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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복유지

소원은 공복 현실은 만복

by 허니베리
여러분, 더는 안 되겠습니다.
앞으로 제게 간식을 권하지 마세요.
몸무게가 세 자릿수가 되었답니다.

S 선생님의 비장한 목소리가 교무실에 나지막이 깔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면지에 글자 네 개를 큼지막하게 써서 출입문에 붙였다.



“이 문구, 맘에 드세요?”

내가 붙인 종이를 바라보는 S 선생님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스치더니 80년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듯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점심시간 외 근무시간에는 꼭 지킵시다. 공복 유지.”


교무실 안이 숙연해졌다. 다들 '공복 유지'를 소리 내어 되뇌었다.


여섯 명이 사용하는 교무실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났다.

아침부터 테이블에는 김밥, 유부초밥, 심지어 쌈밥과 과일이 놓였고, 냉장고에는 비상용으로 먹자고 했지만, 입이 궁금한 게 비상임을 일깨우는 떡과 빵이 채워져 있다. 책장은 주말 출근자(및 주중 출근자)를 위한 컵라면과 햇반, 담배를 끊은 분(과 기타 등등)을 위한 주전부리, 스페셜티 커피에 둘러싸인 커피 선생들이 즐겨 마시는 믹스커피가 칸칸이 들어차 있다.


평균 연령 50인 우리는 간식을 쳐다보기만 해도 살이 차올랐다. 하지만,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실습 지도는 여간 큰 에너지가 필요한 게 아니다. 게다가 학교 특성상 큰 목소리로 말하면서 동시에 수어까지 해야 한다. 서로의 노고를 잘 아는 우리는 안타까움에 음식을 챙겨주면서도 변해가는 몸매를 보며 얼핏얼핏 죄책감도 생겼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빠졌던 3kg은 개학과 동시에 순식간에 원상 복귀했다. 그램으로 하면 3천 그램, 고기로 치자면 다섯 근이다. 헐렁해졌던 바지가 다시 터질 듯했다.


공복 유지를 결의한 첫날이니, 모두 급식 전까지 침만 삼키며 견뎠다.라고 회상하고 싶지만, 일단 업무를 위해 커피 한 잔은 마셔야만 했다. 속쓰림 때문에 아메리카노 대신, 대기업에서 수많은 연구 끝에 탄생한 믹스커피로. 커피는 액체이니 아래로 쭉쭉 내려갈 테고, 위를 그저 흘러 지나가는 것은 공복이나 다름없다.


옆자리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훌륭한 로스터이자 나의 커피 사수인 S 선생님께서 믹스커피 두 봉지에 연유를 잔뜩 넣어 휘젓고 계셨다. 내 시선을 의식하신 선생님께서 자부심 담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믹스커피 활용 음료를 개발하는 중입니다.

입이 벌어지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쉬는 시간, 제과 선생님이 입가에 초콜릿 가루를 묻힌 채 올라왔다. 제과반도 열심히 연구하셨구나. 그러나 커피와 달리 고체를 위에 집어넣으셨으니, 커피인들의 공복 상태가 상대적으로 빛을 발했다.


점심 이후, 퇴근 시간까지 우리는 수많은 역경과 유혹을 딛고, 아침에 세운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 다들 새로운 과업으로 어찌나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뾰족뾰족한 말과 태도로 서로를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떡볶이와 기름기가 자글자글한 튀김을 주문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음식이 퇴근 시간 이후에 배달되도록 치밀하게 움직였다. 배달기사님이 음식을 픽업하기도 전부터 다들 안절부절못하며 회의용 테이블을 닦고, 일회용 접시를 꺼냈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제과 선생님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다급히 외쳤다.

선생님, 순대는 안 잊으셨죠?


떡튀순은 우리에게 위로와 단결을 선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밥은 절대 먹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밥’은 살찌니까.


오늘 유독 감정의 파고가 깊었던 만큼, 맥주를 꺼내 들었다. 맥주도 커피처럼 그저 뱃속을 통과하고 스치고 지나갈 것이었다. 가벼운 안줏거리가 뭐 있을까. 아들이 먹다가 남긴 닭 껍질이 딱이었다. 후 불면 날아갈 만큼 가벼운 껍질에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한 '액상' 양념이 발려있었다. 아들에게 순살만 발라 먹이며 키운 보람이 있었다.


안주가 부족했다. 아까 학생이 제빵 선생님 몰래 버려달라고 부탁하며 내민 호밀빵이 떠올랐다. 선생들의 혈관 건강을 위해 속이 채워진 부드러운 빵은 다 가져가고, 건강빵은 처리를 부탁하는 배려심 깊은 학생들이 실로 고맙다. 이런 날을 대비해 준비한 땅콩버터를 꺼냈다. 건강에 건강을 더한 느낌이었다.


취기가 올라오자, 음식이 계속 당겼다. 학교에서 공복을 유지해도 집에서 절제하지 못한다면 몸무게는 경신에 경신을 거듭할 것이다. 그때, 어제 먹다 남긴 멕시칸 음식이 떠올랐다. 채소가 많고, 밀가루도 아닌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는 얇디얇아서 먹어도 살이 '거의' 안 찔 것이다. 아마도. 남미 사람들이 그다지 날씬한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밥을 뺀 식사를 마친 뒤, 일기를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노트북과 나 사이에 또다시 장벽이 생겼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배에 가려서 노트북 화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까 공복 유지 때문에 까칠했던 교무실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떡튀순을 앞에 놓고 풍만한 남미인들처럼 호탕한 웃음이 넘치던 오후 시간을 떠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흐흐,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으면 복이 온다지 않나. 내일 아침 '공복 유지'를 '만복 유지'로 바꾸어 이런저런 복을 쓸어담아자고 제안해야겠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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