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트 어트
추석을 앞두고 옆집에서 전 부치는 냄새가 복도에 가득 흘러나왔다.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는 명절에 대한 설렘이 아닌, 고된 노동과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속이 불편해졌다.
명절 연휴 직전 친정아버지 수술 일정이 잡혔다. 그토록 염원하던 ‘전 부치기’에서 해방되었으나, 축하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추석날에도 입원 중이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수술 경과가 좋으셨다. 하지만 여전히 금식 중이시라 기력을 회복하지는 못하셨다. 짧은 면회가 아쉬워 병원 근처를 맴돌았다. 관광하는 외국인과 마주치면, 나 역시 여행지를 어슬렁거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시 병원에 들러 부모님을 잠시 뵙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둑어둑해졌다.
세 식구가 집에 모였으나, 타국에서 홀로 보냈던 명절처럼 적막하게 느껴졌다.
조리 도구를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모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게임 제작을 하고, 남편은 사무실에 나갔다. 나는 오랜만에 TV를 켜고 수북이 쌓인 빨래를 갰다. TV 화면이 마치 밥상인 것처럼 명절 음식이 한가득 펼쳐졌다. 예능뿐 아니라 뉴스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까지도 노릇노릇한 전을 입에 한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기름기 머금은 전의 냄새와 식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먹지 않아도 아는 바로 그 맛이었다.
명절에는 제발 전 좀 부치지 말자고, 남편에게도, 친정 부모님께도 그토록 외치던 나였는데, 정작 전이 없으니 전이 먹고 싶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 근처 마켓으로 향했다. 밤 아홉 시도 채 되지 않았고, 점포 안은 불이 환히 밝혀져 있는데 입구 유리문이 닫혀있었다. 순식간에 내 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핏 봐도 열 명은 족히 넘었다. 우리는 문을 조심스레 밀쳐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데, 문 닫을 시간이 아직 안 됐고....'
“명절이라 일찍 마쳤나 봐요.” 누군가 답했다.
명절 음식을 먹고 싶어 나온 사람도, 술이 떨어져서 나온 사람도, 명절 음식에 물려서 상큼한 디저트를 사러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는 달랐지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명절이라서.’
모두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고 잠긴 유리문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흩어졌다. 취소된 콘서트장에서 흩어지는 팬들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냉동실에서 언젠가 얼핏 본 적 있는 맛살이 떠올랐다. 마침, 대파도 있으니 어찌어찌하면 삼색 꼬치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입맛 사정이 절박해지니, 게으름이 밀려났다.
고대 유물을 발굴하듯 냉동실을 파내자, 맛살이 손에 잡혔다. 신라 토기 조각이라도 발견한 듯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유통기한 2023년 2월... ChatGPT에게 물어보니 냉동 맛살의 경우 6개월 이상 지났을 경우 폐기하라고 답했다. 봉투를 뜯어보니 색도, 냄새도, 모양도 변했다. 맛살이 아니라 내가 불량스러워 보였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냉동실에는 학생들이 제빵 선생님 눈을 피해 내게 처리를 부탁한 바게트, 호밀빵이 가득 차 있었다. 전을 부칠 만한 재료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얼마 전 마트에서 사서 얼려놓은 어묵바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레!
어묵바는 생선류와 채소로 구성되어 있고 기름으로 튀겼으니, 맛살이 들어간 삼색전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게 냉동실에 들어갔던 이유가 있었다. 심심하고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떡볶이가 생각났다. 다이어트를 위해 1/3만 먹고, 남겨놓았던 떡볶이.(비록 같이 시켰던 순대와 튀김은 다 먹었지만.) 그렇다, 나는 다이어터였다. 하지만 얼마 전 깨달은 바와 같이 액체는 위를 흘러갈 뿐이니 국물만 먹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어묵바와 맛 조합도 딱 맞고.
떡볶이 국물을 조심스레 더는데 떡이 숟가락 등에 쩍 하고 들러붙었다. 떡의 애교 어린 몸짓을 매몰차게 무시할 수 없어서, 국물과 함께 어묵바 쪽으로 슬쩍 옮겨줬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명절에 떡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다이어트한답시고 우리나라에 방문한 외국인들도 챙겨 먹는 고유 음식을 외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게다가 떡볶이 재료는 밀떡도 아닌 가래떡이었다. 떳떳하게 떡볶이를 푹 퍼서 그릇에 옮겨 담았다.
어묵바에 떡볶이를 비벼 먹다 보니 목이 칼칼해서 국물이 필요했다. 떡튀순 세트와 함께 시켰던 어묵탕이 떠올랐다. 뚜껑을 열어보니 살짝 상한 것 같았다.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었다. 오, 예. 살짝 상한 음식 먹기. 이건 나의 사수께서 급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 이용하시는 비장의 카드이다. 팔팔 끓인 뒤, 후추를 팍팍 쳤더니 후추의 풍미가 어묵탕의 애매한 기운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맛있게 먹고, 장을 비우자!
이로써 나의 명절 상이 차려졌다. 어묵바, 떡볶이, 어묵탕. 허허,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끊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 몰래 사놓은 것이니, 어서 먹어 치워버려야 한다. 비로소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명절상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홀로 거하게 명절 음식을 잘 차려 먹고 있는데도 계속 전이 생각났다. 평상시에도 싫어하는 갈비찜도. 쳐다보지도 않던 송편마저도. 뱃속이 허한 건지, 마음이 허한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유난히도 적막한 추석날 밤, 푸른 개구리 한 마리가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청승맞게 울어댔다.
어트어트
다이어트
명절에는
예외로 해
설날에는
전 부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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