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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oneyberry

세 가지 물

흙탕물, 위스키, 그리고

by 허니베리


수술 후 항암치료를 앞두신 아버지께서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신 뒤 일주일 넘게 고열에 시달리셨다. 몸무게는 최저치를 기록했다. 죽을 끓여드리고, 식재료를 나르고,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사그라지지 않도록 불씨를 후후 부는 심정이었다. 10여 일 지나자,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나오셨다. 아버지와 공원에 서서 여전히 초록빛이 도는 나뭇잎 사이로 열린 주황색 감을 바라보았다. 봄철 꽃보다 싱그러웠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의 얼굴이 익은 감 색깔이었다. 독감이었다. 바로 주사를 맞고 주말 내내 쉬었지만, 기운을 차리지 못해 월요일에는 결석을 했다. 일하다가도 홀로 집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단풍처럼 빨갛게 타들어 갔다.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곁에 앉아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자, 아이가 내 무릎에 축축이 젖은 머리를 올려놓고 그제야 안심된다는 듯 잠들었다.


남편이 평소와 달리 일찍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잠시 소파 위에 얹어놓은 빨래 위에 털썩 누운 모습에 한숨이 새 나왔다. 아이는 몸이 힘들다며 짜증내며 눈물지었다. 설거지 하면서 거실에서 뒹구는 어린 두 남자를 떠올리자,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집안일을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모두 업무 관련 내용이었다. 심장 쪽 가슴이 뻐근해졌다.


늦은 밤,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하염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눈이 뻑뻑해진 후에야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읽을 책, 쓸 글이 있었지만 한참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TV장 위에 놓인 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통 안에는 작년에 아이가 학교 방과후 시간에 받아온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며칠 살다가 죽겠지 싶었는데 데려온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네,라고 중얼거리던 아이 음성이 떠올랐다.


TV 장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쪼그리고 앉은 채 물통을 들여다봤다. 가로 손바닥 한 뼘, 세로 손바닥 한 뼘 반 짜리 플라스틱 통이다. 미꾸라지가 밥을 주는 줄 알았는지 내 쪽으로 입을 내밀며 다가왔다. 거침없이 물살을 헤치며 나를 향해 돌진하는 미꾸라지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웅크리고 있는 내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순간, 물통 속에 퐁당 빠져들었다.

어푸푸. 물에 빠져 놀라기보다, 물 온도가 낮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생각보다 호흡하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공기 중에서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을 돌릴 때마다 긴 머리가 일렁이며 얼굴을 가렸다. 미용실 예약을 하면 일부러 방해라도 하듯 꼭 집이나 직장에 일이 생겼다. 다듬지 못해서 길어진 머리였다.


미꾸라지는 어디에 있나. 미꾸라지는 내가 등장했을 때부터 바닥에 꼼짝없이 붙어서 죽은 척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이 알려줬다. 죽으면 배가 뒤집힌다고. 뭐, 그쯤은 나도 아는데 너는 역시 모르는 게 없구나, 하고 놀랍다는 듯 말해주었다. 물 밖에서는 미꾸라지의 작은 움직임에도 놀랐던 내가 어디서 갑자기 담력이 솟았는지 미꾸라지와 말이라도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

앞으로 나가기 위해 팔을 휘젓기 위해 오른 팔을 들려던 순간, 어깨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깨 통증이 생긴 지도 몇 개월 지났지만, 나를 위해 병원에 갈 여유는 없었다. 인어 흉내를 내며 두 다리를 펄럭펄럭 움직여 미꾸라지가 반투명한 벽에 배를 붙이고 물 밖의 나를 바라보던 곳까지 다가갔다. 그곳에 서니, 거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작은 협탁 위 위스키 잔이었다. 집에서 평소 맥주 한 캔 정도를 홀짝이던 내가 처음으로 남편의 술병을 열어 위스키를 맛본 날이었다. 황금빛 색깔이 내뿜는 향과 예상과 달리 단 맛에 홀짝홀짝 넘기다 보니 남편이 눈치를 챌 만큼 마시고 말았다. 잔 옆에는 낡은 노트북 한 대가 놓여있었다. 소파 위에는 책 몇 권이 삐뚤빼뚤 쌓여있었고, 그 옆에는 리모컨이 툭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몇 개월째 카펫 노릇만 하는 요가 매트 위에 슬리퍼 두 짝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으며, 천정에는 사람 몸통만 한 물 자국이 번져있었다. 여섯 번의 공사로도 잡히지 않는 누수로 인한 얼룩을 보자, 습관적으로 한숨이 나오려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코로 물이 잔뜩 들어왔다. 머리가 저릿저릿한 상태로 깨달았다. 먼저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한숨도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을.


컥컥대는 내게 미꾸라지가 슬며시 다가왔다.

“괜찮아요? 머리로 등이라도 두드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좀 나아졌어요.” 호흡을 가다듬고 답하자, 미꾸라지가 몸을 살짝 비틀며 말을 이어갔다.

"고마워요. 물도 갈아주고, 밥도 챙겨주고."

"아니에요. 당연한 거죠. 한집에 살면서."


미꾸라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어때요? 저기는?”

“물 밖을 말하는 건가요?”

“네, 궁금했어요. 물이 없는 세상은 어때요? 살 만한가요?”

“글쎄요. 물이 없다고요? 오히려 이곳에는 없는 여러 종류의 물이 많아요. 수돗물, 빗물, 강물, 눈물...”

“아, 저 눈물은 뭔지 알아요. 당신이 저기 소파에 앉아 있을 때 가끔 당신 눈에서 흘러내리던 바로 그 물 아닌가요?”

“맞아요. 그거.”

“그건 어떻게, 왜 생기는 거예요?”

“눈물은... 눈물은 슬플 때, 아플 때, 기쁠 때, 행복할 때, 미워할 때, 후회할 때, 화해할 때, 참을 때 흐르곤 해요.”

“그 눈물은 어디로 흘러가지요?”

“눈물은 우리 삶으로 흘러가 구석구석을 적셔요. 눈물은 샘이 되고, 땅을 적셔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줘요. 그 눈물이 모이면 결국 강이 되는데, 그 강에 배를 띄울 수 있을 즈음, 우리는 그 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나지요.”


그 말을 마치자, 나는 다시 몸집이 커지며 소파 위로 튕겨 나왔다. 강한 충격에 눈을 꾹 감았다. 물 밖이었지만 여전히 물살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길게 숨을 내뱉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에 물기는 사라졌지만, 두 눈은 예외였다.


소파에 앉은 채, 미꾸라지를 바라보았다. 미꾸라지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우리 둘 다 더 이상 서로의 존재에 놀라지 않을 것임을. 서로가 지닌 물기를 안쓰러워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지 출처: Freepik / rawpix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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