 같았다. 왁자지껄한 곳에서 빛나던 젊은 나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집에서 분유 타고 기저귀 갈고 이유식 만들고 자장가를 부르는 사람이 어느덧 내가 된 것이다. 어설픈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 같은 속도와 습득력으로 엄마가 되었다. 물론 '보육'에 한정된 이야기이긴 하다. 아직 나의 아기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으니까. '훈육'의 세계로 가면 바보가 된 듯 어버버 댈 테다. 어쨌든 이 시기의 나는 어쩐지 '시시한' 모습인 것 같았다.
놀이공원으로 치자면 회전목마, 조금 더 쳐줘봤자 범퍼카 밖에 안 되는 느낌이랄까. 생동감 넘치는 젊은이들이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임팩트 없는 놀이기구만 주구장창 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말 팀장님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싶었다.
물론 팀장님의 요는 이런 방향이 아니었지만. 팀장님은, 그래도 놀이공원에 갔으면 이것저것 다 타봐야 하지 않겠냐며, 사람이 롤러코스터만 타고 (어지러워서) 어떻게 사냐고 말했었다. 화려한 싱글 혹은 딩크(롤러코스터)도 좋지만 화려함을 포기한 부모의 삶(회전목마)도 한 번은 살아봄직하단 이야기였다.
물론, 놀이기구 고르는 것처럼 단순화할 문제는 아니지만 정말 넓게 보자면 '출산과 육아'도 취향의 영역이기는 하다. 사전적 혹은 철학적 정의에서 '취향'이라는 단어가 '가치관'보다 큰 영역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견해도 일종의 취향 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팀장님은,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산 선배의 입장에서 나에게 저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에서 우러난 멘트들이 조금이라도 부적합한 방식으로 발휘됐을 때 소위 말하는 '꼰대 취급'을 받지만, 적어도 그가 나에게 어떠한 방식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본인의 견지를 밝혔음을 안다. 나 또한, 무엇이 더 낫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물론 '나에게 있어' 무엇이 더 낫더라는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나은 것이 너에게도 나으리란 보장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각자가 선택할 일이다.
회전목마의 바깥에서 회전목마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엄마가 된 내 인생은 이제 평온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회전목마 바깥에서 바라보는 목마는 그냥 한 바퀴 크게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니깐.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바닥을 치고 내려오는 고속 하강의 스피드도 없고, 대롱대롱 매달려 머리가 뒤집어지는 스릴도 없다. 육아로 하루를 보내는 내 일상도 밖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이벤트에, 같은 루틴을 세네 번 반복하면 끝나는 하루.
그런데 그 생활이 갑갑하던 나도, 아기와 함께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니 다른 시야를 가지게 된다.
나는 이제 '한 번은 살아봄직하다'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왜 저렇게밖에 말을 안 해주나 싶었는데, 저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서인 것 같다. 감정의 농도가 너무 짙으면 단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듯하다. 검은색을 아무리 덧대도 검정은 검정인 것처럼. 아이가 생긴 후 내 마음은 백 곱절 천 곱절 짙은 농도의 기쁨으로 벅찰 때가 있는데 단어나 글로 표현할 수는 없다. 태어나서 겪어본 적 없는 기쁨이며, 나 자신이 한 행동도 아닌 것의 결과 - 목을 가누는 것, 뒤집는 것, 옹알이를 하는 등의 급격한 신체발달 - 에 이렇게 큰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저 귀엽기만 하던 '남의 아기'의 발달을 지켜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부모가 되면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가 앞으로 커갈 모습을 자주 상상하게 된다. 그랬더니 많은 것이 달라 보인다. 집 앞의 천을 산책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걸을 미래의 딸아이를 상상하고, 짧은 동화책을 읽어주면서도 스스로 책을 골라와 내 무릎에 앉을 아이를 상상한다. 책으로만 보던 걸 실제로 보여주게 될 미술관 박물관행 나들이도 상상하고, 외국의 미술관에 함께 가 있는 우리의 모습도 상상한다. 드라이브하며 스쳐 지나가던 산과 숲의 풍경에 캠핑의자에 나란히 앉은
우리 가족을 모습을 얹혀보기도 한다.
같은 자리에서 맴돌아도, 돌고 와서 새 회전을 시작할 때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되는 것처럼. 밖에서 보면 지루할지언정, 목마 위에 앉은 나는 계속해서 새로이 보게 되고 시야를 넓히는 내 안의 역동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임팩트냐, 잔잔하게 돌면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갈 것이냐.
둘 다 좋지만, 지내보고 나니 '자유이용권'의 삶도 해봄직한 듯하다. 겉으로 보는 나는 정말 잔잔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만은 요동치고 역동적인 감정의 경험치와 의미를 쌓아가고 있으니. 요즘 화제가 된 브랜드의 카피처럼 'As slow as possible'의 하루일지언정, '짧고 강렬하고 화려한' 겉치레는 없을지언정 들여다보면 조용하게 빛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어느 정도의 젊음이 가고 나면, 의미 있게 남는 건 이런 느림과 미색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회전목마'의 시기가 가고, '자이로드롭'에 다시 앉을 날도 오겠지라는 기대감도 지금의 시기를 잘 지나가게 하는 주문이기는 하다. 이 주문, 저 주문 잘 버무려서 지루한 듯 혼자 바쁜 육아 일상이 오늘도 잘 끝났다.
그런데, 이제 놀이공원에는 BIG3, BIG5 티켓 같은 건 없다고 한다... 아.. 옛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